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당산단은 지난 2008년 1월 전라남도와 장흥군, 전남개발공사간에 사업 추진에 대한 협약이 체결된 후, 동년 12월 산업단지 지정, 다음해인 2009년 12월 1일 기공식이 이루어진 후 순조롭게 조성공사가 진척되고 있다.

8만평의 부지에 사업비 2,200억원을 투입해 내년 말까지 공장 터를 닦고 골프장을 유치하게 되면, 20% 가까운 녹지를 갖춘 친환경산업단지가 조성되면서 전자 제조, 식품, 화학, 광학기기업체들이 입주하고 연 12만명의 고용유발과 1조7천억원의 생산유발효과로 인한 지역경제 활성화를 선도하게 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양지가 있으면 음지도 있게 되는 것이 세상의 이치. 이처럼 산단이 조성되면서 그리운 고향마을과 정든 산하를 잃게 되며 고향땅을 떠나야 하는 산단 부지의 마을과 마을 사람들의 애환도 있게 마련이다. 이에 본지는 몇 회에 걸쳐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해당산단 마을과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집중 게재하기로 한다. <편집자 주>



1.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해당산단 마을들/해동마을

▼해당리 1구 해동마을

해당 1구 해동마을은 원도리 삼거리에서 공설공원묘지 가는 길 오른쪽 평야지에 위치한 마을로 마을 주변이 농경지로 둘러 싸여있는 논 농업 위주의 마을이다.

‘해당쟁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이 마을에는 조선조 초엽에 마을의 수호신을 모셨던 이른바 당정(堂亭)의 동쪽에 위치한다고 하여 ‘동당(東堂)’, ’해동(海東)‘이라고 불리어오다가 행정구역 개편으로 해당1구가 되었다.

마을 앞에 고인돌 2기가 있어 선사시대부터 촌락이 형성된 것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마을의 형성 유래는 1860년 경 김해김 씨(金海金氏) 제욱이 이곳에 정착하고 이후 여러 성씨이 입주하면서 성촌이 되었다고 한다.

1980년대 초반에는 김해김씨 19세대, 밀양박씨 8세대, 광산김씨 5세대, 기타성씨 28세대 등 총 60세대, 인구수 300여 명에 이른 중촌이었으나 최근에는 김해김씨, 광산김씨, 밀양박씨 등 40여 세대 100여 명의 소촌이 되었다.

현재 3세대가 먼저 마을을 떠났는데, 마을 주민 중 독거노인이 6세대나 되고 이들은 모두 광주나 서울 등지의 자식들한테로 지주해가고 나머지는 거의 모두 장흥읍네로 이주해 새로운 둥지를 틀게 된다고 한다.

해동마을 김종운 이장(63)은 “전형적인 농사만 짓는 농촌마을인데 무슨 큰 사건 같은 것이 있었겠느냐”고 말하고 “우리 마을의 큰 사업, 사건이라면 마을공동 수로사업이었다”고 말했다.
본래 이 마을에는 지금 마을 회관 앞에 공동 두레박 샘이 있어, 마을 공동 우물로 사용했다고 한다. 1960년 대는 이 샘이 ‘바가지 샘’으로 바뀌어 사용되다가 1970년에 각 가정마다 펌프우물을 파 사용하면서 바가지 샘은 메워져 버리고 말았다. 이후 1980년 초에는 집집마 다 펌프우물을 사용하는 데다 마을 뒤뜰에서 너나없이 물길을 파 용수로 사용하면서 물길이 말라가면서 마을 우물들도 색이 변하여 식수로 사용할 수 없게 되면서 마을 식수 확보가 무엇보다 시급한 현안이 되고 말았다.

이리하여, 당시 김현덕 씨(80)가 이장으로 있었을 때였는데, 김종운 씨의 제안으로 제암산 기슭의 간제골에서 마을까지의 수로를 개발하자는 방안이 나와 이를 본격 추진하게 되었다. 그런데 식수 개발에 대한 정보가 새 나갔는지 당시 식수문제로 곤란을 겪고 있던 월평마을도 함께 식수개발을 추진하게 되었는데, 당시 해동마을에서는 70여호 중에 3개파트로 나뉘어 각 파트마다 15일씩 45일을 울력을 나가 제암산 기슭의 간제골에서 식수를 끌어올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마을 사람들 누구도 불평 없이 울력에 동원되었습니다. 그만큼 우리 마을 사람들의 단결력도 좋았고, 서로 신뢰하고 이웃간에 정도 두텁고, 어른을 존경하는 등 미풍양속의 전통이 잘 살아있는 마을이었습니다.” 김종운 이장의 말이었다.

해동마을도 통째로 산단에 묻히게 된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집이며 마을이 없어져도 마을에 대한 기념할 만한 것은 남기고 싶어 한다. 즉 마을 사람들은 이 마을 사람들의 공통된 추억이 남아있는 수령 2백년 된 마을 사장나무가 어떤 형태로든 남아지는 것을 원했다.

“산단 부지가 조성되고 어떤 공장이 우리 마을에 들어설지 모르지만, 마을 사장나무를 살려 소공원을 만든다든지 해서, 마을 사장나무가 그대로 살아있다면, 훗날 우리 마을 마을 사람들이 산단에 묻혀버린 터를 찾게 되면 사장나무를 보며 향수를 되살릴 수 있지 않겠느냐”면서 “이런 심정은 마을 사람들의 공통된 심정”이라고 말했다.


2.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해당산단 마을들/당정마을

▼해당리 해당 2구 당정마을

해당 2구 당정마을 역시 평야지역에 위치한 마을로 마을주변이 모두 농경지로 둘러 싸여 있는 순수한 농촌마을이다.

조선 초엽부터 마을 수호신을 모신 당(堂)이 있었고 장흥부 벽사(碧沙) 찰방(察訪이 이곳에서 제사를 지내면서 당집 부근에 정자를 지어 당정(堂亭)이라 불렀으며, 이것이 유래가 되어 마을 이름도 당정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당정은 언제인가부터 없어져 버리고 말았다)

교통이 불편했던 당시, 장흥시장을 이용한 보성 웅치면민의 통로에 마을이 형성되었고 상당수의 주민이 살았다 하나 그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다. 다만 웅치면민들도 장흥을 오가는 길목이어서 또 마을 앞에는 주막거리가 형성되기도 했으며, 이 주막거리를 ‘숫거리’ ‘술거리’라고도 불려왔다고 한다.

그리고 이후 행정구역 개편에 의해 해당2구가 되었다.
마을 형성의 유래는 당초 김해김씨 홍술(洪述)이 입주하면서부터 농경지를 따라 여러 성씨들이 이주해 오면서 성촌이 되었다고 한다.
1980년대 초반에는 김해김씨 15세대. 전주이씨 4세대, 밀양박씨 4세대, 기타 성씨 25세대 등 48세대 인구 170여 명이 거주했으나 최근에는 세대수가 줄어들어 41세대에 84명이 거주하고 있다.

마을 사람들에 의하면, 예부터 부농이 많았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4,50년대만 해도 천석(天石)꾼으로 불린 김치빈씨가 살았다고 한다. 당시 광주댁으로 불리던 김씨 며느리가 예전에 장흥읍장을 지낸 방봉섭 씨 장모였다고 하는데, 그 김 씨 집안은 60년대에 광주로 이사 갔다고 한다.

부농이 많았던 탓인지 비교적 인물도 인근에서는 많이 났다고 한다.
공군소장으로 예편한 정판종 씨, 초등학교 교장을 역임하고 지금은 완도군 교육장인 김재진씨, 영암군경찰서장을 역임한 김태봉 씨(작고), 장흥군농지개량조합장을 역임한 김태영 씨(작고), 장흥초등학교 교장을 역임한 김선홍(57) 씨 등이 이 마을 출신들이기도 하다.

마을 이장 이종모 씨에 의하면, 당정마을 사람들이 단결은 근동에서도 알아주는 마을로, 읍내 무슨 운동경기 때나 장흥동초등학교에서 마을대항 무슨 운동경기가 있으면 예외없이 우승을 차지하곤 했다면서 마을 창고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수 많은 상패들을 보여주기도 했다.
당정마을도 통째로 산단에 묻힌다.

이 마을 사람들도, 마을은 없어져도, 수령 1백여 년이 된 마을 사장나무(느티나무)가 그대로 보호수로 지정되어 남아있길 바라고 있었다.

이종모 이장은 “어느 기업체가 입주하든 공장 내 녹지공간이 조성된다면 한쪽에 마을 표지석과 함께 마을 사장나무를 그대로 함께 남아있게 한다면, 마을 사람들이 수시로 찾아와 향수를 달래게 될 것이 아니냐”면서 “군 당국이나 입주기업에서 무슨 일이 있어도 이러한 우리 마을 사람들의 소원을 필히 들어주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글=김선욱,사진=마동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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