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 고싸움줄당기기를 주목하는 이유

줄다리기가 2015년에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면서 이에 대한 관심이 확대되었다. 당시 한국·베트남·캄보디아·필리핀 등 아태지역 4개국 줄다리기가 공동등재될 때, 관련 국가들이 협력해서 준비한 점과 벼농사문화권의 대표적인 전통문화라는 점이 주목받았다.
유네스코 제10차 무형유산보호협약 정부간위원회(나미비아 빈트후크, 2015.11.30~12.4)에서 한국, 베트남, 캄보디아, 필리핀이 공동등재 신청한 '줄다리기'(Tugging rituals and games)를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하기로 최종 결정했다.

이와 관련해서 문화재청에서는 “위원국들이 아시아·태평양 지역 4개국이 협력하여 공동 등재로 진행한 점과 풍농을 기원하며 벼농사 문화권에서 행해진 대표적인 전통문화로서 줄다리기의 무형유산적 가치 등을 높이 평가했다.”고 설명했다.

이렇게 공동등재된 한국의 줄다리기에는 영산줄다리기(국가무형문화재 제26호) 기지시줄다리기(국가무형문화재 제75호)와 삼척기줄다리기(강원도 무형문화재), 감내게줄당기기, 의령큰줄땡기기, 남해선구줄끗기(이상 경남도 무형문화재) 등이 포함됐다.
인류무형유산 등재를 전후해서 관련 지자체와 정부에서 국제학술회의를 비롯한 각종 행사를 의욕적으로 추진했으며, 등재 이후에는 줄다리기축제의 글로벌화를 기획하고 사회적 이슈와 관련된 행사를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기지시줄다리기 홈페이지(http://www.gijisi.com/)

줄다리기가 공동등재된 이후 다른 나라 줄다리기에 대한 관심도 늘어났다. 한편 줄다리기 관련 연구를 되짚어보면 외국 줄다리기와의 비교는 공동등재 문제와 별개로 이른 시기부터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최인학, 「줄다리기에 관하여 <한일비교연구의 일고찰>」, 『한국민속학』6, 민속학회, 1973., 송화섭,「동아시아권에서 줄다리기의 발생과 전개」, 『비교민속학』38, 비교민속학회, 2009., 지춘상, 「한국과 오키나와 줄다리기의 성희성」, 『동아시아 민속학』, 민속원, 2010.
 여기에서 특기할 점은 한국 줄다리기의 구체적인 사례로 장흥 줄다리기가 거론되었다는 사실이다. 지춘상 교수는 1970년부터 장흥줄다리기 1970년 제11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장흥 보름줄다리기’라는 이름으로 출연했다.

전년도 대회에서 ‘광산고싸움’이 대통령상을 수상한 까닭에 전남에서 연이어 큰 상을 받는 게 부적절하다는 의견에 밀려 2등상인 국무총리상을 수상했지만 큰 관심을 끌었다고 한다.
이렇듯 장흥 고싸움줄당기기가 알려지면서 장흥이 줄다리기의 ‘본향’이란 말을 들을 정도로 주목을 받았다.
색다른 면모를 학계에 소개한 바 있고 지춘상, 「전남의 민속놀이에 관한 조사연구(1)-줄다리기를 중심으로-」, 『호남문화연구』5, 호남문화연구소, 1973., 지춘상, 「줄다리기와 고싸움놀이에 관한 연구」,『민속놀이와 민중의식』, 집문당, 1996.

 오키나와 줄다리기와 상세하게 비교하고 특징을 살핀 적이 있다. 지춘상, 「한국과 오키나와 줄다리기의 성희성」, 『동아시아 민속학』, 민속원, 2010.
 이처럼 장흥의 줄다리기는 비교적 이른 시기 주목받았지만, 정작 근래의 유네스코 관련 논의에서는 관심 밖에 놓여 있으며 외부에서는 그 존재마저 모르는 경우가 있다.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은 까닭에 별다른 관심을 끌지 못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장흥 고싸움줄당기기는 오래되고 특별한 무형유산이다. 글쓴이와 양기수 등이 학술조사를 하고 흩어져 있던 여러 자료들을 정리하고 분석한 뒤 단행본을 발간한 바 있다. 이경엽, 양기수, 이옥희, 『장흥고싸움줄당기기』, 장흥문화원, 2014.

 장흥 고싸움줄당기기는 고을축제의 전통을 잇고 있는 공동체놀이로서 남다른 특징을 갖고 있다. 그것을 종합적으로 검토하고 계승 방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장흥 고싸움줄당기기는 현재도 연행되고 있지만 안정적인 전승기반을 갖추고 있지 못한 까닭에 앞으로의 계승을 위해서는 새롭게 전승환경을 조성할 필요가 있다. 장흥 고싸움줄당기기를 색다르게 주목하고 지역사회의 관심을 촉구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장흥 고싸움줄당기기’란 명칭에 대해 설명해둘 필요가 있다.
장흥에서는 예전부터 ‘고쌈’ 또는 ‘고싸움’, ‘고줄쌈’, ‘고줄놀이’란 말을 사용해왔고, ‘고줄 고향 장흥’이란 표현도 써왔다. 또한 ‘줄당긴다’, ‘줄땡긴다’란 말도 사용해왔다.
이 명칭들에는 고를 갖고 싸우거나 줄을 당기며 논다는 뜻이 담겨 있다.

또한 ‘고+줄’이란 말에서 보듯이 고싸움과 줄다리기가 별개가 아니라는 의미도 담겨 있다. 널리 알려진 대로 고싸움과 줄다리기는 놀이 방식이나 원리가 다르므로 구분된다. 대표적인 사례로 광주칠석고싸움의 경우 고싸움과 줄다리기는 완전히 구분된다.

그러나 장흥에서는 두 놀이를 따로 하지 않는다. 또한 ‘고쌈’이 ‘줄당기기’의 예비 놀이에 그치지 않고 비중 있는 놀이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므로 두 놀이 중 하나만 지칭하는 것이 올바르다고 할 수 없다. 주민들 스스로 ‘고쌈한다’는 말을 자연스러워 하고 선호하며, 고싸움의 연속선상에서 줄당기기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이런 점을 두루 수용한 명칭이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다. 이전에 학계에 소개된 ‘장흥 보름줄다리기’란 말은 1970년도부터 사용되었는데, 그 명칭은 지춘상 교수의 언급에서 보듯이 당시 임의적으로 정한 것이다. 지춘상, 장흥 줄다리기의 민속학적 가치, ??學堂 ’96??, 장흥학당, 1997. “출연할 당시 줄다리기 제목을 정하는데 장흥줄다리기로 할 것이냐, 아니면 다른 걸로 할 것인가 의논하다가 ‘노인들이 보름날 줄다리기를 한다고 하므로 장흥보름줄다리기로 하는 것이 좋겠다’ 하는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들어 장흥보름줄다리기라는 이름을 갖고 나갔다.”
그러므로 다소 혼란이 있을 수 있으나 실상을 반영한 명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름 자체가 다른 지역과 다른 특징을 담고 있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두루 고려하고 주민들이 선호하는 명명을 하고자 2014년에 장흥문화원이 마련한 간담회에서 ①지역 특색을 살린 명칭, ②다른 지역과 변별되는 브랜드화된 명칭, ③어감을 고려한 명칭 등의 기준을 마련하고 의견을 나눈 끝에 ‘장흥 고싸움줄당기기’란 이름을 선택하기로 했다.
 
●장흥 고싸움줄당기기의 진행 과정

근래의 고싸움줄당기기는 ‘장흥 군민의 날 및 보림문화제’의 일환으로 실시되고 있다. 1930년대 후반 이후로 한동안 중단되었다가 1970년도에 재현되었다.
그해 4월 15일에 예양강변에서 열린 ‘제1회 보림문화제’에서 30여년 만에 재현된 후, 같은 해 7월에 광주에서 열린 제11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전남대표로 출연했다. 이후 한동안 격년제로 실시되다가 2017년에는 6년만에 재현되었다.
이렇듯 요즘의 고싸움줄당기기는 간헐적으로 ‘형식적으로 재현’되고 있지만, 1930년대까지는 매년 정월에 성대하게 펼쳐지던 고을축제 자체였다.

 중앙의 예양강(탐진강)을 경계로 동교 아래 쪽 모래사장에서 서쪽의 부내면과 동쪽의 부동면을 중심으로 인근 지역까지 망라한 고싸움줄당기기가 펼쳐졌다.
과거 장흥읍 일원에서 전승되던 고싸움줄당기기는 전통적으로 고을의 읍치(邑治)에서 이루어지던 고을형 줄굿에 속한다. 장흥 고싸움줄당기기의 편 구성은, 조선시대 읍치의 상황과 연관돼 있다. 탐진강(예양강)을 경계로 서부편(남외 교촌, 충렬)과 동부편(행원리 신산리)으로 나뉘어서 줄다리기를 했으며, 인근 지역민까지 합세해 수천, 수만 명에 이른다.’고 할 정도로 큰 규모를 자랑했는데, 지춘상(1973), 87~88쪽. 이와 같은 편 구성은 방위 개념만이 아니라 치소의 전통과 관련돼 있었다. 이 구도는 20세기 행정구역 개편 후에도 부내면(장흥면)과 부동면 간의 대결로 이어졌으며, 이전 시기와 마찬가지로 인근 지역 주민들까지 합세해서 대규모로 펼쳐졌다.
 1970년4월15일 제1회 보림문화제에서 재현된 고싸움줄당기기.(강수의, 사진으로 본 장흥 100년사에서 전재)

장흥 고싸움줄당기기는 읍치의 고을축제에 기반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규모가 남달랐다. 놀이과정을 상세하게 설명한 지춘상 교수의 글에서 보듯이 참여인원과 구경꾼들이 수천, 수만 명에 이른다고 할 정도로 규모를 자랑했다. 지춘상(1973), 88~95쪽. 장흥의 줄은 고머리 부분이 특이하며 고를 화려하게 장식하는 것이 특징이다. 줄이 완성되면 4~5m길이의 멜대 7~8개를 묶고 거기에 세로로 나무를 세워 층층이 수십 개의 청사초롱을 매단다. 그리고 고머리가 처지지 않게 하기 위해 45도 각도로 세워 밧줄로 묶어 놓는다. 줄을 메고 행진할 때에는 토반에 해당하는 한량과 기생들이 줄 위에 올라타서 줄다리기 설소리를 하고 춤을 춘다.

과거에는 장흥현 관아의 동헌(東軒) 뜰에 들어가서 인사를 한 뒤 예양강변으로 이동해서 본격적인 놀이를 펼쳤다. 재현 이후에도 이런 방식이 이어져서 거리 행진을 한 뒤 줄판에 도착하면 군수를 비롯한 기관장을 태운다.

예양강변 모래판에 이르러 분위기가 고조되면 청사초롱 장식을 해체하고, 장정 10여 명이 웃옷을 벗어젖힌 후 줄 위에 올라타서 기세를 돋우며 ‘고쌈’을 하게 된다.
줄 위의 지휘자가 “밀어라”하는 명령을 내리면 줄을 멘 사람들이 일제히 멜대를 두 어깨로 떠받치면서 돌진해서 상대방의 고에 부딪친다. 고가 맞닿으면 줄 위에 탄 장정들이 상대방의 고를 누르고 또 땅 위로 밀어 떨어트리려 한다.

광주칠석고싸움과 달리 고머리에 대나무를 넣지 않고 ‘굉갯대’도 없이 장정들이 어깨로 떠받치고, 앞사람이 땅에 떨어지면 뒷사람이 고를 받치고 또 그 뒷사람이 계속적으로 올라타기 때문에 수십 명의 장정들이 엉켜 혈전을 벌인다. 상대방의 고머리를 누르고 또 줄을 땅에 닿게 하면 승부가 끝나는데 그 경기 방법이 대단히 치열하고 격렬하다.

고싸움이 끝난 뒤에는 줄에 달린 멜대를 제거하고 줄당기기를 한다. 고싸움에서 진편이 양 어깨에 줄을 메고 전진, 후진을 거듭하면서 응전을 촉구하고, 서로 어우러지면 양 쪽 고머리를 댔다 떼었다를 반복한다. 그리고 줄을 결합한 뒤 줄당기기를 하는데 한쪽에서 끌려갈 경우 지휘자가 “깔아라”는 호령을 내리면 일제히 줄을 깔고 앉는다. 그러면 양편이 모두 줄 위에 앉아서 어깨로 상대의 몸을 밀쳐내는 ‘밀치기’를 한다.

이렇듯 자기편이 유리하면 당기고 불리하면 깔기와 밀치기를 계속하니 쉽사리 승부가 나지 않는다. 요즘에는 시간을 정해 줄당기기를 하기 때문에 깔기를 하지 않고 승부를 겨루지만 예전에는 깔고 밀치기를 거듭하며 몇 날을 끌었다고 한다.

줄당기기의 결과 서편이 이겨야 풍년든다고 하지만 이에 구애되지 않고 서로 이기려고 격렬하게 대결한다. 승부가 가려진 뒤 과거에는 거름으로 쓰기 위해 줄을 가져가기도 했으나 재현 이후에는 보관해두었다가 이듬해 보수해서 사용하고 있다.  

이상에서 본 대로 장흥 고싸움줄당기기는 격렬하고 시끌벅적한 집단놀이의 전형을 보여준다.
물론 그 강도가 과거보다 약해지고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고 있다.
본래 정월 대보름 무렵에 하던 세시풍속놀이지만, 재현 이후에는 군민의 날에 열리는 보림문화제의 일환으로 전승되고 있다.
자발적으로 조직화해서 연행하던 공동체 민속이 행사화 돼서 전승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장흥도 여느 농촌지역과 다를 바 없이 젊은 인력이 많지 않아 인원 동원과 고줄 제작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하지만 고싸움줄당기기에 대한 주민들의 자부심이 대단하고 계승 의지도 강한 편이다.
예전에 비해 전체적인 분위기가 위축되었지만 현행되는 전통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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