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품을 닮은 수락산 자락에는 안양면 수락리가 있다. 마을 정자나무인 느티나무가  울창하다.
그 아래 깊고 고즈넉하며 더없이 풍요로운 우리 전통 가락의 정응민선생이 소리하시던 소리 터가 있다. 한국이 자랑하는 ‘중요무형문화재 23호 가야금 산조 및 병창 기능보유자’며 오랜 세월 남원이 배출한 ‘영원한 춘향’의 현신으로 국악계 멋과 풍류를 더한 안숙선 국창이 8월18일 이곳을 찾았다.
1999년 제1회 장흥전통가무악전국제전에 초청되어 조상현 명창과 함께 장흥 실내체육관에서의 공연을 기억하시면서 장흥전통가무악전국제전이 16회를 대통령상으로 진행되다가 장흥군의 취소로 지금은 사라졌다는 소식에 망연 실색을 하시면서 하늘을 처다 보신다.
남도에 국악을 보급하던 신청이 장흥읍 남산자락에 있었고 최옥삼선생의 탄생지이며 박유전 선생의 서편제 본향 장흥의 문화예술은 이렇게 사라저가고 있다.
이번 장흥 방문은 제자인 수락리 출신 김규문씨의 초청으로 안명창의 스승인신 정권진 선생의 발자취 탐사와 내년 제자들과의 산공부 장소 답사를 겸하고 있었다.
장흥으로 귀촌한 예움가야금연구소  서혜린씨와 마을회관에서 즉석 공연으로 주민들을 위한 공연도 하셨다.

장흥신문사에서는 “청태전”을 서혜린 가야금연구소에서는 장흥산 표고를  마을주민들은 묵은지와 다시 오시라는 정을 흠뻑 선물하였다.

안숙선은 어떤 사람?

안숙선은 예인 가문의 피를 이어받았다. 대금산조 인간문화재인 강백천이 어머니의 사촌이며 판소리 인간문화재 강도근이 그의 외삼촌, 태평무 인간문화재인 강선영이 그녀의 이모다.
이로 인해 안숙선은 어려서부터 전통음악에 눈을 뜨게 되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이모인 강순금에게 가야금 풍류를 배우면서 국악에 입문한 뒤 주광덕·강도근과 같은 명창에게 판소리 여러 대목을, 또 강순금에게 가야금 산조와 병창을 배우고 각종 공연에 참가해 남원에서는 다방면에 재주가 많은 소녀 명창으로 이름을 떨쳤다.
19세에 상경해 김소희에게 판소리 〈흥보가〉와 〈춘향가〉를 배우면서 대명창 문하의 판소리 수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이어 박봉술에게서 〈적벽가〉를, 정광수에게서 〈수궁가〉를 배웠으며 정권진·성우향에게 판소리 5마당을 이수하면서 그 뒤로 〈춘향가〉 5회, 〈수궁가〉·〈적벽가〉·〈흥보가〉 각 2회, 〈심청가〉 1회 등 숱한 판소리 완창 발표회를 거뜬히 치러낼 만큼 탄탄한 실력을 갖추어갔다.
안숙선이 일반인의 주목을 끌기 시작한 것도 1986년 판소리 완창 발표회를 시작하면서부터이다. 오정숙·박동진 등만이 해낸 판소리 5마당을 이때부터 차례로 무리없이 소화해냈다.
1979년 국립창극단에 입단하면서 타고난 좋은 성음과 뛰어난 연기력으로 일약 창극 명인으로 자리잡았고 수많은 작품에서 주인공 역을 했다. 그녀는 판소리, 창극, 가야금 병창 외에도 가야금 산조, 구음시나위, 설장구 솜씨도 뛰어나다. 안숙선은 1997년 8월 16일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 산조 및 병창 예능 보유자'로 인간문화재가 되었다. 판소리 인간문화재가 아닌 가야금 병창(자신의 가야금 반주에 판소리 한 대목 또는 단가를 얹어 부르
는 것)으로 인간문화재 지정을 받은 것이다. 안숙선은 이후에도 1999년 수궁가, 2000년 적벽가, 2001년 심청가, 2003년 흥보가, 2005년 적벽가 완창 무대를 가졌고, 창무극 〈춘하추동〉 연극 〈태〉등에도 출연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했다. 그녀는 국내 무대뿐만 아니라 아시아, 북남미, 유럽 등 주요 도시를 순회공연하면서 한국의 소리를 세계에 전파했다.
1997년 안숙선은 국립창극단 단장 겸 예술감독으로 임명되었다. 1998년 용인대학교, 2000년에는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강의를 하며 후진 양성에도 힘썼다. 프랑스문화부 예술문화훈장(1998)·옥관문화훈장(1999)을 받았다.
안 국창의 고민은 오직 하나, 한국 전통음악인 국악(國樂)을 대중적으로 널리 알리는 것과 더불어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는 국제적 음악으로 성장, 발전시키는 것이다. ‘전통’에 뿌리를 두고 다변하는 ‘현대’ 사회에서 국악의 보편성과 대중성, 더 나아가 국제성을 확보하려는 그의 의지와 신념은 그래서 남다르다. 또한 단아한 체구에 온화한 미소, 폭발적인 열정이 내재한 안숙선 국창의 행보는 이 시대 작은 거인의 족적을 가늠해 보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런 안 국창의 어릴 적 별명은 ‘야발단지’, ‘야무치개’, ‘풋쐐기’다. 말수가 적고 신중한 반면 자존심이 강하고 똑똑해 섣부른 행동을 삼갔다. 거기에 톡톡 쏘아 붙이는 맵고 강단진 면까지 있어 웃어른의 귀여움을 독차지 했다. 맺고 끊음이 명확하고 국악을 배우려는 욕심이 많아 ‘샘순이’라는 별칭도 있다. 특히 1979년 국립창극단에 입단해 ‘오기 3인방’으로 불리던 시절은 국악에 대한 열정으로 더욱 빛나던 시절이다.
당시 국악계 선배인 윤문식(66) 씨는 김성녀(59) 명창을 ‘오기의 여왕’으로, 김동회(작고) 명창을 ‘오기의 황제’로, 그리고 안숙선(60) 국창을 ‘오기의 여신’으로 지칭하며 무대 열정을 독려했다. 남원 고을의 ‘애기 춘향’에서 한국의 명실상부한 ‘국악계 프리마돈나’가 되기까지 그의 다부진 성품은 자신의 방만함을 제하고 와신상담하는 가운데 국악에 더욱 몰입할 수 있도록 채근하는 기제다.

슬프지만 아름다운 기억, 희망과 절망이 그곳에 있었다.

1970년 서울로 상경한 안숙선 국창은 당시 판소리 1호 김소희 대명창의 문하생이 되어 판소리 <흥보가>와 <춘향가>를 배운다. 평소 ‘사람의 됨됨이’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김소희 대명창은 “소리만 잘 해서는 인간의 고귀한 품성을 논할 수 없다. 스스로 인격을 갖추면 음악도 저절로 완성된다”고 훈육했다. 이어 가야금산조의 명인인 박귀희 대명창의 부름을 받은 안숙선 국창은 그에게 “대중의 스타가 되려면 공인으로서 자기 자신의 투철한 정신이 없으면 안 된다”는 가르침을 받으며 혹독한 수련을 쌓는다. 무대에서 일어나는 작은 실수도 용납지 않는 스승은 국익을 선양하는 예인으로서 전통을 무시하는 행위라며 밤새도록 소리 장단을 위해 맹연습을 시켰다.
판소리의 기틀을 다지는 동시에 박봉술 명인에게는 <적벽가>를, 정광수 명인에게 <수궁가>를 배운다. 또한 정권진, 성우향 명인에게는 판소리 5바탕을 이수해 인정을 받는다. 1986년 그의 나이 37세 되던 해 판소리 5바탕을 차례로 완창 발표해 ‘소리판의 스타’, ‘국악계의 프리마돈나’로 등극한다. 지금껏 오정숙, 박동진 명창만이 해낸 판소리 5바탕을 무리 없이 소화해내 인정을 받은 것이다.
이후 그는 동남아시아 12개국과 유럽 7개국, 미국 7개 주 장기공연과 국내외 크고 작은 행사에 참여하며 국악을 알리기에 힘쓴다. 판소리 외에도 창극, 가야금 병창, 가야금 산조, 구음시나위, 설장구 솜씨를 선보이며 국악의 대중화에 앞장선다. 무대에서 다양하고 폭넓게 체득한 음악적 성향을 더욱 풍부하게 구사하며 단련된 역량으로 전국 순회공연을 다니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다 1970년 19세의 나이로 국립창극단에 들어가 서양에서 유입된 오페라와 발레, 클래식 선율의 각종 공연을 접하게 된 그는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다. 근시안적이고 편협하던 시야가 열리고, 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자존적인 전통문화를 가졌다는 것이 자부심으로 다가왔다. ‘국악이 폄하되는 일 없도록 하라’고 가르친 스승의 교훈이 무엇인지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20대 후반에 들어서야 우리 소리의 아름다움을 감지하게 되었죠. 국립창극단 대형무대에서 우리 국악의 가능성과 함께 놀라운 잠재력을 볼 수 있었어요. 우리도 오페라나 발레처럼 고유의 전통과 독특한 미학을 살려서 차별성 있게 기획하고 구성하면 전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대형작품을 개발할 수 있다는 희망을 엿봤어요.
우리 소리, 우리 가락은 독특하고 개성이 있어서 세계 다른 나라와 차별성이 있죠. 전략만 잘 세우면 세계와 경쟁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절망 끝에 무지개를 본 그는 더욱 열심히 김소희, 박귀희, 박봉술 대명창 아래 우리 것에 대한, 전통 가락에 대한 가르침을 전심으로 받들 수 있었다. “여러 스승들의 보석을 한껏 꽉 껴안은 것 같습니다”는 표현대로 안숙선 국창은 열정적으로 판소리를 사사 받는 일에 착념할 수 있었다.
“소리, 생활 속에 녹아들어야 진정한 우리 것이다”  “나이가 들면서 젊은 시절의 도도하고 콧대 높던 자존심과 국악에 대한 절의가 완만해집디다. 그전에는 환갑이나 칠순잔치에서 우리 소리를 부르라면 화들짝 놀라곤 했지요. 그런데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우리 가락과 소리가 사람들 생활 곳곳에 들어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환갑잔치든 돌잔치든 우리 소리가 필요하다면 어디든 찾아가 우리 소리를 들려주고 공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생활 곳곳에 녹아 있어야 진정으로 우리 문화를 누리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렇게 생각이 바뀐 데는 그 나름의 특별한 경험이 있다. 언젠가 떠난 해외 공연에서 생면부지의 낯선 외국인이 우리의 소리를 듣고 가슴으로 펑펑 울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음악의 진실성과 전달자의 예술혼이 빚어져 세계 어느 곳이든 우리 소리로 감동을 주고받으며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이 그에게 큰 깨달음이었다. “큰 무대, 작은 무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열 사람이든 백사람이든 우리 소리를 듣고 공감을 할 때 보람을 느낍니다.
우리 고유의 가락과 소리를 듣고 누군가가 행복해하는 것은 가슴 벅찬 감동이죠. 소리가 그 사람의 가슴을 열고 울 수 있게 한다는 것이 신비롭습니다. 소리를 통하지 않으면 어떻게 감정을 교류하며 공감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보배라고 말한 윗분들의 가르침을 체험할 수 있어 행복했어요.”
그는 이제 자신의 마음을 더 많이 비우고 노력하는 가운데 국악계의 발전을 위해 조력할 길을 찾는다. “근래에는 산행을 자주 합니다. 배우는 것이 많습니다. 인간이 자신의 능력 외에 과욕을 부리며 산다는 것이 부질없음을 깨닫게 되지요.
더 많이 과시하고 더 많이 가지려는 사람에게 산은 겸손한 마음을 줍니다. 봄이 되면 나무에서 싹이 올라옵니다. 여름에는 절정에 달하고 가을에는 풀잎이 사람을 벨정도로 검푸르게 변하며 맹렬한 기세를 드러냅니다. 그러다가 곧 낙엽으로 변해 흰 눈에 덮여 조용히 흙속에 묻힙니다. 그리곤 썩어져 다음 세대를 위한 거름이 되죠. 내 생애를 돌아봐도 젊은 시절 국악계에서 프리마돈나로 기개를 떨치다가 가을로 가는 인생의 황혼기에 마지막 열정을 태웁니다. 그러면서 좀 더 원숙한 사람이 되어 후세를 위해 거름이 되는 일을 하자고 생각합니다.”


그는 산과 계곡, 나무와 수풀이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듯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삶 속에 능력이 있는 자와 없는 자가 함께 어울려 사는 즐거움을 발견한다. 산행을 통해 체력 단련은 물론 자신을 비우고 생각을 정리하며 마음가짐을 다지게 됨을 감사하게 여긴다. “근래에는 체력이 따라주지 않아 연습을 못 할 때가 많습니다. 예전에는 하루 3,4시간 무리 없이 연습했는데 이제는 조금 피곤하면 몸에 이상이 나타납니다.
소리에 취해 푹 빠져서 연습할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아무래도 과욕은 무리인 것을 가르칩니다. 그래서 자꾸만 나 자신과 싸움을 합니다. 그래서 한 박자 느리게 가는 여유를 배우기로 했어요. 대신 가슴 속엔 열정을 품고 한국 국악계의 미래를 생각하며 후학 양성에 더욱 힘을 쏟을 생각입니다.” 그러한 그의 곁에는 건강과 예술적 성취를 항상 염려하는 남편 최상호 선생이 있다.
안숙선 국창에게 주변을 돌아보고 배려하라는 충고를 아끼지 않는 그다. “당신이 주인공을 할 때 곁에서 보조를 맞추며 당신을 빛나게 해주는 조연들에게 고마워하세요. 다른 사람을 배려해야 합니다. 좋은 역할을 받은 사람이 주변을 돌아보지 않으면 진정한 성공이 아닙니다. 남을 배려하고 끌어안지 않으면 하나가 될 수 없고 진정한 대가가 될 수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소리를 했으면 합니다. 소름이 쫙 끼쳐야 한다는 겁니다. 안 그러면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소리가 귀하고 보배인데 그 진가를 다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아쉽습니다. 좀 더 품격 있는 무대를 준비해 조명과 의상, 노래가 하나로 어우러지는 국악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우리 음악을 들어보면 가장 전통적인 양식 속에 훌륭한 정신이 깃들어 있습니다. 국악인과 관객이 서로 일치되어 풍류를 즐기며 음미할 수 있는 시대가 도래 했으면 합니다.”
안숙선 국창은 남편 최상호씨와 함께 20일 내년에 만나기를 약속하면서 소리의 혼을 장흥에 남기고 아쉬운 발길을 돌렸다.

                                 

저작권자 © 장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