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30일은 장흥읍 예양공원의 기슭에 위치한 영회당에 위패가 봉안된 장흥부 수성 장졸 96위를 추모하는 제일이었다. 영회당의 사적은 역사적인 평가는 이견이 있을 수 있지만 장흥의 동학농민혁명 사적이 국가지정문화재(사적지 제498호, 2009년) 로 지정되고 기념관이 건립되어 조명되는 시대적 상황에 비추어 영회당의 존재도 합당한 평가가 뒤따라야 되지 않을까 여겨진다. 기자는 4월30일이 영회당의 제일이라는 연락을 받고 취재차 참석 하였다.

제사의 현장은 소슬하고 적막하였다.사당은 후락하였고 주변의 정리는 산만 하였으며 무엇보다 겨우 네 분의 후손들이 애틋하게 제사를 모시는 정황이 안타까웠다.
영회당의 보수의 필요성과 기억 속에서 사라져가는 아픔을 느꼈다.

 

 

 

 

1894년 부패하고 무능했던 왕조와 외세의 침탈에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개혁 하려고 농민이 주축이 되어 봉기한 “동학농민혁명”은 근세에서 가장 평가 받는 민중 의거였으며 그 정신을 오늘의 시대에서 어떠한 형용으로 회자 하여도 부족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장흥 지역에서의 주목받는 농민군의 활약과 더불어 1894년 12월 5일 함락되는 장흥부를 끝까지 사수 하였던 96인의 수성 장졸에 대한 평가는 재고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당시 장흥부의 관속들은 왕조가 곧 국가였으며 그 체제를 지키는 것이 충((忠)이었다.
농민군이 기세를 올릴 때 여러 곳의 관아에서는 인부(印符)와 무기까지 버리고 도망 하는데 급급할 정도로 문란 하였지만 장흥부의 장졸들은 관속으로써의 소임을 죽음으로 감당하였다.

1960년 전후에는 영회당의 제일에 유림과 공무원들이 참여하고 그 숫자도 만만치 않았음에 비하여 금년의 제일에는 역사의 흐름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희한이 느껴졌다.

1992년 당시 이영권의원이 주도 하여 국비를 지원받아 “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탑”을 건립하고 더불어“장흥동학농민혁명사”를 편찬 발간하는 사업의 추진위원회 구성을 보면 시선을 끄는 대목이 있다.
40여인의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추진위에 기명 되었으며 그 중에는 관군(영회당)의 후손 5인이 기명 되어 있다.

이 사실은 깊은 의미가 내재되어 있다. 장흥동학농민혁명을 선양하는 사업에 관군의 후손들이 조건없이 참여하여 농민군과 관군의 후손이 화합의 기반을 단초 하였다는 것이다.
비교 한다면 당시 희생당한 수 천명 농민군의 그 참담한 피값을 위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영회당 수성 장졸 96인중에는 박헌양 부사를 비롯한 임명직 외에는 장흥의 사람들이었으니 이 세월의 아픔들을 사적지에 포함된 영회당과 더불어 동행한다면 동학농민혁명의 혁명정신이 더욱 높게 기려지지 않을까.

125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동학군과 관군의 영혼을 달래려는 소규모 행사는 몇 번 있었지만 적극성과 진정성에 우리들의 성의가 부족함이 없었는지 장흥군은 물론 모두가 머리를 숙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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