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에 장흥에서 태어난 한 소년이 있었다. 그 소년의 아버지는 목탄 트럭 운전기사였다. 그 시대에 장흥에 거주 하는 일본인들의 평균적인 위세에 비해서는 낮은 계층이었다.
유,소년 시절을 장흥에서 성장한 소년은 열네살이 되던 해에 일본이 패망하자 우여곡절 끝에 일본으로 건너 갔다. 소년에게 일본은 낯선 땅이었다.
살아남기 위해서 모진 고생을 겪어야 했다. 그 힘겨운 삶의 행간에서 소년이 그리워 했던 곳은 아름다운 산하와 순박한 사람들과 조금은 대접 받고 살았던 장흥이었다. 소년이 어른이 되고 사업이 궤도에 올라 형편이 나아지자 장흥은 정말 가고 싶은 곳이었지만 한.일간은 국교가 단절되어 있어서 뜻을 이룰 수가 없었다.
1965년 6월 박정희정권때에 한.일기본조약이 체결되고 국교가 정상화 되자  이제 성인이 된 소년은 머나먼 길을 더듬어 장흥을 찾아 왔다.

그 길은 두렵고 조심스러운 귀향(?)이었다. 장흥 사람 누군가가 자신을 알아 보았을때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는 공포 그 자체였다. 국교가 정상화 되었다고는 하지만 한국민에게서 그리고 장흥인들에게 일본은 침략의 민족이며 수탈과 억압의 원수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이는 서울을 거쳐 영산포를 경유 하여 한 밤중에 장흥에 도착 하였다.

처음으로 장흥을 찾아온 1960년대를 시작으로 그이는 거의 매년 장흥을 찾아 왔고 예전의 친구들을 만나 교류 하였고 일제강점기 당시 장흥에 거주하던 일본인들과 회동 하여‘장흥회’라는 친목 단체를 만들어 정기적인 왕래를 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2000년대 경이던가. 그이가 고인이 되었고 미망인은 그이의 유언에 따라 유골 일부를 장흥의 남산공원에 수목장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이의 이름은 사사오카 도시오(笹岡 俊夫)였다.
필자는 1990년대 후반 우연한 기회에 지금은 고인이 되신 장흥읍 기양리 이장이시던 박재홍(일본 인명관대학 졸업)님의 소개로 그이를 알게 되었다.
그이와 처음 만난 곳은 칠거리의 정원다방이었다.

그 날 필자는 그이와 격렬한 설전을 벌였다. 침탈의 민족 그것도 장흥에 거주 하며 행세 하던 일본인의 장흥 방문과 그 범연한 언행이 너무나 거슬려서 감정적인 모든 단어를 동원 하여 신랄한 비난을 퍼부었다. 그이는 끝까지 필자의 비난을 들어 주었고 마지막에 이런 말을 하였다.
“김상 모두 옳은 지적이네요. 그런데요 항일, 혹은 반일 그런 감정적인 대응으로는 일본을 이기지 못합니다. 이성적이어야 해요.저는 한국민이 냉철하고 의연하게 극일 한다는 자세로 일본과의 관계를 설정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당시는 경제,산업,문화 모든 분야에서 한국은 일본에 뒤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더구나 일본의 경제 부흥은 한국전쟁과 월남전의 특수에 힘입은 바 컷기 때문에 40여년의 침탈도 분노스럽거니와 패전국에서 일약 경제 대국으로 진입한 그 배경도 한반도의 전쟁이 일조했다는 상황이 필자를 그저 감정적으로 치닫게 했다.

30여년이 흘러간 지금은 자동차, IT, 디지탈, 패션, 화장품 등 한국의 산업은 많은 분야에서 일본을  추월하고 있지만 군사, 문화, 사회적 분야에서의 진단은 일본이 우위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일본에 대한 인식은 자칫 감정적으로 치달을 때가 있다. 그리고 가끔씩 사사오카 도시오 그이가 조언했던 ‘극일’의 의미가 되새겨 지는 것 이었다.
장흥여성단체협의회가 주관하여 ‘평화의 소녀상’을 제작하여 정남진 도서관 앞 부지에 설치하고 지난 8월 14일 제막 행사를 개최 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끌려가 치욕적이고 고통스러운 삶을 감당해야 했던 그래서 결코 잊어서는 안될 우리들의 누이의 고통을 공유 하자는 것이 ‘평화의 소녀상’을 세우는 의미일 것이다. 하여 필자는 장흥의 소녀상 앞에 한 줄의 글을 보태고 싶다.
“누이여 그대의 고통과 슬픔을 잊지 않겠습니다. 우리의 극일이 언젠가는 일인들이 그대 앞에서 머리 숙여 사죄하고 참회하는 그 날이 오게 하겠습니다”
광복 73주년을 되새기며 극일의 치열한 연단으로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으로 일본을 극복하는 시대를 여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소망을 담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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