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엔 ‘광산노씨 노자형(盧自亨,1414~1490)’도, ‘부춘리 고개(高蓋)’마을도 낯설어지고 말았는데, 그 실마리를 풀 단서는 남아있다. <왕조실록,1488년(성종19년)> 기사로 “노자형은 장흥사람(長興人)으로 나이 70세인데. 신선(神仙) 모습에 경학(經學)에 정통하였고, 성균관 대사성으로 8년간 인재를 가르쳤는데, 그가 호연(浩然)히 돌아간 데서 무릇 진신(搢紳)유생(儒生)들이 도문(都門) 밖까지 전송하니 그 수효가 얼마인지 알지 못했다”고 했다.

또 <왕조실록,1490년 노자형 졸기>에 “노자형은 성품이 경개하고, 학술이 순정한데, 그가 벼슬을 버리고 전리(田里)로 돌아가자, 관생(館生)진신(搢紳)으로 수업을 받은 자가 동쪽 교외에 나와 전송하였는데, 관개(冠蓋)가 가득하게 넘치니, 그때 사람들이 그 모습을 영화롭게 여겼다”고 했다.

한편 <정묘지>에는 ‘부산방-고개동(高蓋洞)’, ‘용계방 인물- 노자형, 노자정’이 있으며, <장흥군 마을유래지,1986>에는 “부춘리 고개(高蓋) 마을에 蘆감사 전설이 남아 있고, 높은 벼슬을 한 盧氏가 마을을 만들었다”고 했다.

이런 사정들을 합쳐보면, ‘고개(高蓋) 마을을 만든 盧氏 高官’에는 장흥 출신으로 성균관 대사성과 함경도관찰사 등을 거친 ‘노자형’이 해당될 가능성이 다분하다.(‘노자원, 노자정’ 등 다른 형제들 官歷에는 혼선이 있다),  그 집안 족보에 따르면, 노자형의 아들이 마침 고개(高蓋)에 거주하였다. 문제는 ‘고개(高蓋)’ 지명 유래인데, “산을 넘는 고개(峴,峙)” 또는 “멀리서 보면 양산 모습이다”는 풀이도 있으나, 그 한자어 그대로 ‘고관(高官)이 사용하는 일산(日傘)관개(冠蓋)’ 자체에서 유래한 것 아닐까? 미루어 짐작해보면, ‘긍재 노자형’이 중앙고관 대사성을 은퇴하면서 ‘개(蓋)’를 높이 쳐들고 고향 마을로 돌아와 은거한 데서 그런 지명이 붙은 것 아닐까? 황개(黃蓋)는 황실에서, 청개 홍개(靑蓋 紅蓋)는 왕실에서, 하얀 일산(日傘)은 수령급 이상 고관이 사용한 의장기물이다. ‘노자형’은 1450년 문과 급제, 1482년 대사성 등을 역임하며 청렴한 성품에 경학에 정통한 학관(學官)사유(師儒)로 명성이 높았다.

그 시절 장흥관련 인물로 1447년 대과급제자, ‘영광김씨 김필(1426~1473)’은 세조 대에 재출사를 하였다가 성종조에 타계하였다. 장흥 용산출신으로 ‘장흥任氏 임득창(1455~1486)’은 소과입격자로서 무과 장원급제를 하였는데, 이른 나이에 역시 타계하였다.

그런데 ‘노자형’은 고향 장흥에서 왜 그렇게 쉽게 잊혀지고 말았을까? 비록 나중에 만든 <장흥 사마재 제명록>에 소과입격자 이름이 올라있긴 하여도, 대과급제자 명부인 <국조방목>에 ’거주지 불명‘으로 처리되었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광산현 인물’로 오기되었던 데서, 또한 그 유문(遺文)이 수습되지 못한데서 그러했던 것 같다.

그 후손에 대과급제자는 다시 나오지 못했다. 그러나 앞서 소개한 <왕조실록> ‘장흥인’ 기사는 물론이지만, <정묘지>의 ‘용계방 총묘(?墓)’ 편에 ‘금장동 구사지(舊寺址) 노자형 묘소’가 기록되어 있다. 즉 용두산 아래 금장사(金臟寺) 옛 터를 말한다 (그런데 노씨 족보에는 '유치면 기역산 중등'에 있다고 했다) 현 부산면 금장리 관한 마을에는 광산노씨 재실과 사당이 있다.
17세기 초경에 고개리 盧氏 일족은 안양방 기산으로 이거를 했던 것 같다. 안양 기산에 세워진 ‘효성사’에는 ‘파조 노숭’을 비롯하여,‘노의(부친),노자원(형),노자형,노자정(제)’과 ‘광산노씨 명망가 노수신(1515~1590)’ 등 盧氏一門 7위를 모셨다.(‘옥봉 백광훈’은 ‘소재 노수신’ 선생의 진도 유배지로 찾아가 배웠다.) 장흥 출신으로 1876년경 진사입격자 ‘오당 노관(1797~1882)’이 마지막에 추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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