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아들 승호와 함께

제 자식들이 효를 중시하고
올바르게 성장해서
자신들의 일에 열심히
생활하는 모습을 보면서
고맙고 감사한 마음을 금할길 없습니다
.

장흥군 용산면 부용산에서 흐르는 남상천의 물길이 감고 도는  소쿠리 형국의 형태로 이루어진 곳에 일곱 개 마을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칠리안속’이라고 불리어 지는 곳이 있다. 
이 ‘칠리안속’은 북서남쪽으로는 산 능선으로 경계하고, 동쪽으로는 바다에 접하고 있는 장흥의 동남부, 용산면에 위치하고 있다. 이 ‘칠리안속’에는 상금마을을 비롯해 금곡마을, 송전마을, 초당마을, 정장마을, 관지마을, 월정마을 등 7개 마을로 구성되고 있다.

산 능선의 경계와 바다가 가까운 마을이다
이중 상금마을은 수원백씨가 거의 한 집안으로 함께 모여 사는 자작일촌(自作一村)의 마을이다. 섣달그믐 제야행사(그믐세배), 음력 10월 시제 때는 모든 남자들이 행사에 참여하기 때문에 마을 안에 남자를 찾아보기 어렵다고 한다. 1980년대까지 주역을 공부하던 진수재(進修齋) 서당이 있었는데 지금은 주역의 학습을 이을 인재나 그 풍습을 유지시킬 사람이나 요인들이 새로운 세태의 물결에 밀리어 그 맥이 끊겨 있다.
용산면은 다른 면에 비해 인구가 적지만, 경지면적과 호당 경지 면적, 그리고 전답 구성비에서 대체적으로 논에서 재배되는 농산물이 장흥군의 평균치에 해당하는 소출을 하고 있다. 따라서 옛 부터 이 지역은 인심이 넉넉하고 집안끼리 우애가 깊은 가족 구성을 이루고 있으면서 유학을 숭상하는 학문적 토대위에 인간의 도리와 지침을 마련하는 교육열이 높은 곳이기도 하다.

옛 부터 이 지역이 인심이 넉넉하고 집안끼리 우애가 깊은 가족으로 구성
이른바 장흥에서 양반행세를 하려면 향교의 사무를 담당하는 향교 장의를 맡아야 한다거나, 선조의 문집이나 원사를 갖고 있어야 하는 그런 것이 유교적 전통이 강한 용산면 일대에서 일어나는 자랑거리로 삼고 있는 이야기이다.
이러한 양반 고을이라는 면에서 “용산면 사람들은 비록 부유하지는 않지만 양반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반촌으로 인물이 많이 난다”고들 전해오고 있다. 그 이유로 풍수적인 요인들을 들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교육적인 환경을 들기도 한다. 즉 양반고을답게 서당이 많았고, 또 예로부터 과거에 급제하는 인물들을 다른 지역에 비해 많이 배출하어 왔던 곳이다.

만속적인 요인과 함께 서당이 있는 교육열이 높은 지역
현재는 고시 등이 출세의 방법과 길이라 생각하여 많은 법관지망생들이 수차례 낙방의 쓴잔을 이겨내며 응시에 도전하는 관료 등용율이 높은 곳이기도 하다. 옛 부터 양반집안으로서의 가풍을 유지하려면 최소한 집안에 진사, 또는 고시 출신자가 나와야 문중 서당의 입지적 가치로 인정받을 수 있는 곳이 바로 여기 용산면, 특히 상금마을이다.

전라남도와 국립민속박물관(관장 천진기)이 ‘2011 전남민속문화의 해’ 사업 일환으로 국립민속박물관 연구진이 2011년 2월부터 10월까지 약 9개월간 장흥, 영광, 목포 현지에 거주하면서 현지에 역사적 가치와 자료로써 보존되고 있는 사당이나 전해 내려오는 풍습, 생활상 등 민속적 가치로써의 면밀한 조사를 통해 취합한 성과물로 세 지역의 민속지역 및 살림살이 각 1권씩 6권과 ‘전남의 민속문화’ 1권 등 총 7권을 발간했다. 전남의 민속문화를 총 망라한 민속조사보고서라고 할 수 있는 민속책이 발간된 것이다. 전남지역민의 삶을 심도 있게 다룬 내용들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 소중한 자료라고 할 수 있는 책이다. 세대의 변화를 담기위하여 지금도 연구조사는 계속되고 있다.

민속문화를 총망라하는 전남지역 민속조사보고서 발간
현지 조사연구를 거쳐 수집된 자료를 바탕으로 기술한 칠리안속 상금마을의 백균 윤영님 부부 살림살이 조사보고서를 참고로 직접 상금마을을 찾아 이 부부를 만나 그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기술하려고 한다.

칠리안속의 유래에 대하여 묻는 질문에 백 균(80)옹은 “ 우리들은 어렸을 때부터 그냥 ‘칠리’ ‘칠리속’ 이라고 했어요 7개 마을이 한데 어울러 있는 곳이라고 해서 이곳 마을 사람들은 다 ‘칠리’라고 해요. 뭐 ‘칠리안속’, ‘칠리안속들’.이라고도 합니다. 아마도 이 명칭은 자연환경과 역사적인 자연촌락의 편제 과정에서 유래되지 않았나 싶기도 합니다. ”
칠리안에 생활하는 사람들의 습관이나 풍습의 차이점은 얼마나 있느냐는 질문에  백 균옹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칠리안에 속해 있는 7개 마을사람들의 습관과 생활방식도 조금씩 다르지요 각자의 마을에서 사신 분들의 역사나 풍습이 모두 똑같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용산면 이외의 아주 먼 곳에 위치하고 있는 딴 지역과의 차이처럼 완전히 상이하지는 아닐 것 같구요. 각자 집에서의 생활환경이 다른 것처럼 개성적인 면에서 각기 다르고, 내가 아는 것하고 또 다른 무엇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결코 큰 차이는 아닐 것 이라고 생각해봅니다.“

‘칠리안속’ 마을의 풍습이 지켜지고 이어져야 하는 역사적 배경
‘칠리안’ 이나 ‘칠리안속’ 의 다른 역사적 유래는 없느냐는 질문에 백 균 옹의 대답은 간결하고 이해하기 쉽게 설명을 해주었다
 ‘칠리’란 말은 또 다른 의미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는 같아요 이렇게 두 손을 둥그렇게 만들어 보십시오 (백 균 옹이 두 팔을 내밀어 나무 아름을 끌어 안 듯 두 손을 원형으로 벌린다) 용산면 이지역의 지도를 쭉 펴놓고 보면 내천이 흘러.저 부용산에서 흘러내려오는 물과, 월림천 물 모양이 소쿠리 모양으로 되어 있어요. 즉 7개 마을이 한데 어울려 있는 곳이라는 ‘칠리안속’, 또는 ‘칠리안속들’이라 하는데, 이 명칭은 자연환경과 역사적인 자연촌락의 편제 과정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여 집니다. 이런 자연적 입지에 일곱 마을이 있다 해서 ‘칠리’라고 부르는 것이지. 뭐 ‘칠리’라는 특별한 역사적 근거는 따로 있는 건 아닙니다.“

전남지역 민속조사보고서에서 효(孝)를 중시하는 사람들의 생활을 심도 있게 다룬 상금마을의 백균ㆍ 윤영님부부와의 인터뷰를 통해 산업화와 도시화로 인하여 전통적 가족관의 단절에서 오는 가족의 연대성, 일체성이 무너지는 것이 결국 사회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백 균옹의 조부 일곡 백형택(1878-1962)은 유명한 한학자로 명성이 높았으며, 그의 막내 동생 백 익은 광주일고와 서울대를 졸업하고 입법고시, 행정고시 양과를 합격한 수재였고, 큰아들 백승호는 사법고시(제33회) 합격 후 전남지방경찰청장과 경찰대학장을 거친 후 지금은 서울에서 변호사로 활약하고 있다.

백 균옹이 살고 있는 집터는 누가 보아도 명당 터라고 한다. 10년 사이에 한 지붕에서 고시를 세 번이나 합격한 경사가 났으니 그렇게 생각되지만 한학에 바탕을 둔 가문에 조상숭배 정신과 부인 윤영님여사의 내조가 명문가의 맥을 잇고 가문을 빛내는데 공이 크다 할 것이다.
이러한 수원 백씨의 인재들이 월정, 송전, 초당으로 흩어져 살면서 점차 많은 향교 임원이 배출되고 있는 근원이 수원 백씨의 집성촌인 상금마을이 우리 민속의 풍습을 지켜오는 버팀목으로 인식되어온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효(孝)를 중시하는 사람들의 생활을 심도 있게 다룬 상금마을의 백균ㆍ윤영님부부
언제부터 칠리안속에 마을이 형성되었는지를 묻는 질문에 백 균옹은 “명확하지는 않지만 상금, 금곡, 관지 등에 지석묘가 많이 산재해 있는 것을 보면, 이른 시기부터 여기에 사람들이 살았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구전에 따르면 상금과 금곡 사이에 신라시대부터 나씨와 마씨가 살았다고 하는 나마골의 지명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현재처럼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던 것은 조선 중기 이후로 추정되곤 합니다.

칠리안속은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지요 그 가운데로 금곡천이 흐르고, 서쪽으로 남상천이 흘러서 다른 지역에 비해 안개가 잦다고 합니다.. 그래서 안양 지역에서는 쪽파 재배를 많이 하지만, 칠리안속에서는 안개가 잦아 쪽파 재배가 안 되기 때문에 양파 재배를 한다고 합니다.”
백 균 옹에게 결혼은 어떤 계기로 아내를 만나게 되었냐고 물었다. 중매로 결혼을 했는데 아내가 시집오면서 무척 고생을 했다고 한다. 그 말을 들은 옆에 앉아 있던 아내 윤영님은 손 사례를 치며 남편의 말을 막으려고 했다. 남편 백 균은 개의치 않고 말을 잇는다 “ 나는 아내 앞에 고개를 들 수 없습니다. 시집을 왔는데 초등학교 4학년, 중학교 2학년 짜리 동생 머슴애가 있었습니다. 그 동생들을 대학까지 아내가 보살펴 주었습니다. 정말 헌신적으로 동생들에게 부모의 역할을 다했던 것입니다.”
 아내 윤영님은 나 밖에 그 일을 할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피할 수 있고 어린 시동생들을 나 몰라 할 수 있겠냐고 말하고 있다.

백 균 옹은 슬하에 남자 4형제를 두고 있다. “ 큰 아들은 사법고시에 합격해서 경찰에 들어갔어요 전남청장과 경찰대학장을 끝으로 지금은 변호사 개업을 했습니다.
둘째가 신장이 좋지 않아 항상 건강을 걱정하고 있지요. 1999년에 내 신장을 이식하는 수술을 받았습니다. 셋째는 미국에서 살고 있습니다. 몇 번 아들의 초청으로 미국에 갔었는데 참 바쁘게 살더군요. 며느리도 집에 있는 시간이 없이 매일 바쁘게 외부에 나가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손주들도 일상의 생활 모습이 거의 미국사람 다 되었습니다. 농촌애서 살고 있는 나에게는 모두가 어색하고 익숙하지 않은 생활이었습니다.
네 째는 보험회사를 다니다가 광고회사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 아이도 정말 정신없이 바쁘게 살더군요 둘째가 몸이 약해 좀 걱정스럽지만 자신들의 일에 열심히 생활하는 자식들의 모습을 보면서 고맙고 감사한 마음이 큽니다.”

아버지 백 균은 자신의 고향과 종친에 대한 애정이 누구보다 강하고 깊었다
“이곳 상금마을은 예와 효를 중시하는 곳으로도 널리 알려진 마을입니다. 제 자식들은 물론이지만, 고향을 떠나 외지에 살고 있는 향우들도 명절 때나 제례가 있을 때는 고향을 찾아 부모나 마을 어른 찾는 것을 잊지 않는 것을 보면 올바르게 성장한 후손들에 대해 큰 자부심을 느낍니다.

상금마을은 예와 효를 중시하는 곳으로도 널리 알려진 마을
고향을 떠나 타지에 사는 종친들이나 그 자손들도 조상을 숭배하는 생각이 깊습니다. 매해 4월 3째 주에는 장흥에서 태어나 살다가 타지에 나가 있는 수원 백씨 자손들이 이곳 상금마을에 모여 합동 제례를 지냅니다. 이런 큰 행사를 치루기 위해 종친회에서 이곳 상금마을에 재실울 건립했습니다. 합동 제례가 있는 그날은 이곳 마을이 대단합니다. 관광버스며, 승용차들이 마을 어귀에 꽉 들어찰 때는 고향을 지킨 보람을 느낍니다. 타 종씨들이 그렇게 부러워 할 수가 없습니다. ”

백 균옹의 살아 온 이야기나 그가 기뻐하고 보람을 느끼는 일들이 어쩌면 평범 이하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러나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이나 조상을 숭배하는 충효심은 그의 생명 그 자체로 느껴졌다. 아내 윤영님도 아들의 지극한 효도심을 간직하고 싶은 마음에 자식들이 집에 오면 묵고 쉴 수 있는 공간을 꾸며 놓았다고 나를 안내 했다. 방에 들어서자 한 눈에 아들이 그대로 읽혀지는 느낌을 받았다. 말이나 행동에서 꾸밀 줄 모르는 그녀의 남편 백 균옹의 한 말이 지워지지 않는다.  “묵묵히 남편의 뜻을 따라 온 아내의 헌신적인 가족사랑이 저의 삶에서 제일 큰 힘이 되었습니다.
저는 그냥 주어진 일,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내가 많이 배우지 못해 자식들에게 지식을 가르쳐 줄 능력은 없지만 자식들에게 공부 잘하고 높은 지위에 앉는 곳 보다는 예의를 지키고 올바른 생각, 올바른 일을 하도록 이야기 해왔을 뿐인데  저토록 훌륭하게 자라줘서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들과의 이야기를 마치고 대문을 나서다 동네 아주머니를 만났다. 그는 윤영님씨는 “훌륭한 어머니상”을 받으신 분으로 어머니 품 같은 장흥의 가장 훌륭한 어머니라고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듣고 있는 나도 행복감에 취하는 것 같았다.
이 소박하고 순수한 아름다운 가족의 행복을 널리 알리고 싶은 마음을 안고 돌아오는 겨울 길은 너무나 훈훈했다.  
 

가족사진 셋째 광섭씨 가족은 미국거주로 빠졌다.

묘전행사 시제

가현재 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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