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로지 집과 도서관만 다람쥐 채 바퀴 돌 듯
고시 준비에만 매달려 있으니 그 모습을 보는
애비의 마음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안타까움과
시험에 시달리는 아들에 대한 가엾은 마음이
심장을 멈추게 할 정도의 답답함과 괴로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처음 인터뷰 연락이 왔을 때 가족과 친지들이나 기뻐해야 할 일을 남들에게 까지 알리고 자랑한다는 것이 마음에 허락하지 않아 인터뷰를 거절했습니다.
장흥신문 사장과 친분이 있는 제 고등학교 친구가 있어요. 그 친구가 하는 말이 사법시험 합격한 아들을 자랑하자는 것이 아니라 고향의 기쁜일을 신문에 실어 함께 나누자는 것이라고 해서 오늘 이렇게 나왔습니다.” 쑥스러운 모습으로 나온 당사자의 아버지 김완씨는 말을 아끼었다.  
“저는 여기 고향을 일찍 떠나 광주에서 학교를 다니고 졸업 후 바로 공직생활을 사작했습니다. 다시 고향 대덕에 내려 온지도 벌써 20여년의 세월이 흘렀네요. 이 곳에 내려오기 전에는 고향에 대한 특별한 감정이나 그리움 같은 것을 느껴 본적이 없었습니다.
이 곳에 내려오게 된 동기나 결정을 하게 된 이유가 있었습니까?
묻는 질문에  아버지 김완씨는 한참 말을 잇지 못하고 있다가. 천천히 기억에 묻힌 먼 이야기를 불러들이는 듯 그의 언어는 깊고 조용했다. “ 제가 공직을 그만두고 광주에서 사업을 했습니다. 작은 건설회사를 설립했습니다. 그럭저럭 별로 어렵지 않게 회사가 운영되면서 제법 큰 프로젝트를 맡게 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경험부족과 건설시장 환경 적응에 익숙하지 못한 능력의 한계에서 누적된 부실한 경영 손실이 급기야는 1997년 IMF 금융위기를 맞으면서 회사의 정상적인 운영이 벽에 부딪쳤고 드디어 수십억의 부채를 안고 회사를 부도처리해야 하는 위기를 맞았습니다.”  그가 자신의 지난 날을 기억하는 모습에서 잠시 잊고 살았던 곤혹스러음의 그림자가 드러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말을 이었다.

드디어 수십억의 부채를 안고 회사를 부도처리해야 하는 위기를 맞았습니다.”
‘눈앞이 깜깜하고 살 길이 막막했습니다. 아이들 넷 모두 학교에 다니는 시기였고 학비와 생활비 조달의 방법이나 해결의 출구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당시 이곳 대덕에 부친께서 조상으러부터 받은 얼마의 농토와 밭에 농사와 농장을 경영하고 계셨는데 아내가 틈틈이 이곳에 내려와 아버지의 농사일을 도와 드려 왔습니다. 사업 실패로 고통과 좌절에 빠진 나에게 어느날 아내는 고향에 내려가서 살자는 제안을 했습니다. 거의 잊고 살았던 고향으로 삶의 터전을 옮겨 내려가는 것도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더 망서려지는 것은 농사일이라곤 해보지도 않은 내가 농촌에서 산다는 것이 엄두가 나지 않고 두려움 또한 컸습니다. 그러나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더 이상 광주에서 있을 수 있는 집도 없었지만, 수중에는 주위에서 딱한 저를 돕겠다고 심시일반으로 모아준 100만원이 전부였습니다.“  그의 모습에서 어떤 것을 회피하거나 귀찮은 기색은 발견할 수 없었다. 누구에게도 자신의 어려움을 호소하지 않는 그의 성품은 아들에게도 마저 부담주는 행동이나 말을 하지 않는 깔끔한 성격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느껴졌다.

잊고 살았던 고향으로 삶의 터전을 옮겨
”처음 신문사에서 제 자식의 고시합격에 대한 취재라 할까 인터뷰를 하자고 했을 때 한 젊은이가 고생 끝에 사법시험에 합격했다는 성공담 같은 기사를 쓰겠다고 하면 제가 무슨 수로 막을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제 아들이지만, 성인이 된 아들의 문제를 아버지가 이렇쿵 저렇쿵 참견을 한다는 것이 저에게는 맞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아들일로 저를 취재한다고 하니 제가 왜 응해야 하는지 이해를 할 수 없었습니다.  저에게 아들에 관한 궁금한 것을 물어 본들 제 아들이지만 그 아이의 개인적인 사생활에 대해서는 저도 잘 모릅니다. 솔직히 아들에 관해 아는 것이 없어 제가 할 이야기가 없을 뿐입니다.“     
그는 정말 거리끼는 일은 물론이고 가슴에 찌꺼기라고는 작은 먼지 하나 없는 맑고 밝은 사람으로 비추어 졌다. 그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다.

“이번에 사법고시에 합격한 제 아이가 막내인데 이번이 처음 응시가 아니었습니다. 몇 번 낙방을 했습니다. 두 번인가 세 번 째 낙방을 한 아들을 언젠가 만나기 위해 서울에 찾아가서 만난 적이 있습니다.
물론 아들은 고시응시를 포기 못하고 계속 준비를 하고  있었지요.  한창 젊은 나이에 놀러 다니지도 못하고 오로지 집과 도서관만 다람쥐 채 바퀴 돌 듯 고시 준비에만 매달려 있으니 그 모습을 보는 애비의 마음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는 안타까움과 시험에 시달리는 아들에 대한 가엾은 마음이 심장을 멈추게 할 정도의 답답함과 괴로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의 고통은 아들에게 어떤 도움도 안되는 제 혼자만의 슬픔과 아픔이었습니다. 앞에 앉아 있는 슬픔도 좌절도 이젠 습관이 되어 버린 아들의 창백한 모습을 더 이상 대 할 수 없었습니다. 판사고 검사고 당장 집어치우고 일반 직장에 취직해서 편하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아들을 대하는 마음을 편치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

아들에게 도움이 못되는 제 혼자만의 슬픔과 아픔
“그래서 아들에게 아버지의 마음을 전했습니까? 다 집어치우고 편하게 직장에 취직하라고 말씀 하셨나요?” 묻는 질문에 그는 입가에 가벼운 웃음 띄우면서  “ 못했지요 밥 먹을 때도 이야기 할 때도 시험준비 책을 손에서 떨치지 못하는 아들에게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냥 가슴에 깊이 묻어버렸지요 그래도 아들과 헤어져 고향에 돌아오는 버스안에서 아들에게 이야기 못한 것이 아쉽더군요” 그는 또 슬며시 웃음을 참는다. 다시 그에게 짖궂은 질문을 해 본다.
“ 그래 지금은 어떻습니까? 그 때 아들에게 고시공부를 그만두고 일반회사에 취직을 하라고 했으면 아들이 아버지의 말을 듣고 고시공부를 포기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 어느 아버지가 그렇게 공부에 몰입하고 있는 아들에게 공부를 포기하라고 하겠습니까? 지금도 아들이 고시에 합격한 것이 기쁘지 않다는 것은 아니구요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은 숨길 수 없는 솔직한 마음입니다. 이제는 고시 공부한다고 책에 묻혀 있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애비 마음에 위로가 되고 있습니다. 하기야 판사가 되든, 검사가 되든, 변호사가 되든 걱정이 싹 없겠으며 힘든일이 왜 없겠습니까 어디에 있던지 약하고 억울한 사람의 편에서 정의를 실천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가 아들에게 바라는 것은 큰 것도 아니고 어려운 것도 없었다. 아버지 김완씨는 원래가 자식들에게 부담스러운 부모가 되는 것을 유난히 싫어했다. 지금도 13,000평 가까운 농장을 혼자서 가꾸면서 힘들거나 고생스럽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고 한다. 오히려 자신이 건강해서 이렇게 일 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동네 사람들이 저를 보고 이제 팔자가 폈다고 해요 아들이 사법시험에 합격했으니까 이제 그 힘든 농장일 남에게 맡기고 편히 살라고 하더군요. 저는 그 말을 하는 사람에게 미안하지만 나를 욕하는 것으로 받아드려집니다. 참 딱한 일입니다. 아들이 고시에 합격한 것이 아버지와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아들은 이제 판사나 검사 아니면 변호사가 될 텐데 그 아들과 가까이 한다는 것은 죄를 졌거나, 위법의 가부 시건에 연류되어 있을 때가 아닐까요 저보고 죄인이나 범법자가 되라는 말과 같은 것이 아닙니까? 저는 오히려 이번에 고시에 합격하고 곧 연수원에 들어갈 아들이 걱정스럽습니다. 그 아이 앞에 얼마나 힘들고 판단하기 괴로운 사건들이 줄줄이 이어질 것을 생각하면 아들을 생각하는 아버지의 마음은 까맟게 타들어 갑니다.”

김완씨는 처음 이곳와서 심적 고생에 시달렸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사업에 실패하고 아내를 따라 이 곳 고향 대덕에 처음 왔을 때, 광주에 두고 온 아이들 4남매의 생활비걱정, 학비 걱정보다는 실패한 자신을 바라보는 눈들을 피해 다녀야 하는 고통스러움이 더 컸습니다. 오로지 그것을 어떻게든 모면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것 이외에는 모든 생각을 접었습니다. 정말 참담하기 짝이 없는 세월이었습니다. 저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제일 두려웠습니다. 저의 초라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죽음보다 더 큰 괴로움이었고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습니다. 친구도 멀리 했습니다. 그러나 아내는 농장에서 소출한 채소와 과일 등을 장날이면 장에 나가 팔았습니다. 나는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그 채소와 과일들을 언제 팔아서 아이들 생활비와 학비를 보내줄 수 있느냐고  따져 물었습니다.

저의 초라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죽음보다 더 큰 괴로움
너무나 아내가 가엾게 느껴진 제 마음을 전하려는 표현이 고작 짜증이었던 것입니다. 아내는 돈을 벌기보다는 그냥 소출할 농작물들을 밭에 방치해 두면 그대로 버려져서 시장에 나가 파는 것이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오히려 저의 힘든 마음을 위로 해주었습니다. 정말 그때처럼 제가 능력이 없는 인간이었음을 인정한 적이 없었습니다.
지금은 돌아가시고 안계시지만, 부친께서 제가 도시에서 번듯한 직장에 다닐 때부터 언젠가는 시골에 와서 살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을 버리시지 않으시고 지금 제가 경영하고 있는 농장을 개간하셨던 것입니다. 다행히 과실과 채소 등이 자연의 큰 피해 없이 소출이 잘 되어 농사를 질 줄 모르는 저도 질 좋은 작물을 시장에서 좋은 가격을 받을 수 있는 농작물을 재배하는 훌륭한 농부가 되었습니다.”

읍내 차집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대화를 나누던 우리는 농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말로 듣던 13,000평의 농장이 얼마나 큰지를 짐작 못하던 나는 김완씨 농장의 현장에 와서야 그 크기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알았다.  더 놀란 것은 이 넓은 농장의 수 많은 과일나무와 채소들을 김완씨 혼자 가꾼다는 말을 듣고 믿기지 않았다. 그가 정말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에 그의 모든 말들이 하루 한 순간을 소중하게 가꾸는 행복을 발전시키고 있다는 확신을 가질수 있었다. 그가 만들어 가는 많은 기쁨들이 온 농장을 뛰어놀고 있는 듯 마음에 깊은 위안과 평안을 호흡할 수 있었다.
김완씨는 장흥읍 장날에 농장에서 소출한 유자와 더덕 등 채소를 팔러 나간 아내를 데리고 와야겠다고 나와 함께 농장을 나와 트럭의 굵은 엔진 소리를 땅위에 깔면서 몇 시간의 행복을 만들어 준 진한 감동의 여운을 남기고 아스팔트위를 미끄러지듯 아내가 있는 시장으로 멀리 사라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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