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조 후기의 영ㆍ정조 때의 학자였던 존재 위백규- 당대는 미미한 이름이었다. 그런데 후대에 이르러 많은 분들이 그분이 남긴 유작 등을 통해, 호남 실학의 3대 인물로 거명하며 그분을 재조명하더니, 급기야 이젠 ‘조선의 별’이 되고 있다.

그는 사람과 땅과 가문이 궁벽한 삼벽(三僻)의 땅 장흥 출신의 인물이었다. 그는 당대 벽지의 호남, 호남에서도 중앙 정계와는 가장 원거리였던, 변변한 인물 하나 배출하지 못한 궁벽의 ‘정남진 장흥’ 출신의 인물이었다. 또한 후대의 ‘호남 실학의 3대 인물’ 운운과 달리, 당대는 거의 한 평생을 ‘무명의 선비’로 보냈던 분이었다.

철저한 관료중심의 사회였던 당시 그의 직위는, 고작 진사시험에만 합격했고, 노령의 나이던 69세 때 정조의 유일 천거책으로 정조의 부름으로 현감을 제수받은 것이 전부였다. 물론 그는 벽지 장흥에 은거하고 홀로 학문에 정진하며 90여권이라는 방대한 학문적 성과를 올리기도 했지만, 당대 사회에선 여전히 ‘무명의 선비’였을 뿐이다.
그런 그가 후대에 와서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지난 7월 25일, 전주대학교 한국고전학연구소와 (사)한국고전문화연구원는 고전 번역사업으로 첫 결실을 본 <국역 존재집>을 발간, 그 출판 기념식을 가졌다. 이 날은 존재 선생이 조선조 이름 없는 선비에서 조선조의 별이 되는 날이었다.

<국역 존재집>은 2010년부터 교육부 지원을 한국고전번역원이 전주대와 한국고전문화연구원과 함께 30년간 추진하는 '고전번역 협동사업'의 첫 번째로 존재선생을 선정, 그의 문집을 발간했기 때문이다. 또 그의 문집 국역 발간사업이 장흥군이나 그의 문중인 장흥위씨들에 의해 추진된 것도 아니고, 엄연히 정부 지원으로 이 시대 전국의 학자들과 학문기관에 의해 추진되었기 때문이다.

이날 변주승 한국고전학연구소장은 “존재 선생은 조선 후기 신경준, 황윤석 선생과 함께 호남의 대표적인 학자로 '존재집'을 비롯한 세계 지리지인 '환영지', 역사서인 '속집대명기' 등의 방대한 저술을 남겨 호남 3대 천재로 불리는 분”이라고 말하고 “이번 출판을 통해 조선 후기 호남지역의 대표적 학자였던 위백규 선생에 대한 인물 연구는 물론 당시 시대상과 학술 경향 등 다양한 연구가 체계적으로 이뤄질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잠깐 그분의 생애를 간단히 정리해 보자.
아동기부터 천재라는 말을 들으며 총명하기 이를 데 없었던 그는, 어려서부터 학문에 열중하여 10대에 이미 박학한 경지에 이르렀다. 천관산에 지금도 현존하고 있는 장흥위씨 문중 재실인 장천재(長川齋)에서 ‘스승도 없이 홀로’ 글 공부에 정진했던 그였다. 그나마 다행이, 당대에서는 늦깎이로 25세경 당대 노론 산림의 한 사람이었던 병계(屛溪) 윤봉구(尹鳳九, 1683-1767)의 문하에 나아가 수학하며 당시 유일한 입신의 길이었던 과거에 매달리었다. 그러나 글 공부 15년에 이르도록 진사에 합격했을 뿐 더 이상의 진전은 없었다. 당대의 ‘과거제도’가 이름 없던 선비 그를 철저히 외면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39세 때, 경제적 궁핍, 고향에 남은 부모와 아내 자녀들 가족에 대한 의무감, 오랜 과거 시험에 지쳐 과거공부를 단념하고 고향 방촌의 마을로 귀향하기에 이른다.
당시 천재인 그가 부딪쳤던 그 현실의 벽에 대한 좌절과 절망감은 과연 어땠을까?

고향으로 내려 온 그는 이후 10여 년 동안을 농사를 지으며 사강회(社講會) 활동을 펼치면서 능체잔미(凌替殘微)에 처한 문중사회를 일신하고자 노력하고 ‘홀로 학문’에 정진한다.
이후 50대를 넘어서면서 자식들에게 영농의 책임을 넘기고 강학저술에 몰두하게 되었는데, <봉사>, <정현신보>, <만언봉사>등 당대 농촌사회의 총체적인 모순을 깊이 드러내고 있는 시폐론들이나 <연년행年年行> 연작을 위시한 현실비판적인 한시, 후대 세계적인 지리지로 평가받은 ‘환영지’ 등의 저술이 이때 정리되고 산출되어 나온다.

죽음이 가까워 온 나이던 그의 만년 69세 때, 정조의 유일 천거책으로 조정의 부름을 받고 <만언봉사>를 올리면서, 옥과 현감을 제수 받아 그의 이상 정치를 펼쳐보려 한다.
그러나 하늘은 이 천재를 시기했음인가. 그는 끝내 기성 관료들과 마찰을 일으키는 한편 중풍을 얻어 결국 뜻을 펴 보지도 못한 채, 고향으로 돌아와 와병 1년여 만에 숨을 거둔다.

이제 조선조의 별이 된 존재 위백규선생. 자신이 남긴 존재집을 기본으로 해 <국역 존재집>이 출간된 7월 25일, 그분은 무엇을 했을까. 참으로 오랜만에, 자신이 학문하며 강론하고 십수년 째 절대고독과 싸웠던 천관산 장천재 마루에 기대어 앉아, 참으로 오랫만에, 매우 흡족해 하는 표정으로 술잔을 기울였을 것이다.

그의 후인인 나, 이제라도 그분의 묘소를 찾아 참배하며, 소주 한 잔을 올리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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