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출신의 대표적 인물은 누구일까.
과거의 역사에서 장흥을 대표할 만한, 장흥의 표징이 될 만한 인물은 누구일까?
고려조의 공예태후, 문집 ‘원감국사집’을 남기고 동문선에도 시와 글이 수록된 충지 원감국사, 조선조 중기 의병장 풍암 문위세, 조선 중기 문신으로 기행가사 효시인 기봉 백광홍, 장흥 동학의 선구자 이방언, 독립투사 김재계 등 수많은 명인, 위인들이 출현했지만, 이들 중 단 한 인물을 장흥의 대표 위인으로 꼽는다면 단연코 존재 위백규라는데 그 누구도 주저치 않을 것이다.

존재 선생. 장흥인의 평가가 아닌 객관적으로, 존재 선생이 남긴 업적은 이미 다산 정약용의 업적과 비견되고 있으며, 2015년 한국실학학회가 일본과 중국 측 실학학회와 함께 내놓은 ‘동아시아 실학 사상가 99명’에 존재선생이 포함되기도 하였다.

한국고전학연구소 변주승 박사는 “존재 선생은 조선 후기 신경준, 황윤석 선생과 함께 호남의 대표적인 학자로 '존재집'을 비롯한 세계 지리지인 '환영지', 역사서인 '속집대명기' 등의 방대한 저술을 남겨 호남 3대 천재로 불리는 분”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

만시지탄이지만, 존재 선생을 기리기 위한 ‘존재기념사업회’가 창립된 일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 아닌가 여겨진다. 법인체로서가 아니어서 조금은 아쉽지만, 그럼에도 단체로서 이 모임의 결성은 이제부터라도 존재선생을 제대로 기려보자는 의지로 보여 참으로 다행스럽다 아니할 수 없다.
존재선생은 이미 역사속의 인물이지만 이제 우리는 존재 선생을 우리의 ‘찬란한 별’로서, 선생의 생애와 학문 등 모든 것을 오늘에 되살리고, 그 위인의 업적을 기리고, 우리 모두의 생의 지표로 삼을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아동기부터 천재라는 말을 들으며 총명하기 이를 데 없었던 존재선생은, 어려서부터 학문에 열중하여 10대에 이미 박학한 경지에 이르렀다. 천관산에 지금도 현존하고 있는 장흥위씨 문중 재실인 장천재(長川齋)에서 ‘스승도 없이 홀로’ 글 공부에 정진했던 선생이었다.

그나마 다행이, 당대에서는 늦깎이로 25세경 당대 노론 산림의 한 사람이었던 병계(屛溪) 윤봉구(尹鳳九, 1683-1767)의 문하에 나아가 수학하며 당시 유일한 입신의 길이었던 과거에 매달리었다. 그러나 글 공부 15년에 이르도록 진사에 합격했을 뿐 더 이상의 진전은 없었다. 당대의 ‘과거제도’가 이름 없던 선비였던 그를 철저히 외면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39세 때, 경제적 궁핍, 고향에 남은 부모와 아내 자녀들 가족에 대한 의무감, 오랜 과거 시험에 지쳐 과거공부를 단념하고 고향 방촌의 마을로 귀향하기에 이른다.
당시 천재인 그가 부딪쳤던 그 현실의 벽에 대한 좌절과 절망감은 과연 어땠을까?

고향으로 내려 온 그는 이후 10여 년 동안을 농사를 지으며 사강회(社講會) 활동을 펼치면서 능체잔미(凌替殘微)에 처한 문중사회를 일신하고자 노력하고 ‘홀로 학문’에 정진한다.
이후 50대를 넘어서면서 자식들에게 영농의 책임을 넘기고 강학저술에 몰두하게 되었는데, ‘봉사’,‘정현신보’, ‘만언봉사’ 등 당대 농촌사회의 총체적인 모순을 깊이 드러내고 있는 시폐론들이나 ‘연년행年年行’ 연작을 위시한 현실비판적인 한시, 후대 세계적인 지리지로 평가받은 ‘환영지’ 등의 저술이 이때 정리되고 산출되어 나온다.

죽음이 가까워 온 나이던 존재선생은 만년 69세 때, 정조의 유일 천거책으로 조정의 부름을 받고 ‘만언봉사’를 올리면서, 옥과현감을 제수 받아 그의 이상 정치를 펼쳐보려 한다.
그러나 하늘은 이 천재를 시기했음인가. 그는 끝내 기성 관료들과 마찰을 일으키는 한편 중풍을 얻어 결국 뜻을 펴 보지도 못한 채, 고향으로 돌아와 와병 1년여 만에 숨을 거둔다.

선생의 이름은 당대 미미한 이름이었으며 무명의 선비였다.
선생은 특히 사람과 땅과 가문이 궁벽한 삼벽(三僻)의 오지 장흥, 중앙 정계와는 가장 원거리였던 벽지의 장흥, 변변한 인물 하나 배출하지 못했던 궁벽의 장흥 출신의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자신의 그 ‘불행’을 학문 정진으로 극복해 내며 자기 生의 철학과 의미의 흔적을 남긴 90여권의 유작 등 위업으로 훗날 호남 실학의 3대 인물로 공인받기에 이른 것이다.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는 경북 안동시의 슬로건이다. 조선조 성리학의 대가 퇴계 이황으로 인해 성리학의 중심지가 되었던 역사가 있어 이러한 슬로건을 내세웠을 것이다.
장흥도 존재 선생으로 장흥의 실학 등 독특한 사상적인 맥을 부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그동안 가사문학 등 문학부문만 강조되어왔던 장흥의 역사에서 일대 전환점이 될 수 있다. 장흥 고유의 문학-사상 부문에서 고유한 장흥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존재선생의 헌양사업에서 장흥군의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지원과 전체 장흥군민이 관심이 있어야 하는 이유이다.

존재 기념사업회는 지역민과 학계 등에서 270여명이 창립회원으로 참여했다. 그리고 기실 이들 회원 중 장흥 위씨가 많지만, 이제부터는 타 성씨는 물론 장흥인이라면 그 누구든 가리지 않고 회원으로 참여해야할 것이다. 존재 선생은 장흥인의 대표 위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존재선생은 장흥인의 자랑스러운 자긍이 되고 자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작권자 © 장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