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출신의 국회의원들-근현대사에서 대한민국 국회에 등용한 장흥인들은 누구누구였을까.
우선 제헌국회부터 살펴보자.

해방이후 미군정하에 있던 대한민국은 47년 9월17일 열린 제83차 유엔총회에서 미국 대표인 마샬 국무장관의 제의로 정부수립의 길이 열렸다. 마샬의 제안은 ‘유엔 감시하에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하는 동시에 그 국회가 정부를 수립케 하기 위해 유엔 임시한국위원단을 한국에 파견한다’는 내용이었지만 북한 주둔의 소련군의 반대에 부딪혀 결국 남한만의 단독선거가 48년 5월10일 치러졌고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제헌국회였다.(총 198명 선출, 전남은 29개 선거구, 총선거인수 110만6천397명, 투표율 104만4천171명으로 94.4%)
당시 정당은 한국민주당(한민당)을 비롯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대동청년단 조선민족청년단 대한독립촉성농민총연맹 단민당 대성회 등이 있었다.

이 선거에서 2명이 출마했다. 장흥군 초대 군수를 역임하고 있던 한민당 소속의 고영완 씨와 무소속으로 초대 장흥읍장을 역임하고 있던 김중기 씨가 그 주역이었다. 선거 결과 김중기가 2만2천979표를 득표해 무계 고영완을 1만여표 차이로 누르고 당선되었다.

김중기(金仲基, 1901년생) 씨는 누구인가.
1945년 8·15광복 후 여운형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최초의 건국준비단체가 바로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였다. 그리고 건준의 지방조직인 장흥읍을 맡았던 이가 김중기였다.
장흥출신으로 대한민국 제1대 국회의원이었던 그의 이력을 보면, 광주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장흥읍장(초대)을 역임했으며, 1950년 5월 30일에 치러진 제2대 국회의원선거에서 재선을 노리고 출마했으나 낙선 했으며, 그 이후 한국동란 때 월북하였고, 1956년 7월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중앙위원을 지냈지만 1957년 3월경 순안농장에 배치되고 1959년 초 숙청사업시 함북 무산방면으로 추방된 것으로 알려져, 1959년이 그의 사망 연도로 표시되고 있다.

제2대 대한민국 국회의원선거는 1950년 5월 30일 치러졌다. 1950년 1월 이전 당시 정계는 내각책임제 개헌안과 차기 의원선거를 둘러싸고 파쟁이 격화되었다가 미국정부가 선거를 치르지 않으면 대한군사경제원조는 재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는 강요성에 의해 치러진 선거였으며, 제헌 국회의원선거(제1대 국회원의 선거)와 달리 공산주의 세력을 제외한 모든 정당·사회단체 및 정치인들이 참여, 의원정수 210명에 입후보자 2,209명(무소속 등 39개 정당·사회단체 참가)으로 10.5:1이라는 역대 선거 중 가장 높은 경쟁률을 보인 선거였다. 특히 당시 무소속이 입후보자 총수의 68.5%에 해당하는 1,513명으로서 무소속 후보자만 하더라도 의원정수의 7.2배라는 경이적인 난립현상을 보였다.

제1대 국회의원(제헌의원) 선거에서 낙마한 고영완은 이때 민주국민당 후보로 출마해 설욕을 노렸다. 이 선거에는 제헌의원 김중기를 비롯 12명이나 나서는 후보 최다 진기록을 보였다.(선거 도중 김대배와 안규일 등 2명이 사퇴해 10명이 겨뤘다)

이 선거에서 고영완은 1만5천40표를 얻어 7천923표의 2위 이세옥을 크게 누르고 당선되었다. 제헌의원 김중기는 3천여표를 얻어 4위에 그쳤다.
국회 등원 직후 6·25가 터지자 고영완은 부산의 피난국회에서 이승만 독재에 맞선다. 특히 발췌개헌안과 국민방위군 사건에 연루돼 갖은 고초를 겪기도 했다. 국민방위군 사건은 1·4후퇴 후 길거리에서 죽어가는 군인들의 실상을 폭로함으로써 진상을 파헤치는 계기가 되었다고 알려졌다.

그러나 고영완은 자유당의 부정선거가 극에 달했던 제3대와 제4대 선거에 잇따라 출마하지만 자유당의 손석두에게 연패하는 불운을 겪었다. 이같은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와 폭정은 4·19혁명으로 막을 내렸다. 이후 치러진 제5대 선거에서 고영완은 민주당으로 옷을 갈아입고 출마, 김형배 이양래와 함께 3파전을 벌인 끝에 전국적으로 확산된 민주당의 세를 업고 압도적인 표차로 재선에 성공했다. 고영완의 재선 국회의원 활동기간은 평탄치 않은 시간들이었다.

초선 때인 제2대에는 6·25가 발발했으며 재선 때에는 5·16군사쿠데타로 인해 채 임기도 채우지 못한 채 옷을 벗어야 했다.

특히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군사정권의 정치규제법에 발이 묶여 일정기간 정치활동을 금지당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결국 고영완은 “이제 정계를 은퇴하겠다. 국방의 임무를 수행해야 할 군인들에 의해서 헌정이 유린되었으니 이제 무슨 면목으로 국민 앞에 나설 것인가”라는 말을 남기고 친구들의 만류를 뿌리친 채 고향인 장흥으로 낙향했다.

고영완이 정치를 재개한 것은 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이다. 야당 당수 유진산의 권유로 출마하지만 군사정권의 혁명주체세력으로 6대, 7대 국회의원을 지낸 길전식에 밀려 기어이 국회 재등원의 꿈이 좌절되고 만다. 결국 고영완은 제헌에서 제8대에 이르도록 6회에 걸쳐 국회 등원문을 두드리지만 두 번 당선된 셈이다. 고영완은 “정치란 남을 위해서 하는 일이다. 남을 위할 마음이 없이는 정치할 생각을 말아야 한다”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던 진정한 정치인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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