칠언사운(七言四韻)Ⅱ /국역: 정민(한양대 국문과교수), /정리,편집=昊潭●개평의 사절정에 제하다題開平四絶亭신선의 약 달이는 연기 정자에서 가깝고亭近仙人藥竈烟향로봉의 푸른 기운 반쪽 처마 앞이로다.香爐積翠半檐前푸른 시냇길에 구름 숲은 아스라한데雲林縹緲靑溪路옥같은 골짝에선 생학(笙鶴) 소리 들리는 듯. 笙鶴依俙玉洞天관하(關河) 땅 먼 나그네 세월 꿈에 놀라서 遠客關河驚歲夢작은 고을 술 항아리 이별 자리 위로한다. 小陲罇酒慰離筵기양(岐陽) 땅 돌아가
칠언사운(七言四韻)Ⅰ //국역: 정민(한양대 국문과교수) ●사냥을 보다가觀獵삼경의 뿔피리소리 철관(鐵關)을 울리니 鼓角三更動鐵關장군의 사냥 길에 삭풍은 차고 맵다. 將軍出獵朔風寒산 오르며 나무 베어 온 묏부리 온통 붉고登山斬木羣巒赭짐승 쫓아 숲 에워싸 함성소리 시끄럽다. 逐獸圍林萬口讙재주 보기 마땅하고 때로 무기 번뜩이니 觀藝正宜時耀武군대 펼침 오랑캐를 정벌하는 연습이라. 張師端爲試征蠻정위(廷尉)의 하는 일은 오직 말을 내달림 뿐廷評事業惟馳馬공자(孔子), 안
칠언절구(七言絶句)Ⅴ●구일九日무슨 일로 중양절에 집에 있지 못하는가 何事重陽不在家시내 서편 국화 포기 누런 꽃이 피었는데. 澗西?菊已黃花흰 옷 입고 온종일 찾아오는 사람 없어 白衣竟日無人到용산에서 취한 맹가(孟嘉) 하릴없이 생각했네. 空憶龍山醉孟嘉●천엽매千葉梅섣달 지난 강남땅엔 눈 기운 자욱한데 臘盡江南雪意奢찬 달빛에 옅은 단장 그림자 빗겨있네. 淡粧寒月影橫斜시 늙은이 비쩍 마름 싫다할까 염려해怕却詩翁嫌太瘦부러 천 잎 보태어서 번화를 흉내내네. 故添千葉學繁華●난초 밭의 새벽 이슬蘭畦曉露쓸쓸한 가을 뜰에 바람 이슬 희미한
▶▶▶장흥군은 ‘문학관광기행특구’로 지칭되고 있다. 2008년에 지정된 이 특구의 개념은 한 지역이 특산물이 아닌 ‘문학’의 정체성을 특구화하여 대내외적으로 선양하였다는데 큰 의미가 있다. 그만큼 장흥의 문학은 정연하고 당당한 문맥이 이어지고 있으며 문학자원 또한 그 질량의 풍성함이 여타의 지역에 우선 하고 있다. 그래서 장흥의 문학, 문학사, 문학자원은 전국에서 가장 주목받는 지역으로 회자되고 있다.이렇듯 차별성 있는 장흥의 문학 그 문맥의 시원을 논할 때는 어김없이 ‘장흥의 가사문학’과 이어서 기봉 백광홍의 관서별곡이 등장한다.
오언절구(五言絶句)Ⅰ●김하서를 그리며-이름은 인후이다思金河西[名麟厚]들 해는 사령(沙嶺)에 환히 빛나고 野日明沙嶺시내 구름 판진(板津)에 잠기어 있네. 溪雲沉板津그대 가매 무고한지 안부 묻노라 君歸問無恙옥천(玉川) 있는 나와는 같지 않겠지. 有異玉川人●소소래에 묵고서-부안에 있다宿小蘇來[在扶安]등나무 넝쿨이 옛길 에워싸 藤蘿籠古逕고라니 사슴이 뜰까지 온다. 麋鹿出堂壇입정 든 스님은 말씀이 없고 入定僧無語바다의 달빛만 빈 창에 차다. 虛窓海月寒●낙일대에서-소소래 서편 숲 아래에 있다落日臺[在小蘇來西林下]바다는
기봉백광홍의 인간과 문학(2) 그의 작품 세계의 주목할만한 특징을 간단히 살펴보자.첫째, 부(賦)와 칠언고시 장편에 보이는 확고한 유학자적 면모의 작품을 들 수 있다. ‘옥루(屋漏)’와 ‘오곡은 종자 중에 훌륭한 것(五穀種之美)’ 같은 작품은 진작에 신독(愼獨)과 구인(求仁)의 공부가 얼마나 깊은 단계에 이르러갔는지를 징험해 보인 작품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고, ‘고사리 캐는 노래(採薇歌)’와 ‘부귀는 하늘에 달려있다(富貴在天)’ 등은 그의 평소 품은 뜻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이밖에 ‘동지(冬至)’와 ‘맑게 개인 출정하는 아침(會朝
기봉백광홍의 인간과 문학(1) ▶▶▶장흥군은 ‘문학관광기행특구’로 지칭되고 있다. 2008년에 지정된 이 특구의 개념은 한 지역이 특산물이 아닌 ‘문학’의 정체성을 특구화하여 대내외적으로 선양하였다는데 큰 의미가 있다. 그만큼 장흥의 문학은 정연하고 당당한 문맥이 이어지고 있으며 문학자원 또한 그 질량의 풍성함이 여타의 지역에 우선 하고 있다. 그래서 장흥의 문학, 문학사, 문학자원은 전국에서 가장 주목받는 지역으로 회자되고 있다. 이렇듯 차별성 있는 장흥의 문학 그 문맥의 시원을 논할 때는 어김없이 ‘장흥의 가사문학’과 이어서 기
장흥군 장동면 용곡리 두룡마을은 제암산(807m) 아래 위치한다. 1519년(己卯) 평산 신국민이 입촌하여 마을이 형성되면서 두룡촌(斗龍村)이라 하였다. 1970년경에는 30호 이상 거주하면서 인천이씨가 세거한 한적한 농촌마을 이다. 제암산에서 흘러 내려오는 물줄기를 용류천(龍流川)이라고 한다. 마을은 천을 따라 조성되어 있으며, 상류 지점인 장동면 두용산길 178에 용암정(龍菴亭)이 위치한다. 이 정자는 마을에 살았던 용암(龍菴) 이평호(인천인 34세, 1880~1955)는 평생을 어질고 의롭
9. 별신제(別神祭)와 무기계(無忮契)1) 별신제(別神祭)방촌마을의 정월 대보름날 행해지고 있는 별신제(別神祭)는 언제부터 행해졌다는 문헌의 기록은 없으나 400여년 前 대동계(大同契)가 조직된 시기부터 행해졌다고 전한다. 행사의 큰 의와 뜻은 마을의 무사안녕(無事安寧)과 주민들의 단합(團合)을 기원하는 전통풍속행사이다. 별신제는 여타 마을의 동제(洞祭), 당제(堂祭) 등과 토속적 의미는 비슷하나 유교적 제사인 삼헌(三獻) 제관 중심으로 행하여 절차에서 다른 마을과 구별되며 행사에 매귀가 동참한다. 방촌마을에서는 농악이
7. 산저 동계(山底 洞契)산저마을은 천관산 동쪽의 성조골과 대나무골이 멈추는 산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성조골에서 흘러내린 물이 마을 앞쪽으로 흐르고 개천 위쪽에 마을을 형성하여 남향(南向)하고 있는 곳은 양달 산저이다. 개천 건너 대나무골 쪽 자락에 위치한 마을을 응달 안산저라고 한다. 천관산 바로 밑의 마을로 지형이 마치 돼지가 산으로 올라가는 형국(形局)이라고 해서 불린 이름으로 뫼밑등(嶝) 이라고도 불리었다. 최초에는 '뫼산(山)' '돼지 저(猪)'를 합하여
5. 계춘동 동계(桂春洞 洞契)계춘동은 내동 마을길과 연결되어 상잠산과 다산등(嶝)의 연결지맥 아래 약간 깊숙한 곳에 위치한다. 마을의 주거 형성 과정은 1600초년 안항(顔巷) 위덕후의 차자이자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웅천현감을 지낸 위정렬(1580~1656)이 내동에서 분가하면서 처음의 터를 잡은 것으로 추정된다. 관산읍 방촌길 91-32에 위치한 존재고택(存齋古宅)은 내동 근암고택과 비슷한 시기(1649년경)에 위정렬이 신축하여 후손에게 전해 내려왔다. 公은 임진왜란 후 1603년 4촌 아우
4. 내동 동계(內洞 洞契)행정상 방촌리 1반은 등밭(嶝田), 객사골, 근래 개발로 입촌한 벅수골 지역(천관식당, 천관모텔 등), 동산밑, 윗골 지역이 해당된다. 방촌리 2반은 내동 지역이다. 총 40호이나, 일부 고령 거주민이 집을 비우고 병원 또는 도시 자녀의 집에서 거주하는 사례가 있어 실제 30호 가량이 거주한다. 지금의 천관식당과 천관모텔이 위치한 지역을 벅수골 이라고 한다. 이곳부터 행정상 번지가 방촌리에 해당한다. 고려 회주목 때 치소 동헌의 북문동(北門洞)과 둔군동(屯軍洞)이란 지
장흥군 관산읍 방촌리는 문화의 보고(寶庫)라 불리는 마을이다. 선사시대부터 중심적인 주거지가 형성되어 오랜 역사를 지닌 곳으로 마을 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380여기의 지석묘가 이를 입증하고 있다. 방촌마을의 장흥위씨는 안항(顔巷) 위덕후(1556~1612)가 1576년경 인근 당동에서 분가하면서 입촌한 후 현재까지 대표적 집성촌을 이루며 살아오고 있다. 특히 선대에서는 천관산(天冠山)과 장천재(長川齋)에서 강학(講學)하면서 호연지기(浩然之氣)를 키워왔다. 곳곳에는 선조들의 유택(幽宅)이 위치하고 있어 장흥위문과는 떼려야 뗄 수
■충렬(忠烈) 위계정(魏繼廷 5세 1038~1107) : 고려 제8대 현종(顯宗) 때 문하시랑 동평장사(門下侍郞 同平章事)를 지낸 위기로(魏耆老)의 차자이다. 문종(文宗) 때 문과 급제하여 순종(順宗), 선종(宣宗), 헌종(獻宗), 숙종(肅宗), 예종(睿宗) 등 6조를 모시면서 송나라에 보내는 국서(國書)를 초안하는 등 문장으로써 이름이 높았다. 작품으로 《동문선》에 하천안절표(賀天安節表)가 전한다. 특히 청렴 강직하여 청백리로서도 청사(靑史)에 빛나면서 숙종의 고굉 대신으로 예종이 즉위할 때 친히 옥새(玉璽)를 진배하는 등 관(官
장흥의 수인산(修仁山 561m) 지맥이 동남쪽으로 흘러내린 필봉(筆峯)과 수리봉(鷲峯 408m)아래 잡은 부산면 내안리 내동마을은 조선조 초기에 평강현감을 지낸 김경의(金敬義)가 1453년 계유정난(癸酉靖難)을 피해 입촌하여 후손들의 번손으로 영광김씨 집성촌이 형성되었다. 영광김씨의 시조는 신라 경순왕의 넷째 아들 대안군(大安君) 김은열의 3세손으로 영광군(靈光君)에 훈봉된 문안(文安) 김심언(金審言 ?~1018)으로 고려 1014년(현종5) 내사시랑평장사와 서경유수를 지냈다. 중시조이자 1세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