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5일(정유일기Ⅰ)
비가 계속 오다가 늦게 맑게 개었다. 식후 열선루에 나가 앉아 있으니 선전관 박천봉(박천봉)이 유지(유지)를 가지고 왔다. 그것은 8월7일 성첩한 공문이었다. 영상(유성룡)은 경기 지방으로 순행 중이라 하니, 곧바로 잘 받았다는 장계를 썼다. 보성의 군기를 검열하여 네 마리 말에 나누어 실었다. 심화가 매우 편치 않았다.

8월 15일(정유일기Ⅱ)
비가 계속 내리다가 늦게 갰다. 선전관 박천봉이 유지를 가지고 왔는데 8월 7일에 성첩한 것이었다. 곧 바로 잘 받었다는 장계를 작성 하였다. 술을 과음해서 잠들지 못했다.
이날 받은 유지는 수군폐지에 관한 것이고 올린 장계가 노기욱외 사람들은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사옵니다”라는 장계라고 한다. 난중일기에는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사옵니다” 내용이 없고 이충무공 전서 행록에 기록된 내용이며 이 부분도 소설가나 극작가가 감동을 최고로 끌어 올려 극대시킨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사 옵니다.”라는 문구가 우리에게 각인되어 있다.
종자(從子:아들) 정랑(正郞) 분(芬)이 기록한 행장에는 9월7일자에 “때에 조정에서는 해군이 무척 약하여 적을 막아 내지 못할 것이라 하여 공에게 육지에서 싸우라는 명령을 내리므로 공은 장계를 올리었다. 『저 임진년(壬辰年)으로부터 五, 六년동안에 적이 감히 충청(忠淸), 전라(全羅)를 바로 찌르지 못한 것은 우리 수군이 그 길목을 누르고 있었던 때문입니다. 이제 신에게 전선이 12척이 있사 온바 죽을힘을 내어 항거해 싸우면 오히려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제 만일 해군을 전폐한다는 것은 적이 만 번 다행으로 여기는 일일뿐더러 충청도를 거쳐 한강(漢江)까지 갈 것이라 그것이 신의 걱정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또 전선은 비록 적지만은 신이 죽지 않는 한 적이 우리를 업수이 여기지는 못 할 것입니다.』”라는 내용이며 9월 7일에는 열선루가. 아니라 벽파정에 있었다.

< 의문 1>
8월15일 연선루에서 받은 7일 성첩한 유지가 수군 폐지 명령이었다면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 할 수 있는 보고서는 회령진에 가서 확인하고 보고 드리겠습니다. 가 맞다. 설혹 7월22일 배설을 만나서 상황을 알고 있었더라도 20여일이 지난 8월 13일에야 보성에서 들은 소식은 배설과 장수들 그리고 사람들이 피해 있다는 소식을 접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피해서 모인 규모를 짐작하고 있었더라도 보고서는 확실한 사실을 확인한 뒤에라야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사옵니다”.의 장계를 올릴 수 있다.

〈 의문 2〉
장계를 올린 8월 15일은 이순신 장군 수군의 규모가 확인되지 않았다. 패전한 수군의 배와 살아남아서 피해 온 군사가 몇 명이나 되고 배는 얼마인지 자세하지가 않다. 난중일기에는 배나 사람의 규모에 대해 기록한바 없고 이충무공공전서 행록에 “회령진에 도착하여 김억추에게 조사 시켰더니 10척의 전선을 몇 척은 덮개를 만들게 하였다”라는 기록이보이나 18일에 도착해서 19일에 삼도수군통제사 직첩에 숙배케 하여 취임식을 겸하고 다음날 19일 회령진이 좁아서 이진으로 옮겨갔다. 고 기록하고 있다. 사실에 맞추어 생각한다면 이 이후에 모든 내용을 보고하는 장계라야 옳다. 그리고 보고를 받은 연후에 수군의 규모가 파악되면 육지에서 싸우라는 유지를 내려야 한다.

〈 의문 3〉
왜 이충무공전서 행록에는 9월7일과 명랑해전(9월 16일) 사이로 보이는 공간에 이 사실을 기록 하였을까? 여러 가지 사건들을 종합하고 분석하여 보면 8월 3일 삼도수군통제사 직첩을 받고 7일 수군폐지론을 성첩한 유지를 15일 받아 모든 상황의 확인 없이 바로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사옵니다”라는 장계를 올릴 수 있었을까는 상식적으로「아닙니다」로 바로 결론이 난다. 우리는 어떤 사건이나 현장의 상황을 확인 없이 짐작으로 보고를 올리면 그것을 직무유기라고 한다. 또 나라가 풍전등화 같이 급박한 상황에서는 일처리를 먼저하고 사후 보고는 있을 수 있으나 이 내용은 사후 보고한 내용도 아니기 때문이다.

〈 의문 4 〉
위의 사실을 알려주는 유지나 장계는 없을까? 지금 까지 나온 자료나 참고 자료에 과문한 탓인지 유지나 장계의 원문을 보지 못했다. 그리고 노기욱은 이러한 것을 모르고 8월15일 열선루 유지(선조의 수군폐지 명령)와 장계 건(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사 옵니다)을 주장하고 있을까? 아닐 것으로 보인다.
위의 기술한 내용등과 같이 이순신장군 수군재건로 연구논총에 군학이 군영구미라고 정묘지(장흥읍지:1747년)에 했다고 한 것이나 군영구미에서 향선을 이용하여 이동하고 참여한 의병을 기록한 면면은 사실과 다른 주장이고 전형적인 『곡학아세(曲學阿世)』다. 「곡학아세」는 한나라 6대 황제인 경제(BC257?141년)때 원고생의 고사인데 그는 성품이 강직한 뛰어난 학자였다. 경제에 의해 늙어 벼슬 하였다. 이때 같은 산동 사람으로 젊어 벼슬을 한 공손홍은 원고생이 강직하여 모든 일처리를 원칙에 의해 하는 것은 처세에 도움이 안 된다고 비난하였다. 어느 날 자기를 비난함을 안 원고생은 공손홍을 조용히 불러 “지금 학문의 정도(正道)가 어지러워져서 속설이 유행하고 있네. 이대로 내버려 두면 유서 깊은 학문의 전통은 결국 사설(私說)로 인해 그 본연의 모습을 잃고 말 것 일세. 자네는 다행히 젊은데다가 학문을 좋아 하는 선비라 들었네. 그러니 부디 올바른 학문을 열심히 닦아서 세상에 널리 전파해 주기 바라네. 결코 자신이 믿는 학설을 굽히어(曲學) 세상 속물들에게 아첨하는 일(阿世)이 있어서는 안 되네.” 하고 간곡히 말하였다. 공손홍은 크게 깨달아 원고생의 제자가 되었다.

<참고문헌> 1.이충무공 전서 영인본 및 이은상 역 2.난중일기 노승석 본 3.장흥읍지 정묘지(1747년) 4.초계변씨 족보 5.초계변씨 13충훈록 6.수원백씨 대동보 7.나주정씨 족보 8.장흥 마씨가장 9.사기 유림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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