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문1
<저번호 이어서>덧붙이자면, 장흥이 키워낸 선생님은 ‘틀림없는 장흥사람’ 이었습니다.
(1) 공비토벌작전의 지원병력으로서 자원(自願)한 자식들을 유치 작전지구에 내보내기도 했던 장흥사람들이, 그 자식들과 힘을 합쳐서 구명한, 아주 특별한 빨지산이 김용술 선생님이었으니, 선생님은 6.25동란 전후에 흔히들 말했던 좌익 빨갱이도 공산주의자도 아닌 것이 분명하고,
(2) “동학東學”은 반란反亂도 외침外侵도 아니므로, 역사가 ‘동학란東學亂’ 이라 표기한 것(당시에는 그랬습니다)은 잘못이다” 라고 지적한 것, 우리 민족의 언어와 역사와 혼을 말살하려 했던 일본제국주의를 심하게 혐오하던 것, “우리 조상들은 지리적 정치적 관계로 항상 이웃나라의 놀림을 받아 주리고 시달리고 하면서 불안 많던 생활을 해왔지만, 풀이 꺾이거나 시들어버리는 일 없이, 그래도 오늘까지 꿋꿋하게 버티고 살아왔다.” 라고『억불』에다 썼던 것 등을 미루어볼 때에, 선생님은 반식민지주의 의식이 강한 민족주의자에 가까운 분이라 말할 수 있겠는데,
(3) 혹시나 선생님의 민족주의적인 성향이 시대상황과 맞물려가면서 급진 진보주의나 좌경으로 변질했던 것은 아닌가 하고 살펴보면, 오히려 공자와 맹자를 말하고 동양정신을 말하면서 도덕률과 사람됨을 강조하시던,
(4) 그야말로 바르게 분별하고 철저하게 처신한, 명철한 장흥사람, 그 분이 김용술 선생님입니다.
나는 자전거를 끌고 걸으시는 선생님과 함께 장흥우시장에서 순지마을까지 뻗은 탐진강 둑길을 여러 번 걸었습니다. 그 중간에는 “선생 하는 것이 큰 일인 줄 안다” 면서 “내 큰 놈도 선생 했으면 좋겠다” 고 말하시던 독실보가 있고, 내가 시인이 된 뒤에 난해한 전위시(前衛詩)를 쓰면서, 소외되고 방황하며 문란하던 때에, 엄한 말로 나를 깨우치시던 자리도 그 어림입니다. 선생님은 그때에 말했습니다. “네 시는 네가 쓰는 것이지, 누가 써주는 것 아니다! 시 쓰기가 아무리 힘들고 어렵더라도, 견디고 이겨내야 할 사람이 네가 아니냐! ” 내가 쓴 시 한편 읽습니다. 함께 읽으시면서 김용술 선생님이 기른 강은 어떤 강일까 하고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탐진강 13
깊어진 것이 무엇인가
헤아려보아야 고작
속내거나 골이거나 주름살이거나
아니면
그리 아픈 그리움일 것인데

 장흥읍에 가서 보았다
깊어진 사람이면 똑같이
들여다보며 사는 것
사람들은 하나씩
강을 기르고 있었다

 토론문2
조은숙(전남대학교)

장흥이 ‘문학관광기행특구’로 지정받은 지 10년 만에 장흥 현대문학인들의 정신적 지류를 형성하였던 남전 김용술 선생의 삶과 정신을 조명하는 일은 큰 의미를 의미 지닌다고 봅니다. 본래 이 자리는 김용술 선생으로부터 “역사적인 사실을 제대로 쓰지 못할 때 그 자체가 역사의 왜곡이며 그것은 또 다른 범죄”라고 문학의 역할을 배웠던 송기숙 소설가가 앉아있어야 하는데, 연구자인 제가 이 자리에 앉게 되어 아쉽습니다.
송기숙은 김용술 선생을 빼고는 장흥 현대문학을 이야기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김용술은 단지 국어 교과를 가르치는 교사가 아니라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알려준 참 스승이었다고 했습니다. 그가 ‘빨치산’ 활동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학도호국단(우익단체)을 비롯한 많은 학생들이 경찰서로 가서 모셔온 일이 이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송기숙이 평생 화두로 삼았던 단어가 ‘염치’ 즉 ‘부끄러움 없는 삶’이었던 것도 바로 김용술 선생의 ‘양심적인 행위’ 때문이었을 겁니다. 송기숙은 백의민족·1968년에서 빨치산이었던 양 선생의 모습으로, ‘은내골 기행’에서는 시골 고등학교장 선생의 모습으로 이런 김용술을 형상화하면서 그를 기억하고자 했습니다. 발표자의 오늘 논의는 장흥 현대문학의 뿌리 역할을 하였던 김용술 선생을 추모하고 기억하는 맥락에서 볼 때 충분히 의미 있고 의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송기숙 소설가를 대신하여 이 자리에 섰기 때문에 ‘은내골 기행’을 통해 송기숙이 기억하고 있는 김용술 선생의 면모를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내가 비록 이런 자리에서나마 이런 소리를 제대로 하고 나니 비로소 사람 구실을 좀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이 땅에 태어나서 이런 험한 역사를 살면서 그래도 나름대로 고민하며 살았다는 사실을 이런 범죄의 기록으로나마 남기게 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은내골 기행’, 197~198면)
위의 인용한 부분은 송기숙이 인터뷰를 통해 김용술 선생을 모델로 하였다고 밝혔습니다. 송기숙은 ‘은내골 기행’에서 ‘이 땅에 태어나서 이런 험한 역사를 살면서 그래도 나름대로 고민하며 살았다는 사실’을 언급하며, ‘사람 구실’을 했다고 평가합니다. 19살 만학도였던 송기숙은 시류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는 김용술 선생을 보면서 ‘올바른 교육자’의 모습과 ‘참여하는 문학인’의 자세에 대해 배울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김용술은 송기숙의 시선이 현실의 구조적인 모순을 역사적인 맥락에서 통찰하고 서사화하는 역사의식과, 아울러 지배 계급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일상의 삶이 왜곡되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하는 사회의식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저는 발표자의 논의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발표자의 글을 읽어나가며 개인적으로 궁금했거나 좀 더 설명을 들었으면 하는 사항과 앞으로 더 진행되었으면 하는 점을 중심으로 질문을 드리고자 합니다.
첫째는 김용술 선생이 송기숙에게 영향을 주었듯이 한승원, 위선환, 김석중 작품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알고 싶습니다. 발표문에 인간적인 부분은 제시하였기 때문에 작품 세계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알고 싶습니다. 세 분이 오늘 토론자로 나오셨으니 이 자리에서 들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또한 장흥 출신 작가들이 많은 만큼 다른 작품 속에도 김용술 선생을 형상화한 작품이 있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둘째는 앞으로 좀 더 진행되었으면 하는 점입니다. 먼저 김용술 선생의 문학관에 대해서 좀 더 살펴보기 위하여 1959년에 시작하여 1972년까지 유지되었던 ‘억불’에 참여했던 학생들을 중심으로 인터뷰를 진행했으면 합니다. ‘억불’은 장흥고등학교 교지이면서도 장흥현대문학의 산파 역할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는 김용술 선생이 장흥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했고, 장흥에서 교사 생활 31년을 했기 때문에 삶에 영향을 받은 사람이 많을 것으로 봅니다. 오늘날 김용술을 추모하고 기억해 내는 방법으로 ‘반공’이라는 올가미에 가려진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살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토론문3
장흥 중ㆍ고 교지 ‘억불’그리고 김용술 선생
                                                             김 석중(소설가) 부산면 용반리 생, 장흥중,고 17,18회, 1980 삼성문예상 수상(장편소설 ‘바람’)으로 문단 등단.
대산재단 창작기금 수혜, 전남문학상, 전라남도문화상(문학부문)수상, 창작 소설집7권, 향토사 관련 저서7권 간행, 광주전남소설가회, 광주전남작가회, 장흥별곡문학동인회 회원.
억불산, 혹은 억불 이 이름은 단순한 산의 이름 그 영역을 뛰어 넘어서 장흥 사람들에게는 수많은 추억과 그리움을 안고 있는 상징성으로 다가온다.
4,50년전 장흥읍 관내의 초중고에 재학중이던 학생들은 해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봄 가을의 소풍 중에 한번은  억불산 중턱 큰 소나무 아래가 행선지였다. 읍내에서 바라보면  억불의 흘러내린 능선에 한 폭의 추상으로 그려지던 큰 소나무..,막상 멀고 가파른 산길을 걸어 도착하면 의외로 밍밍하던 그 능선에서의 소풍은 잊혀 지지 않은 추억이었다.
학창시절의 소풍으로 기억되는 ‘억불’은 장흥중고 학생들에게는 또 다른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다. 학창시절 문학을 꿈꾸던 학생들이 작품을 투고하고 자신의 작품이 실린 교지를 받아 들고 마치 문학가가 된것처럼 고독한 폼을 잡게 해주었던 매체가 교지 ‘억불’이기 때문이다. 1964년이던가? 필자는 억불지 편집 위원이었다.지도 교사는 전북대학교 국문학과 출신이며 ‘원탁’동인으로 활동 하시던 시인 황길현 선생이었다. 필자를 많이 편애하고 문학적 감성을 끌어 올려 주셨던 그 시대의 시인 같은 언행을 보여 주신 교사였다.
황길현 시인 선생님께서  필자를 억불지 편집위원으로 선정해 주셨고 교지 초고의 교정일도 거들었다. 장흥읍 동동리 경찰서 아래 장흥 중,고 교사 분들의 관사 골목 그쯤에 ‘장흥인쇄소’가 있었다. 필자와 동창인 정규훈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인쇄소였다.
인쇄소 한쪽 벽면을 가득히 채운 납 활자대에서 활자를 뽑아 조판을 하고 초벌 인쇄가 끝난 교정지를  활자를 골라 다시 조판을 하던 지루하고 수동적이던 인쇄소..그 인쇄소에서 교정을 보았지만 실제로 감각과 안목은 인쇄소 주인 어르신을 따를 수가 없었다.
그것은 필자에게는 생경하고 경이적이고 자랑스러운 경험이었고 그 경험은 황길현 선생의 배려였다. 교정중에 ‘흥미식당’에서 배달하여 먹었던 자장면의 맛은 50여년이 지난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아쉽게도 필자가 편집위원으로 참여 하여 간행된 억불지가 몇호 였는지 필자의 어떤 작품이 실려 있었는지 자료도 없고 기억도 없다.
그러나 이 원고를 쓰면서 억불지를 매체로 하여 문학병을 앓던 문학도로 멋을 뽐내던 선후배 몇몇 이름들이 스멀스멀 기억되어 오는 것이다.
1-2년 선배였던 강상구, 이기성, 김유근 그 선배들이 문학을 하기 위해서는 배워야 한다고 장흥 극장 위쪽 동동리통 선술집에 앉혀 놓고 술을 먹이던 고통스러웠던 기억, 비교적 조용하게 문학반을 출입 하던 이성관, 백학근 선배, 동기중 황길현 선생의 칭찬을 많이 듣던 이숙희, 정옥채 1년 후배이던 이인제, 문학반도 아니었는데 억불지에“민선생....”이런 제목의 소설 같은 산문을 게재하여 황길현 선생께서 극찬한 이정국..그 선배들과 동기들과 후배들의 소식은 아득한 옛이야기로만 남아 있다.
10여년 전이던가. 문득 생각이 나서 장흥고등학교를 찾아가 혹여 억불지가 보관 되어 있는지 수소문해 보았다. 참으로 아쉽게도 단 한권의 교지도 남아 있지 않다는 답변을 듣고 얼마나 아쉬웠는지.
근간에 들어 한 승원작가께서 발의 하여 장흥중,고에서 특활 문예반을 지도 하고 억불지를 창간 하여 장흥의 문맥을 조성 하신 김용술선생의 행적을 조명 하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그 과정에서 혹여 누군가가 억불지를 소장 보관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안고 수소문해 보았다. 다행스럽게도 위 선환시인께서 창간호와 6호를 소장하고 있었고 광주에 계시는 서용주목사(송기숙작가 동기. 전계림교회, 무돌교회 담임)께서 창간호를 보관중이셨다.
특히 서목사께서 보관하셨다가 장흥중학교(교장 이 영송)에 기증한 창간호는 보관 상태가 거의 완전 하여 그 사본을 넘기고 읽으면서 수없이 많은 이야기가 기억 되어 지는 것이었다.
단기4288년 8월31일(서기1955년)에 간행된 창간호의 표지는 컬러였다. 그 시대에 컬러 표지를 채택 한것도 놀라웠거니와  억불 산 그림과 제호의 서체가 지금의 시대에 평가해도 그 디자인이 수준 있어 보였다. 서지 사항을 보니 억불지 창간호는 광주시에 소재한 ‘주식회사 동아사’에서 인쇄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편집자는 장흥중고등학교 학예반 발행처는 학도호국단이었다.
77쪽 분량의 억불 창간호에는 중고등학교의 연혁 은사 프로필 등이 수록되어 있어서 당시의 학교 사정을 추억하게 해주었다. 무엇보다 10년 안팎의 선배들중 어느 이름들이 작품을 게재 하였는가가 궁금 하였다.
우선 눈에 들어오는 이름이 송기숙 ‘물 쌈’이라는 창작 소설,그리고 위선환의 시‘시골’이옥교(장흥군청재직,작고)의 시 ‘고독’ 위자형의 산문은 영문 제목으로 ‘THE NEW WAY’였다. 송기숙, 위선환 이 두분은 이미 중견 소설가와 시인으로 그 명성이 회자 되고 있거니와 억불 창간호에 실린 이 작품들이 어쩌면 최초로 활자화된 처녀 작품일 것이다
제학생들로 구성된 편집위원 명단에도 아는 이름은 송기숙, 위선환, 이옥교였다.
당시 송기숙은 고교 3학년 위선환은 중학교 3학년쯤이었을까.
필자가 재학중 일때의 장흥중고는 남녀 공학이었고 교장은 한 분 교감은 중고에 각 한분씩 재직했던 것으로 기억되고 있으니 억불지의 편집위원도 중고 학예반(혹은 문예반)공동으로 참여한 것으로 추정된다.
창간호 이후에 김용술선생의 지도에 힘입어 문학의 열정을 형상화하여 억불지의 편집에 참여하고 최초의 창작소설을 게재한 한승원 작가의 회고에는 억불 그리고 김용술 선생에 대한 한없는 그리움과 애정이 내재되어 있다. 한승원작가는 김용술선생과 억불지가 자신을 소설가의 길로 인도한 계기였다고 술회하고 있다.
2017년 장흥문화원이 주최하는 제7회“한국문학특구포럼’에서 송기숙 작가를 조명하는 특집으로 주제를 설정하여 진행 하였다. 그 행사의 주제 발표자인 조은숙 교수(전남대학교)께서 송기숙작가와 억불지 그리고 김용술선생과의 관계를 소상하게 서술 하여 주었다.
남도의 한 지역 장흥중고의 교지와 한 분 선생님이 한국 현대문학사에서 비껴갈 수 없는 두분의 중견 소설가를 문학의 길로 인도 하였다는 사실은 오랜 이야기꺼리로 남을 수 있을것 같다.
다시 억불 창간호 발행 후 9-10년 후로 돌아와 보자.
당시 문예반 지도 교사는 황 길현 선생이었고 김용술선생은‘말본’‘고문’을 가르쳤던 것으로 기억된다.(이 기억이 맞는지 모르겠다. 50여년 세월이 흘렀으니)
문예반은 굉장히 활발해서 억불지 외에도 프린트물로 부정기적인 회지도 발간 했고 칠거리통의 ‘정원다방’에서 시낭송회를 열어서 청소년의 문학활동을 과시했다.
그 즈음에는  필자가 편집위원으로 참여 했던 억불지는 앞서 기술한바와 같이 장흥읍 동동리 골목길의 ‘장흥인쇄소’에서 발간 하였다.
칠거리에서 기양리 남동리 동동리로 이어 지는 상가와 골목은 당시 장흥읍 상권의 중심지로 5일시장과 차부(시외 버스 정류장)로 연결되고 극장과 당구장 사진관과 여관 다방과 요정이 성업하고 있었으며 법원과 검찰청은 6개군을 관활하고 있어서 유동 인구도 많았고 그러한 상가의 다방과 선술집을 기웃거리는 청소년 문학도들의 낭만도 아름답게 회상 되어 오는  것이다.
문예반이던 필자는 이런 학내외의 분위기에 편승해 열심히 습작을 하였고 교내 백일장에서 장원으로 당선되어 전교생이 모인 조회에서 상장과 상품을 받았으며 그 때 받은 상품이 모윤숙의 ‘렌의 애가’였다. 황길현 선생은 교외의 큰 문학 행사에 학생들을 참여 시키려고 많은 애를 썻다.
남도문화제, 호남예술제, 전북대학교개교기념 백일장 등에 장흥고등학교의 문예반 학생들이 참여 하였다.
그 즈음의 김용술 선생은 큰 키에 대단히 엄격한 언행으로 학생들이 어려워하였지만 유독 문예반 학생들을 격려하고 지원해 주었다.
필자가 광주시에서 개최되는 호남예술제에 대표 학생으로 참여하게 되었을때  학생의 대외  문예 활동 여비를 학교에서 지원해 주어야 한다고 발의 하여 주신 분이 김용술 선생이었다고 황길현 선생이 귀띔 해 주셨다. 학생이 학교에서 여비를 받게 되었다는 믿기지 않은 사실, 그 여비를 받기 위해서 설레고 긴장되어 서무과에 들렸더니 마주친 김용술 선생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우리 학교에서 학생 여비 주는 것이 니가 첨이다.꼭 상을 받아 와야 한다” 그 기대에 부응해서였을까. 필자는 호남예술제 백일장 시 부문 최고상을 수상 하였고 광주일보를 비롯한 지방 신문에 사진이 곁들여진 기사가 게재되기도 하였다.
김용술선생. 유난히 키가 큰 분이었다.
언행이 엄하여서 학생들이 무서워하는 분이었다. 그리고 승평(필자와 중학교 동창)이 아버지였다.
그리고 이제서야 김용술 선생께서“억불”지를 창간하신 주역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전국 최초로 회자되는 ‘문학관광기행특구’장흥의 문학, 그 문맥을 정리하여 본다면 장흥중고 교지인 억불과 김용술, 황길현 같은 의식있는 교사들의 지도에 힘입은 장흥중고 문예반 출신의 작가들이 장흥의 문학 현장과 한국문단에서의 활동과 명성으로 확인 가능할 것이다. 지금 뜻있는 장흥인들이 생각과 손속을 모아 장흥 문학의 시원과 억불 그리고 김용술선생의 행적을 조명하여 장흥문학사를 점검해 보려는 시도는 큰 의미가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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