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의 아픔을 나누었던
愛民-憂國의 대선사 원감국사 충지
몽고족의 침입과 원나라의 내정간섭으로 이어지는 일대 격동기였던 고려조 후기, 당시 우리사회의 시대적 아픔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살다 간 애민 우국 승려가 있다. 바로 장흥출신의 승려 원감국사 충지다.
속성은 위씨(魏氏)이고 속명은 원개였던 국사는 1244(고종31) 문과에서 장원으로 급제, 벼슬이 한림에 이르렀고 일본에 사신으로 건너가 국위를 선양하기도 했으며 문체가 원숙하고 뛰어나 당시 선비들을 탄복하게 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충지는 어릴 적부터 속세를 떠날 뜻을 두고 관직생활을 하던 중, 몽고에 반기를 든 최씨의 무인정권의 항몽으로 수도가 강화로 옮겨지고 육지에 남은 백성들만 몽고와의 전쟁을 치르고 있었고 더구나 백성들은 과중한 조세부담이라는 이중적 고통을 안은 암담한 현실에서 개인의 역량으로 어찌 할 수 없는 시대적 역사적 상황에 직면, 출가를 결심한다.


그후 충지는 선원사 원오국사에게 구족계를 받아 승려가 된다(법명 법환. 후에 충지로 개명했고 법호를 복암노인이라 했다).
이 무렵, 원나라가 탐라를 정벌한 뒤 수선사도 군량미 명목으로 세금을 내게 되었는데, 국사는 원나라 세조에게 청전표(請田表)를 올려 빼앗긴 논밭을 되돌려 받는다. 이를 계기로 세조는 국사를 흠모하게 되어 초청하지만 거듭 거절하다가 마침내 북경을 방문한다. 북경에서 국사는 세조로부터 빈주(賓主)와 스승 대접을 받는다. 귀국할 때 세조로부터 금란가사와 벽수장삼, 흰 불자 한 쌍을 선사 받는다.
귀국한 국사는 여러 사찰을 거쳐 원오국사의 추천으로 수선사 제6세 사주가 되고 1266년(원종7) 김해현 감로사 주지로 있다가 원오국사의 사후에 조계종 제6사가 된다.
국사는 특히 시문에 탁월, <동문선>에 그의 여러 시문이 실려 있으며 저서로 <원감국사가송>이 전한다.
국사가 세수 67세, 법랍 39세로 세상을 뜨자 충열왕은 시호를 원감국사라 하고 탑을 보명이라 하였다. 원감국사의 탑은 현재 송광사 감로암에 전한다.

■원감국사의 유적 유물




▲수미사 전경- 뒤쪽에 병품바위가 보인다 ▲수미사 도량에 위치한 마애여래불상(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93호)

원감국사의 탑이 송광사 감로암에 있는 것은 수선사는 송광사에 있었기 때문이다. 해서 원감국사는 송광사의 16조사 제6조사로 등재돼 있다.
지난 2002년 9월 29일, 송광사에서 6세 법주인 원감국사 충지(圓鑑國師 沖止) 스님의 생애와 사상을 조명하는 학술대회가 개최된 것도 이같은 이유에서였다.
이때 원감국사 할술대회에서는 김영태 명예교수(동국대), 진성규 교수(중앙대 사학과), 최인선 교수(순천대 사학과) 등이 원감국사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고, 송광사 16조사에 대한 헌다의식을 국서전에서 봉행하기도 했다.
원감국사와 관련된 유적은 선운사 말사인 개암사에도 전한다. 개암사는 634년(우왕 35) 백제의 묘련이 창건하고 삼국통일 후 원효와 의상이 이곳에 머물면서 676년에 중수했던 사찰인데, 그 후 1275년(고려 충숙왕 원년)에 원감국사가 50세 나이로 승주 조계산의 수선사에서 이곳으로 들어와 지금의 자리에 절을 중창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원감국사와 관련된 유적은 바로 장흥군에도 남아 있다.
장흥읍 장흥경찰서 뒷산에 불리어지고 있는 '장원봉'이라는 이름과 부산면 구룡리 자미마을 병풍바위에 새겨진 마애불상(磨崖佛像)이 그것이다.
장원봉은 원감국사 형제(원개,문개)가 잇달아 장원급제한 데서 유래하고 있다. 즉 국사와 그의 형제들이 줄곧 장원으로 등과하자 그 형제가 살았던 마을 뒤 높은 봉우리를 장원봉이라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또 지금은 병풍바위의 마애불상은 비바람에 씻겨 얼핏 알아보기 쉽지 않은데, 엷은 흔적으로나마 바위에 새겨진 마애불(磨崖佛)형태의 화상의 모습을 볼수 있다.

■자미마을의 병풍방위 마애불상
장흥군 부산면 자미마을, 수인산의 금계포란형 이란 명당에 벼슬바위와 병풍바위가 있다.
이곳은 고려 때 바로 원감국사가 마애불상을 조성하고 석굴에서 면벽지가풍의 뜻을 가지고 용맹수도 하던 곳이다.
원감국사는 금직옥당의 관위에 있으면서 불교의 인연으로 1254년(29세, 고종41년)강화도 선원사에서 원오국사에게 출사 득도하여 구족계를 받고 수도하던 중 스승께서 경남김해 신어산 감로사로 주지를 명 하였으나 주지직을 마다하고 공부에 더 정진하겠다며 1260년(35세, 원종1년)에 하안거를 마치고 석장을 남쪽으로 굴리어 이곳 고향 장흥에서 마래여불을 조성하고 석굴에서 6년동안 수도하다가, 1266년(병인, 원종7년) 이곳을 떠나 여러 사찰에 공을 세운 후 스승인 원오국사의 열반으로 인하여 1286년(병술(61세, 4월16일) 순천 송광사 수선사 제6대 국사가 되었다. (마애불상 조성과 관련된 또 다른 일화로, 원감국사가 입적한 뒤 그를 따르는 문하생들이 국사의 고향인 이곳에서 마애불을 조각했다는 설이다.
또 혹자는 <원감국사가송>에 나오는 충지에 대한 내용과 조각기법을 형식화해 음각으로 처리한 것 등으로 보아 13세기 무렵에 제작한 석불로 짐작된다고 정의하기도 한다) 아무튼 이 병풍바위의 마애불을 국사가 직접 조각했듯, 국사 사후에 제자들이 조각했듯, 국국사와 관련이 있음에는 이론이 없다.
지난 1998년, 국사의 사후 732년만에 장흥군과 전라남도는 이 마애불을 전라남도 유형 문화재 제 193호로 지정한다(전남 장흥군 부산면 구룡 산52 번지- 長興九龍里磨崖如來坐像).
(고려시대 불상인 이 마애불은 부산면 구룡리 자미 마을에서 250m 정도 떨어져 있는 병풍바위에 새겨져 있다. 이 바위는 해발고도 300m 정도인 봉우리 밑에 있다. 바위 암벽의 전체 높이는 약 20m이며 지상에서 6m 정도 높이에 마애불을 새겼다. 바위면이 편평하지 않고 불상을 음각으로 새겨서 윤곽을 잘 알 수 없지만 얼굴 모습과 결가부좌(結跏趺坐)를 한 무릎에 옷주름 일부가 선각으로 나타나 있다. 머리에는 육계가 솟아 있고 머리카락은 소발(素髮)이며 눈, 코, 입을 묘사했다. 법의(法衣)는 통견이고 수인(手印)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취하였으며 무릎으로 내려와서는 음각으로 처리되었으나 심하게 마모되어 윤곽을 정확히 알 수 없다.)

■정각스님- 수미사 중창 불사 추진
그리고 그로부터 6년만인 2004년 5월, 국사 사후 738년만에 정각(正覺. 65. 법랍40. 호 峰山) 스님이 자미마을의 유씨문중과 유담씨, 그리고 박석봉씨로부터 진입로 땅을 승낙받고 장흥군으로부터 사업비를 지원받아 진입로 포장과 함께 병품바위 바로 밑인 구룡리779-1번지에 ‘수미사’라는 사찰을 건립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지난 해부터 정각 스님은 원감국사의 유적이 깃든 병품바위의 마애불상 복원 등 문화재를 보존하고 중생들의 안식처와 발원지를 조성하기 위하여 ‘수미사 중창불사’를 추진하고 있다. 정각 스님은“이곳은 원감국사의 고행과 수행의 발자치가 서려있는 귀중한 장흥군의 문화유산이지만 행정당국의 무관심으로 불사건립에 어려움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사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노력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이곳 병품바위와 석굴, 그리고 수미사를 중심으로 이곳 일대가 애민 우국정신에 투철했던 국사의 생애와 사상, 문학적 업적을 조명하는 교육의 장으로, 장흥군의 귀중한 문화유산으로 거듭 태어날 수 있는 획기적인 방안이 모색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스임은 “이 한 몸도 국사의 환생을 보는 불사 건립에 정진하겠다”는 각오를 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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