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상/ 변호사

바깥에 널리 알려져 있는 장흥땅 유물로 ‘관산 방촌의 석장승-진서대장군(鎭西大將軍)’이 있다.
그것이 장생(生,栍)·장승(承,丞)·법수·벅수인지 또는 미륵인지에 그 견해가 엇갈리는데, 통설은 ‘석장승’으로 정리한다. 어원발생적으로는 ‘장생(生)’이 가장 빠르고, ‘장생(栍)-장승(承)’ 순서로 변했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그런데 마침 장흥의 위성호님이 「장흥문화 제27호(2005)」에 ‘관산의 석장승과 여원연합 고려수군 소고’를 기고하셨는바, 외람되지만 몇 가지 언급해보고자 한다.

위성호님 견해는 기존 통설을 쫓아 “서방, 즉 중국쪽에서 들어온 두창(두신)·호귀마마 역귀를 막기 위한 비보적 차원에서 중국 황제를 지칭하는 진서대장군을 만들었을 것”이며, “그 설치시점도 려·원연합군의 일본동정(東征) 무렵으로는 볼 수 없을 것”이라는게 그 요지이다. “관산의 진서대장군과 고려수군은 무관하다”고 단정하신다. (즉, 「1966년판 장흥지(병오지)」에 추가된 ‘회주석문 석인(石人)’기록이나 여타 ‘려·몽수군관련설’을 부정적으로 비판하신다.)

이하, 필자 견해를 보태본다.
먼저, 진서(鎭西)의 어의이다. ‘진서’의 ‘진(鎭)’을 두고 ‘서쪽을 진압·제압한다’고 보는게 일반적이나 그냥 ‘서쪽 진영의 줄임말’ 또는 ‘서쪽을 (또는 서쪽에서) 수호한다’고 볼 수 있다. 장흥 수인산을 ‘장흥진산’이라 함은 ‘장흥을 수호한다’는 뜻이지 ‘장흥을 진압한다’는 뜻은 아니다. 평안도 지역의 ‘진서루’도 ‘서쪽 중국을 제압한다’기보다는 ‘서쪽에 둔, 서쪽을 수호하는’이라고 새겨야 할 것이다.

돌이켜보건대, 고려와 원나라의 려·몽(원)연합군이 일본정벌을 위하여 출발했던 1274년경은 ‘이른바 동정(東征) 캐치프레이즈 시대’였다. 요즈음 언필칭 입만 벌리면 ‘개혁’이라 말하듯 그땐 온 세상이 온통 ‘동정(東征)’이었다. 2차 동정때는 고려정부자체가 ‘정동행성(征東行省)’체제이었고, 고려왕은 정동행성의 부서장 격에 불과했다. 결국 서쪽의 고려땅은 동쪽의 일본땅 정벌을 위한 주력군 본영인 셈이다. ‘웨스트 베이스캠프(West Basecamp)’ 또는 ‘헤드쿼터 인 웨스트(Headquarter in West)’였다. ‘진서(鎭西)와 동정(東征)’이 수레의 두바퀴처럼 맞물렸다고 볼 수 있다. (이때의 남·서 지역고려사람들이 ‘정동’이라는 시대적 질곡에 피흘리며 시달렸던 도탄지경을 ‘장흥출신, 원감국사 충지’가 비분강개조의 장시로 남겨두었다.)

물론 고려사등 문헌자체에 이런 사정이 명쾌하게 기재되어 있지는 않다. 그러나 ‘대장군’ 직책만큼은 사실(史實)이다. 전라도 지역을 관장했던 ‘대장군’으로 ‘나유(羅裕) 대장군’이 있었다. 몽고의 앞잡이 홍다구는 ‘소용 대장군’이었다. 그 무렵 동정전함 건조 감독차 장흥땅에 ‘지부사’로 윤해(尹諧)가 파견된 일이 장흥군지에도 기록되어 있다.

그 당시 일본 동정용 전함은 ‘전북 부안(변산)의 검모진 지역’과 ‘전남 장흥(천관산) 죽청지역’에서 만들었는데, 공교롭게도 ‘진서대장군’ 명칭은 전북 남원 운봉과 전남 장흥 천관산 기슭 딱 두 곳에만 발견된다. 남원의 진서대장군은 지리산쪽 목재를 변산쪽으로 수송하던 중간 길목 정도 아니었을까? (한편 변산에도 ‘진서리 도요지’가 있고, 천관산쪽에도 ‘강진·마량 도요지’가 있는데, 군수용품 조달역할을 했을 것이다.)

더 상상해본다. 그때는 3만5,000여명을 동원하여 4개월이내에 전함 900여척을 벼락치듯 시급히 건조해야하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대량의 목재와 군마를 집결·수송시킴에 있어 그 집결지·계표·이정표 표시로 ‘사람들이 바삐 오고가는 길목’에 혹 ‘진서대장군 표지판’이 필요했던 것 아닐까. (그래서 병오지에도 ‘입로방(立路傍)하다’고 기록된 것 아닐까.) 외지에서 내려온 몽고병들이나 개성사람들에게는 그렇게 ‘진서대장군’ 권위에 의지하는 현지 표지판이 더 절실했을 법하다. (요즘에도 스타 장성이 움직이게 되면 빨간 별판과 장군 깃발이 따라 다닌다.)

그런데 현금에도 전북 부안에 “진서(鎭西)면” 명칭이 여전히 남아있음은 예사롭지 않다. 부안과 장흥에서 만들어진 전선들은 그때의 합포(경남 마산)지역에서 재집결하여 일본으로 출발하였는데, 옛 합포지역에도 “진서 명칭”이 남아있었다. (그런데 그 지역 사람들은 곧장 ‘진서’로 보지 않고 ‘진의 서쪽’으로 풀이하는 것 같다.)

한편 통설을 취한 위성호님 견해는 다음 사정을 해명할 수 있어야 한다.
서쪽에서 건너 왔다는 마마·두창이 꼭 장흥과 남원지역에만 창궐한 것도 아닌데, 왜 유독 장흥과 남원 두 곳에만 ‘진서대장군’으로 남아있을 것인가. (우리나라 다른 지역에도 마마·두창이 함께 번졌을 터인데 왜 거기엔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식이고 ‘진서대장군’이 없다는 말인가.)
이왕에 그런 방역·재액 이유를 내세운다면 중국과 교류하는 서·남향 항포구 바닷가에 세우는 것이 더 합당한 것 아닐까?

또한 그 설치연대를 두고서 위성호님은 ‘회주고성 성축성격을 왜구입보성으로 본다’고 추측하시면서 ‘고려 충정왕때부터 우왕까지의 40년 연간(대략 1349~1388년간) 또는 그 직후에 세워졌을 것’이다고 추론하시지만, 회주고성 성축시점에 관한 절대편년을 객관적으로 단정할 수도 없는만큼 그런 추산방법에는 설득력이 부족하다. (회주목 승격시점은 1265년이고, 왜구 침입은 고려말기의 일상사였다. 장흥치소가 ‘나주 철야현’으로 피난 간 때가 1379년경이다.)

이 대목에서 ‘장흥사람 필자’는 ‘장흥사람들 여러분’ 앞에서 한가지 시론(試論)을 제시한다.

장흥사람, 기봉 백광홍 선생(1522~1556)은 장흥·관산(고읍) 방촌에 있는 위곤의 집을 방문하면서 칠언절구를 남겼다. 여기에 ‘장생(長生)’이 등장한다.

옛 성 남은 성가퀴 반너머 덤불인데 古城殘堞半藤蘿
오차(烏次)에 남은 백성 몇 집이나 되려는지. 烏次餘民有幾家
산악은 그대로요 강과 바다 드넓은데 山岳不崩江海闊
장생 비결 선녀에게 물어보려 한다네. 長生我欲問仙娥

번역자 정민 교수는 제4행의 ‘장생’을 ‘장생 불사의 비결’로 옮겼지만, 앞1·2·3행이 역사적 차원의 무상함과 산천자연의 의구함을 대비시키고 있음에 비추어 제4행의 장생을 개인적 차원의 ‘장생비결’로만 옮겨버리면 그 해석맥락이 자연스럽지 못하다. 제4행은 (그때 기봉선생이 그렇게 변함없이 그 자리에 버텨온 장생과 마주쳤다고 전제하고서) ‘장생의 사연을 저 달(선아)에게 물어보려 한다네’ 또는 ‘나도 장생이 될 수 있는지 저 달에게 물어보려 한다네’정도로 옮겨 보면 어떠한지? 즉 ‘장생’을 보고서 ‘장생’을 묻게 되는 ‘중의적 이중표현’ 아니었을까?

그런데 ‘장생(長生)’어원사(史)에 있어 가장 빠른 용례는 ‘장흥 보림사-장생표주(長生標柱)’이다. 신통하게도 두 ‘장생(長生)’이 우리 장흥땅에서 딱 맞아 떨어지고 있다.
여기서 ‘장생(長生)’이 장생(長栍), 장승(長承,長丞)에 앞선 용어임을 유념하자.

기봉·옥봉형제는 장흥 보림사에 자주 가셨다. 그 분들이 그곳 ‘보림사 보조선사 창성탑비’에 새겨진 ‘장생표주’를 못 보았을리 없다. 보림사에서 공부했던 기봉선생이 황량한 고성터(오아·오차성 옛터)의 방촌을 방문했을 때 그 길목가에 서있었을, 즉 ‘입로방(立路傍)’하면서 그 땅과 그 땅 사람들의 영고성쇠를 묵묵히 지켜보았을, ‘장생(長生)’을 못보았을리 없을 것이다.

요컨대, 두 견해의 차이점은 이러하다.
위성호님은 “관산의 진서대장군은 성곽 서역의 부조를 진압하는 풍수지리상의 비보장생이다. 동시에 강남·중국에서 오는 두신을 ‘진서대장군이라는 중국 황제’의 권위를 빌어 퇴치하기 위한 두창 법수(벅수)로서 그 기능이 있었다. 관산의 진서대장군과 고려수군은 무관하다”라고 주장하신다. 진서의 서쪽을 서쪽 중국에서 구한다.

반면에 필자경우는 “1966년판 장흥군지(병오지) ‘회주석인(石人)’ 기록을 쉽게 배제해 버리기보다는 ‘진서(鎭西)용례, 1274년경의 동정(東征) 이데올로기 시대의 부안(변산)지역과 천관산 지역의 역할, 기봉 백광홍의 칠언절구에 나타나는 장생(長生) 배경’등을 종합해 보건대, 오히려 관산의 진서대장군과 려·원수군간에는 어떤 상관성이 있었을 법하다. 그리고 석장승보다는 석장생(石長生)이다”는 시론이다. 진서의 서쪽을 동쪽 일본에서 찾는다.

필자가 옳다고만 고집하지 않으련다. 다만, 장흥사람 시각으로 우리 장흥일에 한번쯤 더 새롭게 검토해 볼 수 있지 않느냐는 문제제기일 뿐이다. 질책바란다.

<참고문헌>
1. 남창 손진태의 삶과 학문 (이필영의 발제문중 ‘장승’관련부분, 2000. 한국역사민속학회, ‘손진태선생 탄신 100주년기념 학술심포지움’)
1. 장승과 벅수 (김두학, 대원사, 1991.)
1. 관산의 석장승과 여원연합 고려수군 소고 (위성호, 장흥문화 27호, 2005.)
1. 민학회보, ‘장생석표(배경수)’, ‘법수(박용기)’ 민학회, 1980.6.
1. 부안이야기1 (김형주, 도서출판 밝, 2003.)
1. 국역 기봉집 (정민 역, 기봉 백광홍 선생기념사업회, 2004.)

저작권자 © 장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