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측은 보존처리되기전 보림사 비로좌나불상. 우측은 복원된 이후의 철불.


철불의 본래 모습을 되찾은 철불의 온화한 미소




<사진/ 문화재청 제공>

두꺼운 금박을 온 몸에 두른 국보 제117호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이 거추장스러운 황금옷을 벗어던지고 본래의 미소를 드러냈다.

문화재청은 불교문화유산의 제모습 찾기와 효율적인 보존관리를 위하여 국보 제117호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에 대해 개금(도금)을 벗겨내는 전면적인 보존처리작업을 추진, 최근 본래의 미소와 전체적인 모습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작업을 완료했다고 26일 밝혔다.

보림사 비로자나불은 통일신라시대(9세기 중반)에 조영된 철조불상으로 뛰어난 주조기술로 불교조각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두꺼운 개금과 채색으로 본래의 모습을 상실하고 있을뿐만 아니라 부처의 존엄성도 금박에 갇혀 드러나지 않는다는 의견이 제기돼 왔다.

통일신라시대 말기 철조 불상인 보림사 철조 비로자나불은 제작 연대가 확실하고 이 시대 불교미술사나 불교사상을 이해하는 데 더없이 소중한 자료여서 1963년 2월 21일 국보 제117호로 등재됐다.

그러나 그동안 이 철불은 외부에 내놓고 자랑하기는 힘든 형태였다. 철불임에도 금불(金佛)이었기 때문이다. 언뜻 이 불상이 금불 혹은 금동불로 착각을 주기도 한 까닭은 금박을 입혀 놓았기 때문.

금박을 입히는 것을 개금(改金)이라고 한다. 즉 목조불이나 청동불, 철불에 금가루를 발라 착장케 하는 불교의식을 다시 금으로 입힌다는 뜻에서 개금으로 부른다.

불교의식 측면에서 개금은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이를 문화유산이라는 점에서는 본래의 원형을 훼손한 것이나 다름없다. 보림사 철불은 1998년 12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금박을 입힌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2006년 보림사 철조 비로자나불좌상에서 금박을 제거, 원형을 살리고 본래의 철불로 환원하기로 결정한 것은 이 때문이다.

이리하여 문화재청은 2006년에 철불 복원에 대한 예산을 확보하고, 관련 문화재위원과 국립문화재연구소 보존과학팀 관계자들로 구성된 자문위원회를 구성하는 한편, 이를 통해 철불 복원작업을 지휘하기로 결정하고, 그해 12월부터 본격적으로 철불 복원 작업에 들어갔던 것.

이로부터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에 대한 보존처리가 추진, 철불 표면의 초콜릿 색깔 도색층과 은백색의 알루미늄층을 제거하고 파손된 귓불의 성형작업도 실시했다.

그리하여 보존작업을 마친 보림사 철불은 모습을 되찾아 그동안 두꺼운 금박과 페인트에 가려져 있던 모습에서 중생을 이끄는 부처의 온화한 미소를 생생하게 드러냈다.

■비로자나불(毘盧遮那:Vairocana)은-

산스크리트어로 태양을 뜻하는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은 화엄종의 본존불로 광명을 발해 온 세상을 밝힌다는 부처다.

따라서 이 불상은 우주 어디에서나 영원히 빛을 비추는 부처이다.

비로자나불을 의역해서 부르는 대광명편조(大光明遍照)라는 이름이 바로 이 부처의 성격을 잘 말해준다. 밀교계통 종파에서는 대일여래(大日如來)라고 부르기도 한다.

비로자나불을 봉안한 불전은 대적광전(大寂光殿), 대광명전(大光明殿), 비로전(毘盧殿)이다. 협시보살로는 문수보살, 보현보살이 보좌하고 있다. 불전의 규모가 큰 경우 노사나불(盧舍那佛)과 석가불을 모시고 각각 협시보살을 모신다.

비로자나불은 통일신라부터 화엄종 사찰의 주존불로서 크게 유행을 했다. 수인은 지권인(智拳印)을 짓고 있는데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의 지권인이 차이가 있다. 통일신라시대는 오른손 주먹을 가슴에 아래로 포개고, 아래 왼손 검지를 오른손 주먹이 감싼 모양이며, 고려시대의 주먹쥔 왼손을 오른손으로 감싼 모습의 지권인으로 약간 변화한 모습을 보여준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주요 불상으로는 보림사 비로자나불, 동화사 비로자나불, 불국사 금동비로자나불, 도피안사 비로자나불, 증심사 비로자나불, 취루사 비로자나불 등이다.

비로자나불은 때로 관, 영락, 팔찌, 천의를 걸친 보살형으로 조성되기도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별로 볼 수 없다.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

이 철불은 보림사 대적광전에 모셔진 철로 만든 불상이다. 현재 대좌(臺座)와 광배(光背)를 잃고 불신(佛身)만 남아 있는 상태이다. 불상의 왼팔 뒷면에 신라 헌안왕 2년(858) 무주장사.지금의 광주와 장흥)의 부관이었던 김수종이 시주하여 불상을 만들었다는 내용의 글이 적혀 있어서 정확한 조성연대를 알 수 있는 작품이다.

특히 머리에는 작은 소라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달걀형의 얼굴에는 약간 살이 올라 있다. 오똑한 콧날, 굳게 다문 입 등에서 약간의 위엄을 느낄 수 있으나 전체적으로 다소 추상화된 모습이다.

팽창된 체구와 가슴의 표현 등은 당당해 보이면서도 긴장감과 탄력성이 줄어 들었고, 몸에 비해 지나치게 작은 손과 넓은 무릎은 불상의 전체적인 균형을 흐트러뜨리고 있다.

양 어깨에 걸쳐 입은 옷은 가슴 앞에서 U자형으로 모아지며, 다시 두 팔에 걸쳐 무릎으로 흘러내리고 있다. 옷주름은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고 있지만 탄력을 잃은 모습이다.

이런 형태의 표현은 신라 불상에서 보여주던 이상적인 조형감각이 후퇴하고 도식화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9세기 후반 불상 양식의 대표적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손은 왼손의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고 있는 모습으로 비로자나불이 취하는 일반적인 손모양이다.

이 작품은 만든 연대가 확실하여 당시 유사한 비로자나불의 계보를 확인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며, 신라말부터 고려초에 걸쳐 유행한 철로 만든 불상의 첫번째 예라는 점에서 그 가치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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