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에서 다산 정약용 선생(1762~1836년) 만큼 폭넓은 분야에서 두루두루 굵직한 업적을 남긴 인물도 흔치 않다. 특히 우리 시대와 근접한 19세기를 살다간 혁혁한 인물들 중에서도 다산 장약용만큼 드라마틱하게, 영검하고 웅대한 삶을 영위해간 인물도 드물다.

그는 경전의 뜻을 소상하게 드러낸 경학자였으며, 복잡한 예론(禮論)을 일목요연하게 풀어낸 예학자였고, 목민관의 도리를 명쾌히 설파한 유능한 행정가였으며, 아동교육의 실천적 대안을 모색한 교육학자였고, 역사에 해박한 역사학자였다. 그는 또 화성 축성을 설계하고 기중가(起重架)와 배다리, 유형거를 제작한 토목공학자였고 기계공학자였다.

그뿐인가. 지리학과 의학, 국어학과 법학에도 조예가 있어 자연과학과 인문·사회과학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었던 위대한 석학이었다. 그의 위대함은 무엇보다 18년의 유배 생활을 하면서 이들 모든 분야를 망라한 500여 권에 이르는 저서를 완성했을 정도로 주자학, 서학, 불교, 도학, 고대 유학 등 다양한 사상을 흡수하면서도 어떤 경향에도 치우치지 않은, 최근 학자들이 '다산학'으로 명명하는 그 자신만의 고유한 사상세계를 구축했던 '웅대한 산'이었다.

그동안 감히 소설로서 누구도 오르지 못했던 그 '다산 정약용'을 마침내 한승원씨가 올랐다.

최근 펴낸 다산 정약용을 소재로 한 장편소설 ‘다산 1·2’(랜덤하우스)가 그것이다.

장편소설 ‘다산1,2’은 한 선생이 고향인 전남 장흥으로 내려가 지난 13년간 바다가 지척에 내려다 보이는 율산마을(안양면) '해산토굴'에 칩거하면서 열정을 기울인 끝에 완성한 역작이다.

다산을 쓰기 위해 다산이 된 한승원

선생은 '다산을 오르기 위해' 그 전초전으로 다산 정약용과 교분을 나눈 초의선사, 제자인 김정희, 형 정약전 등을 소재로 일련의 역사소설을 발표했다. 그리고 그런 연후에 13년동안 집요하게 끈을 놓지 않고 있었던 다산 연구에 마침표를 찍었다. 선생은 다산을 공부하며 ‘초의’(2003) ‘흑산도 가는 길’(2005) ‘추사’(2007) 등을 많은 공을 들여가며 써 내려갔지만, 이들 3편의 작품들은 '다산'이라는 웅대한 산을 타기 전에 올라야 할 주변의 준봉이었을 뿐이다.

해서 선생은 “다산 정약용은 수많은 준봉들을 푸른 하늘 속에 깊이 묻고 있는 보랏빛의 영검하고 웅대한 산이다. 그러한 산에 잘못 들어가면 길을 잃고 조난을 당할 수도 있다. 가령 다산 정약용과 사귄 이후 술병이 들어 40세의 나이로 요절한 혜장스님은 길을 잃고 조난을 당한 사람일 터이고, 다산 정약용을 따름으로써 속이 더욱 웅숭 깊어지고 영혼의 체구가 커지고 자유자재의 실사구시적인 선승으로 이름을 드날리게 된 초의스님은 다산이란 산을 잘 탄 사람일 터이다. 나는 초의스님처럼 다산을 잘 타려고 무진 애를 썼다”고 말하고 있다.



결국 '시대를 일깨운 역사의 웅대한 산'이었던 다산이라는 드넓고 깊은 세계 속에서 13년동안 헤매던 선생이 드디어 그 힘겨운 다산을 넘었고, 구름 속에 원경으로 솟아만 있던 다산은 '한국문학을 움직이는 거장 한승원'(박범신)을 만남으로써 새롭게 가까운 거리의 영검한 산으로 마침내 우리 앞에 다가 온 것이다.

선생은 '다산 1,2'의 집필을 위해 5년간 200여권의 문헌과 자료를 섭렵했다.

다산이 유배생활을 했듯, 그 자신도 해산토굴(집필실)에 자신을 유폐시켜 놓고 갇혀 살았다.

“다산이 객혈하듯 책을 썼던 것처럼” 자신도 피 토하듯 소설을 써야했다. 13년간 선생은 다산의 그림자가 되었고 다산의 분신이 되었다.

그렇게 해서 탄생된 '다산 1,2'는 전기소설도 역사소설도 아닌, 전혀 새로운 소설이 되었다. 다산의 생각과 상상력, 다산의 체취와 인품과 사상이 복원된 소설이 되었다.

그동안 단편적으로만 알려져 있던 다산의고독하고 곤고했던 생애는 그런 연유로 이 소설에서는 입체적이고 구체적으로 그려진다.

특히 이 책은 한승원의 농익은 필력, 역동적인 문체, 깊은 통찰력으로 빚어낸 소설이어서 다산이 역사 속의 인물이라기 보다 시대를 초월해 우리 앞에 우뚝 서 있는 다산으로 읽혀진다.

이 소설은 1801년 신유사옥(벽파가 천주교를 내세워 정적을 숙청한 사건)으로 인해 죽을 고비를 간신히 넘기고 귀양살이를 하게 된 다산이 신산한 운명을 어떻게 이겨냈는 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양날의 가위로 세상 재단- 이 시대의 해법

다산은 어린 시절부터 주자학을 읽고, 성년이 된 다음에는 천주학에 심취했지만 나라에서 금하고 조상의 제사를 지내지 못하게 한다는 이유로 천주학을 버리고 정학으로 돌아섰다. 정학은 공자·맹자·주자 등 성인의 학문. 그러면서도 다산은 주자학을 비판했고 천주학을 버렸다고 했지만 그 요체를 가슴에 새겨 담고 있었다. 다산은 즉 주자학과 천주학이라는 양날의 거대한 가위로써 세상을 재단하여 읽어내고 새로이 디자인한 것이다. 그것이 다산의 삶이었고 모든 저서들이다.

그러므로 다산이 남기고 간 삶의 모습과 그의 저서들은 극단의 이분법적인 갈등 속에 살고 있는 우리 시대에 근본적인 해법을 제시하고 있다.

다산이 성리학의 창시자 주자와 ‘천주실의'를 저술한 마테오 리치가 준 두 종류의 약을 섞어 마시는 소설의 첫 장면은 작가의 다산에 대한 이러한 생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해서 한 선생은 “실사구시의 삶을 살았던 정약용 선생은 어둠 속에서 깊이 잠들어 있거나 길을 잃고 헤매는 인민의 영혼을 일깨워주는 꼭두새벽의 쇠북소리”라고 자평한다.

정약용과 이벽 앞에 두 사람의 남자가 나타났다. 햇살을 받고 있는 남자는 천주교의 하얀 사제복을 입은 서양 사람이었고, 은행나무 그늘 아래에 있는 남자는 붉은 옷을 입고 상투를 조그마하게 튼 중국사람이었다. 그들의 좌판 위에는 약병들과 청자 잔 한 개씩이 놓여 있었다.
중국인 복장을 한 사람이 “그대들을 기다리고 있었소이다. 내가 권하는 이 약을 마시면 하늘과 땅의 이치를 단박에 모두 알 수 있을 것이외다” 하고 말했고, 사제복 차림을 한 사람이 “잘 오셨소이다. 내가 권하는 이 약을 마시면 천지조화를 금방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천국에서 영생할 수 있을 것이외다” 하고 말했다. 정약용이 두 남자의 얼굴과 그들의 좌판 위에 놓인 약병을 번갈아 살피는데, 이벽이 정약용에게 귀엣말을 했다.
“정공, 나는 이 분들의 약을 무시로 마십니다. 어느 한쪽만 먹으면 안 되고 고루 섞어서 마셔야만 합니다. 저 중국 사람이 누구이고, 저 사제 차림을 한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있겠소이까?”
이벽이 정약용의 손을 이끌고 두 사람 앞으로 나아가서 그들을 소개했다.
“이 분은 성리학의 창시자인 주자(朱子)이시고, 이 분은 『천주실의』를 저술한 마테오 리치이십니다.”
정약용은 끓어오르는 감개를 억누를 수 없었다. 그는 그들 두 사람의 손을 붙잡으면서 “두 성인을 이렇게 뵙게 되다니…” 하고 말하려 하는데 혀와 입술이 움직이지 않았다. 사력을 다해 말을 뱉으려 하는데 “아버님!”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눈을 떠보니 학연과 학유가 근심스러운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두 가지 약을 섞어 마신 정약용> 중에서

소설은 다산이 가족이 모두 모인 결혼 60주년 회혼일에 숨을 거두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후 다산의 삶의 궤적을 쫓으면서 강직한 선비의 모습과 철학자, 그리고 인간적인 모습을 속도감 있게 보여준다. 선생은 또 더불어 오랜 유배를 통해 절대고독을 체험하고 이를 이겨 내려한 인간의 분투를 섬세하게 그려 나간다.

"절박해졌을 때 진실한 삶이 찾아온다. 다산에겐 18년간의 유배 생활의 고독은 절대 고독이었을 것이다. 소설 '다산'은 유배지에서 다산의 그 절대 고독과 그 고독을 어떻게 이겨냈을까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다산은 글을 쓰면서 고독을 이겨냈다. 나도 스스로를 절대 고독 속에 가둔 뒤 그 감정을 글로 승화시키고 싶다."

한 선생의 말이다.

'다산 1,2'를 완성하면서 다산이 되었던 한승원 선생은 이제 다산의 그 '절대고독'을 자처하며 여생을 글쓰기에 천착하려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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