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문-1

●김용술 선생님은 나의 문학스승이시다. 평생을 교단에 바쳤던 분인데, 그 대부분을 고향인 장흥의 중.고등학교에서 재직했으며, 그 지점에서 선생님은 나를 가르치시고, 아버지같은 사랑을 주셨다. 아래는 오는 25일에 장흥 현지에서 열리는 세미나의 토론문 원고다.

김용술 선생님의 가르침을 말한다

<위선환>
김용술 선생님은 경성제국대학을 졸업한 해방세대이며, 역사의식이 날카롭던  엘리트로서, 정부 수립 선포 전 혼란기에 장흥중학교에 교사로 부임한 것을 시직으로 평생 동안 학생들을 가르치시면서 한국전쟁, 4.19혁명, 5.16군사정변과 10월유신 등, 역사와 시대의 중압을 견디셨고, 돌아가시기 전에는 광주 오월민중항쟁과 신군부의 집권과정을 지켜보신 분입니다. 선생님이 기록을 남기지 아니했으므로, 나는 내가 경험한 바, 선생님이 무엇을 가르쳤는가 살펴보고, 제자들 중에서 문학한 제자들의 문학이 어떻게 선생님의 가르침과 한 자리에 놓이는가를 살펴보면서, 장흥사람 김용술의 장흥사랑 이야기를 더불겠습니다.

장흥문화원이 발간한 『장흥문화』 27호에는 내가 쓴 「나의 억불시대」라는 글이 실려 있습니다. 그 글에 ‘김용술 선생님 입비(立碑)’ 에 대한 애제자들의 입장이 밝혀져 있습니다. 써진 대로 읽겠습니다.

"한승원이 나에게 “김용술 선생님이 가장 사랑한 사람이 자네였으니 마음을 모아서 탐진강 가에다 비석 하나 세우세. 돈도 얼마 안 드네” 했다. 그 말을 들은 나는, 비를 세우는 것이 김용술 선생님에게 맞는 일인지? 아무래도 칭(稱)하고 찬(讚)하는 말들이 새겨질 그 비를 선생님께서 마땅해 하실는지 부터가 부담이 되었는데, 훨씬 뒤에야 머뭇거리며 비석 이야기를 꺼낸 내게 송기숙은 이렇게 말했다. “요새 비가 남발되고 있어서 아니 세우는 것만 못해, 내 생각에는 그만 두는 것이 좋겠구만 ”

인용부분은 여기까지입니다. 한승원이 입비를 제안한 때는 2001년입니다.

그로부터 17년이 지난 지금에, 선생님을 추모하는 사업을 한다면서, 세미나에 토론자로 나와 달라는 연락이 있었습니다. 선생님이 귀한 분이신 만큼 아무나 세우는 입비는 하지 않겠다는 뜻이 선생님을 위한 것임과 같이, 선생님을 추모하는 사업을 하겠다는 뜻 또한 선생님을 위한 것일 진데, 따르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김용술 선생님은 우리말을 잘 가르치는 국어교사이면서 강직한 인품과 감화력이 더불은 존경받는 교사였습니다. ‘정직하다’ 라는 말인즉 ‘바르고 곧다’ 라는 말인데, 왜 ‘정직하다’ 라고 말하면 ‘바르고 곧다’ 라고 말하는 것보다 악센트가 주느냐고 수업 중에 나를 호명하여 묻는 선생님이었습니다. 선생님의 교육관이라 할 ’바른 삶을 사는 사람‘ 을 강조하는 한 방법이었던 것입니다.

■ 잠시, 왜 ‘정직하다’ 라고 말하면 ‘바르고 곧다’ 라고 말하는 것보다 악세트가 주는가에  대한 선생님의 설명을 옮기자면,. ‘정직하다’ 라는 말이 ‘착하다’ 라는 말과 겹쳐서 들리는 때문이라 했습니다. 우리 언어에는 그렇게 서러운 역사가 있다고요.

■ 문학스승으로서 선생님도 국어교사로서 선생님과 다르지 아니했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선생님의 제자로서 살아오면서, 1955년부터 1969년까지 14년간, 전반 4년은 시를 공부하는 학생으로서, 후반 10년은 시인이 된 제자로서 선생님 곁에 있었지만, 문학론이나 작법, 또는 작품론을 들은 기억이 없습니다. 흔히들 일컫는 문학수업은 받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문학스승으로서 선생님이 가르치신 것은 문학하며 사는 정신, 바르게 문학하는 삶을 사는 정신, 그것이었습니다. 그것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툭 던지는 말씀 한두 마디가 다였고, 그런 방식의 가르침은 꾸준히 반복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빨치산 했던 일을 처음 들려주시면서 그 끝에다 붙인 말이 이렇습니다. “바르게 살면 최소한 죽지는 않는다. 글 무서운 줄 알고 바른 문학 해라. 그래야 최소한 글이라도 살아남는다."
정리하자면 김용술 선생님은 모든 제자들에게 바르게 사는 삶을 가르쳤고, 그중에서 문학하는 제자에게는 바르게 문학하는 삶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런 만큼 선생님은 자신에게 엄격했고, 제자들에게도 엄격했으며,그렇게 엄격했다 함은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 또한 자신에 대하여 엄격해야 했다는 뜻입니다. 자신에 대하여 엄격한 제자로서 앞에 말씀드린 송기숙이 있습니다.

■ 잠시 시간을 내겠습니다. 선생님의 애제자로서 송기숙이, 문학한 초기에, “문학을 하는 사람이면 이 상 같은 시인은 뛰어넘어야 할 산맥이라 생각해서” 우리문학의 <전위>인「이 상(李 箱)의 시」를 연구하여 같은 평론으로 등단했고,  위선환이 1960년대에, 등단하자 이내 전위시를 썼던 것을 살펴보면, 선생님의 문학정신과 애제자들의 문학이 어떻게 접합했는가 하는 지점이 바라보입니다.

의미가 있는 그 지점을 바라만 보고  말 수는 없어서, 이어지는 말을 붙이겠습니다.
전위 하는 문학, 또는 전위를 지향하는 문학인즉슨 문학의 변혁을 기대하는 문학행위, 또는 기성문학과는 '다른 문학' 을 기대하는 문학행위라 할 것이므로, 애제자들이 처음부터 전위시를 연구하고, 또는 쓰면서, 그러할만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문학을 시작했다는 것은 중요하며, 또한 안일하지 않고 힘들지만 지향점이 뚜렷한 문학을 하는  태도로서도, 바른 문학을 강조하신 선생님의 가르침과 합치합니다. 뒤에 송기숙이 민중문학이라는 큰 마당으로 자신의 문학을 밀고 나가서 마침내는 자신의 문학과 삶을 일치시킨 것, 시를 끊었던 위선환이 30년만에 돌아와서 '다른 시'의 긴장을 유지하면서 '사유가 있는 큰 시'를 시도하고 있는 것 등도  같은 맥락에서 평가할 수 있겠습니다. 위선환이 「나의 억불시대」를 쓰면서, 선생님과 송기숙의 사제관계를 바짝 다가가서 언급하고, “선생님이 글로 다 쓰지 못한 것을 송기숙이 글로 몸으로 써가고 있지 않은가 생각한다”  한 것도, '글과 삶을 일치시키는 문학정신' 과  선생님이 가르치신 '바른 문학' 의 상관관계를 적시하고, 아울러서 선생님이 한국근현대사를 겨누어 보시던 시각과 송기숙의 문학이 거의 어긋남이 없어 보이는 동질성을 적시해서 하는 말이었습니?
이제 말머리을 되돌려서, 토론을 이어가겠습니다.

■ 선생님께서 타계하신 지 35년입니다. 그러나 선생님이 아주 돌아가신 것은 아닙니다. 살아가며 힘들거나 갈등할 때에 문득 선생님을 생각하는 제자가 있다면 선생님은 살아 계신 것이며,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고 문학하는 제자의 작품이, (1) 바르게 문학하는 문학인이 쓴 (2) 값이 큰 작품으로서 읽히는 한은, 선생님도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추모사업은 입비(立碑)가 아닌 조형물(造形物)이라 합니다. 이제 선생님의 제자들은 선생님을 상징하는 조형물 앞에서 선생님의 가르침을 되새기고 자신을 돌아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은 곧고 단정하고 선명한 분이며, 다른 세상에 계시면서도 가르치는 분입니다. 원컨대 그 조형물이 선생님의 인품과 가르침을 부족함이 없이, 그러나 절대로 넘치지는 않게, 그리고 선(線) 하나라도 왜곡됨이 없이 제작되기를 바랍니다. 장흥사람들과 함께 장흥문학 안에 살아계신 선생님을, 잘못 제작하면 오히려 구차해지는 조형물로 가리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언젠가 선생님은 내 글을 읽고 말했습니다. “함부로 고향 사랑한다 말아라. 떠벌리는 일이다.” 그래서 하는 말이지만, 선생님은 품성에 본래(本來)하는 선비정신과, 강인한 엘리트 의식에다, 고향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교사라는 자각으로써 장흥에 대하여 아주 극진했으며, 빨치산 하다 수감되었을 때에 “학교와 학생들과 읍내 유지들이 힘을 합쳐서 구명(救命)해주고, 탓도 않고, 교사로 봉직하게 해준” 장흥에 대하여 매우 겸손했습니다.

그렇듯 선생님이 극진하고 겸손했던 실례로서, 내가 경험한 바로는, “박림소”라고 말한 나를 책하면서 ‘석대보’와 ‘석대들’ 을 말씀하시던 것, 허물어지고 묻혀 있던 장흥성을 답사하게 하시던 것, 유치면 반월리, 신풍리, 덕산리, 송정리 등 마을을 돌며 6.25 동란(당시에는 그렇게 불렀습니다) 체험담을 채집하게 하시던 것, 장흥향교를 찾으시던 것, 강수의 어른을 만나 장흥 여러 곳의 역사와 유래를 들으시던 것, 그 곁자리에서 들은 바 있어서 용산면 원등마을로 애국지사 김두한 선생의 큰 자제분인 김재윤 주필(김대중 전 대통령이 경영하던 당시에 『목포일보』에서 주필했던 분입니다.)을 찾아뵙고 일제의 농민수탈과 장흥야학에 대하여 듣던 일, 등이 생각납니다.

그런 극진함과 겸손함이 있어서, 휴전한 다음다음 해로서, 군사훈련을 받은 학생들이 시가행진을 하면서 소리 높여 반공구호를 외치고, 또는 군민들과 함께 반공궐기대회를 하던 1955년에, 기실 군사훈련비 용도인 학도호국단비를 쪼개 쓰는 어려움을 견디면서 장흥중고등학교 교지『억불』을 창간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창간된 『억불』을 통하여 송기숙, 한승원, 위선환, 서종택, 김석중, 백수인, 배홍배 등이 문학에 입문했고, 그들이 후일에 등단하여 문학인이 됨으로써 오늘의 장흥문학의 바탕을 이룬 것입니다. 선생님이 하신 일로서 첫 자리에 놓이곤 하는 교지『억불』의 창간 과정에는 김하선 교장 선생님과  문재만 군사훈련담당 교관님의 결단이 있었으며, 손석연 사친회이사장님의 적극적인 협조가 있었다고 선생님은 말했습니다.

이상을 되살펴보면, 김용술 선생님을 ‘존경받는 교사이자 장흥문학의 스승’으로서 키워낸 것은 장흥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선생님이 작사한 「장흥중학교 교가」처럼 장흥은 산 높고 물 맑은 승지로서, 산인 듯 기상이 높고, 물인 듯 성정이 청정한 분들이 사는 터였으므로, 선생님은 그 터를 장차 문림(文林)을 이룰 장흥문학의 텃밭으로서 일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장흥에다 설치하는 선생님의 조형물이, 아주 극진하고 매우 겸손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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