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진강은 이 지역 역사, 문화와 함께해 온 젖줄이었고 이 지역의 독특한 향토 인문학을 태동시키며 장흥을 ‘문림(文林) 고을’로 만들어내고, 삶의 애환까지도 함께 온 유서 깊은 ‘장흥 역사?문화의 산실’이었다.

특히 유교가 국교가 된 조선조에 이르러, 장흥부(長興府)를 중심으로 전라도 유림 ? 사림儒林,士林)의 중심무대가 되며 문림(文林)을 활짝 꽃피우니, 장흥가사문학이 융성하며 이른바 백광홍 위백규 등으로 이루어진 ‘장흥가단(長興歌團)이 형성되면서 한국 가사문학사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할 정도였다.

‘장흥 문예의 발흥’으로 일컬어지는 장흥 시가문학의 산실은 바로 탐진강이었다. 탐진강변에 세워진 동백정, 사인정, 부춘정, 용호정 등 10여 개 정자들과 강성서원, 예양서원, 연곡서원 등 수 개의 서원들이 곧 장흥 문림의 무대였다. 탐진강이 바로 가사문학의 발원지요, 본류로서 ‘장흥 문예 발흥’의 산실이었던 것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조선조에는 장흥의 동백정 등 정자들을 중심으로 작시(作詩) 모임들이 성행하며, 문림의 맥을 이어왔다. 이 모임을 시계(詩契) 또는 시회(詩會)라고 부른다.

그 대표적인 모임들이 바로 난정회(蘭亭會), 풍영계(風詠契), 상영계(觴詠契), 정사계 등 이었다. 이 모임에서는 매년 계원들이 정기적으로 모여 시를 지으며 교유하였다. 지금도 현존하는 것은 풍영계와 정사계로서 이제는 시는 짓지 않고 음식을 나눠 먹으며 친목만을 다진다.

이러한 시회를 통해 지은 시들은 남아 있는 몇 개의 시축에 실려 있거나 ‘동백정기운집(冬柏亭記韻集)’, ‘만천시고(晩川詩稿)’, ‘호은세고(湖隱世稿)’, ‘독우재집유고(篤友齋集遺稿)’, ‘소천유고(小川遺稿)’ 등의 문집 속에 들어 있다.

이들 시회들은 누정마다 각 성씨를 대표하는 정주(亭主)가 있어서 매년 돌아가며 일정한 날을 정해 유사를 맡으며 계를 치렀다. 이 지역은 탐진강을 끼고 늘어선 정자를 중심으로 시가문학의 한 띠를 형성했다고도 볼 수 있다. 당대 장흥의 문인들은 이런저런 시회를 조직하여 시흥을 달래고 또한 시문을 배우며 시대의 아픔을 시문으로 달래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장흥의 가사문학이 장흥의 문림 전통의 주류를 이루어 왔다고 할 수 있지만, 장흥의 누정 등에서 이루어진 이러한 시회들이야말로 최근세까지 장흥 문림의 맥을 이어온 실질적인 문림의 산실이며 맥이요 전통이라고 할 수 있다.

또 근세에 이르러서는 금계 이수하(金溪 李洙夏)나 금강 백영윤(金岡 白永允) 같은 이 지방의 선각자들이 후학 교육에 열정을 쏟고, 효당 김문옥(曉堂 金文鈺) 같은 당대의 문장을 초빙하여 후진을 양성하려고 한 것만 봐도 지역민들이 얼마나 학문추구의 열정이 강한가를 짐작케 한다.

이러한 독특한 문맥이 이어지고 특히 정자에서 학문을 연마하고 시를 지으며 문풍을 진작시켜왔기에 탐진강 유역 문화권인 장흥고을이 문향(文鄕)으로 자리매김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국난을 당해서는 분연히 나라를 구하고자 일어섰던 이 지역 선비들의 기개는 문무겸비의 실천적 지식인상을 보여준다

지난 계모임을 가진 정사계는 1987년까지 시축지대로 벼 5되 정도를 지출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당시까지는 시회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989년부터는 이 계가 1박 2일에서 계일 당일에 산회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이때부터는 시회를 가지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雨林草路客 遲(장마 끝 우거진 풀길은 찾는 이 기다리니)/松末根音子篤知(소나무에 이는 바람소리 그대의 독실함을 알아주네)/柏亭契事誰誰會(동백정 정사계에 누구누구가 모였는가)
傾夜詩情斗柄移(밤이 기울도록 넘치는 시정에 북두칠성이 옮겨 가네)-金鍾根

위 시는 현존하는 정사계 시축의 김종근 시이다(김종근 소장). 위 시에서 보듯 정사계는 장마가 끝난 여름날(대서일)에 동백정에서 정사계를 열어 밤이 늦도록 취흥에 겨워 시를 읊는 장면이 잘 나타나 있다. 특히 김종근의 경우 당시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로 마을의 어른들 사이에 끼어 이 시회에 참여했으며 참가자들이 지은 시를 시축에 일부 옮기는 일도 했다고 한다.

시회활동이 이루어졌던 탐진강의 정자문화- 이제는 그 시회마저 간신히 계 모임으로 연명해오듯, 우리 장흥인 사이에서도 잊혀져가고 있다.

오늘 장흥 문학의 산실이요, 중요한 맥이었던 장문화가 제대로 복원되고, 계승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현존하는 정자 주변의 정비와 정자체험의 관광코스 개발, 정자 중심의 각 시회 시축의 번역 조명사업, 시회활동 복원과 시 백일장 개최등 다양한 방안이 검토, 모색되어 장흥의 정자권역이 일정부분, 장흥문학의 새로운 산실실로서 역할 수행을 할 수 있게 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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