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그머니 다가오는 가을이 알게 모르게 우리의 의식을 사로잡는다. 가을은 9월초 숲에 찾아온 검은색 방울새일까? 아니면 그저 최초로 색이 바뀐 잎일까, 빨간 찌르레기일까, 겨울을 대비하여 화학작용을 멈춘 사탕단풍일까?

이른 아침의 서리가 무거운 듯 풀섶에 내려앉아 조을고, 여름을 이겨 낸 나뭇잎도 피곤한 듯 색깔이 변해간다. 잎은 우리가 죽으면서 소원하는 바로 그런 상태인 것처럼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단지 하나의 아름다운 상태에서 다른 아름다운 상태로 승화되는 것이다. 잎은 푸른 인생을 잃지만 다시 선정적인 색상으로 꽃핀다. 숲은 나날이 미라가 되고 자연은 더욱 육감적으로 빛나면서 조용해지듯 우리는 그 계절을 ‘가을’ 이라 부른다.
아! 가을. 네가 쌀쌀한 밤공기와 심장이 멎을 정도의 눈부시고 아름다운 잎으로 무장하고 시간 맞춰 비틀거리고 있구나.
잎들은 떨어지기 전에 움츠러들어 나무에 둘둘 말릴 것이고,
바싹 마른 씨주머니는 작은 조롱박처럼 바스락거릴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 전 눈이 부시게 밝은 파스텔 색종이같이 밀려드는 색상 때문에, 단지 그것 때문에 사람들은 내장산 설악산 금강산 동해안을 여행한다.
꿈꾸는 듯한 가을날 빛깔 고운 나무들이 즐비한 오솔길을 걷노라면 순수하고 감미롭게 쏟아지는 색채에 취해 시간과 죽음까지도 망각하게 될 것이다.
아담과 이브는 잎으로 그들의 벌거벗은 몸을 가렸다는 것을 기억하는가? 잎은 언제나 우리의 치부를 숨겨주었다.

색깔있는 잎은 어떻게 떨어질까?
잎은 나이를 먹으면서 성장호르몬인 옥신의 분비가 줄어들어 잎 꼭지 밑에 있는 세포가 분열된다. 잎 꼭지를 줄기로 반듯하게 놓여있는 두세 줄의 미세한 세포들이 물에 반응하고, 그런 다음 서로 분리되며 단 몇 줄의 목질부에만 잎 꼭지를 남겨둔다. 미풍이 불어오고 잎은 공중에 뜬다. 잎은 보이지 않는 요람에서 흔들리면서 미끄러지듯 땅을 향해 질주한다. 이 뜰 저 뜰 날다가 가고 싶은 곳 어디서나 선회한다. 땅에 못 박힌 우리는 비눗방울이나 풍선 새 등 가을의 잎처럼 날아다니는 것들을 바라보며 즐거워한다.

계절은 인생처럼 변덕스럽다는 것을 배우면서... 한편 아이들은 잎을 색종이처럼 날리며 낙엽더미에서 놀거나 부드럽게 폭신거리는 그 더미 위에서 뒹굴기를 좋아한다. 아이들에게 낙엽은 우박이나 눈송이처럼 자연이 베푸는 하나의 신기한 허구에 불과하다. 하지만 어른들과 특히 연인들에게 낙엽은 은밀한 사색의 물감이 되어준다. 결국 그렇게 잎은 떠난다. 그러나 먼저 색을 바꾸고 얼마동안 계속하여 우리들 기분을 들뜨게 한다. 그런 다음에 보도블럭을 따라 쌓인 잎 사이를 걸을 때면 발밑에서 사각거린다.

비라도 오고 나면 흙투성이고 미끈대는 짙은 색 낙엽이 우리 신발에 묻어난다. 가로수 아래 밟혀있는 노란 은행잎의 상처 난 슬픈 사연이 그걸 말해준다. 그리고 촉촉한 벽토처럼 반쯤 썩은 낙엽더미는 제 몸을 헐어가며 봄까지 새싹을 보호하고 토양을 비옥하게 한다.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바로 저 유명한 시인 박인환의 시 ‘세월이 가면’ 이 노랫말로 탄생하게 된 배경이리라. 학사가수 박인희가 그 싯귀를 포크송 장르에 실어 고독을 깨무는 듯한 청아한 발성으로 적절히 풀어내는데 성공했다. 또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주세요. 낙엽이 쌓이는 날 외로운 여자가 아름다워요? 시인 고은의 ‘가을편지’ 도 음을 타 지금쯤 팔순 언니가 된 최양숙의 짙은 호소력이 먹혀 70년대 가요계의 신데렐라로 뜨게 했다.
그 뒤를 이어 최근에 와서는 상실과 체념을 애무하듯 신계행의 티켓 고혹적인 톤에 실은 ‘가을사랑’ 으로 이어진다.

역시 가을의 테마는 낙엽일수 밖에 없다. 낙엽은 그토록 분열하려는 우리의 마음까지도 둥글게 말아 맑은 영혼 속으로 쓸어가는 매력과 신비의 대상이다.
때때로 화석에서 이미 오래전 으스러진 잎의 자국을 보게 되는데, 그 윤곽은 우리에게 지구에서 사라지는 것들이 얼마나 생생하고 정교하며 약동하는가를 상기시켜준다.
올 가을도 낙엽과의 숙명적 만남은 우리들 영혼을 정화시키고 잠시나마 평화롭게 쉴 수 있도록 자연이 그려낸 고마운 선물이라면 어떨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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