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서점에서 이 책, 저 책을 뒤적이다가 문학이 종교가 되어야 한다는 글을 보고 한참 생각에 빠진 적이 있다.

이제는 노인의 반열에 들어선 나이에 평생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 습작의 세월을 걸어 온 나 자신이 문학이라는 말이 멀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고 굳이 강변하고 싶다. 나는 나의 창작의 산고에 시달려야만 했던 광고와 마케팅에서, 그리고 대학교 교편생활을 통해 나의 지상(至上)을 넓히는데 분주했다.

책을 통해 만나는 세계의 문호(文豪)의 글 앞에서 천부의 재능을 부여 받은 그들의 사상과 글을 부여잡고 나의 초라한 문학관(文學觀)에 절망을 느낄 때가 얼마나 많았던가 . 간혹 자신의 지식에 회의(懷疑)를 느끼는 후배교수들에게 위대함의 목표를 조금 삭감하면 불안해 할 이유도 없고, 기죽을 일도 없다고 용기를 주었던 나 자신도 어쩌면 하루하루 목표에 바쳐지는 불안속에서 예감의 불확실에 시달려 왔던 것이 과거의 많은 시간들이었다.

문학이 종교라는 확신의 인정을 받아드릴 수 있는 지적 수준에 도달할 수 있는 지식은,  추구하는 목표에 정박할 수 있는 동력이 신앙적 순종이어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개념적 잣대의 신앙은 기독교든, 불교든 예배나 예불의 단계인 경건함이라는 복종에 갈음되는 순종이 모든 것에 우선되는 조건이다. 그렇다면 문학도 경건한 예배의 절차가 필요하다는 것에 동의를 하게 된다.

결국 문학이 경건한 예배라는 메신저를 받아드려질 때, 비로써 문학이 종교라는 엄연한 사회적 윤리의 프레임 속에서 문학의 가치가 양생되어지는 것이라고 믿는다.

문화도, 예술도, 문학의 완성도에서 인큐베이팅 될 때, 정신적인 성취의 집적(集積)을 섭렵(涉獵)할 것이다. 그러므로써, 우리 앞에 먼저 간 석학들의 위대한 족적이 이루어 낸 진리와 정의(定意)에 우리의 정신을 바칠 수 있을 것이다.

최선의 의욕이 상실되지 않도록 더 이상의 후회와 아쉬움을 소비해서는 안 되겠다.
삶의 길 위에서 요구되고 인정되는 작은 목표일망정 그것이 요구하는 지식들에 탐욕은 정당한 발전 동력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 앞에 놓여 진 창조의 명령이며, 원료가 될 것이다.

우리가 무심코 상실했던 문학이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숙성되어지는 이념이 창조의 질과 양, 그리고 품위와 크기로 성장됨으로써, 삶의 현장으로 우리의 문학적 깨우침과 지식으로 돌아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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