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장흥동학농민혁명에 대해 무엇을 기억해야 할 것인지, 차별화된 장흥동학농민혁명 특성을 학계에 알려 교과서에 수록하고 경쟁력 있는 문화상품으로 개발되기를 기대한다.

■ 동학농민혁명 최후 혈전
장흥 동학농민군은 1894년 12월 4일 벽사역 점령, 12월 5일 장흥읍성 점령, 12월 7일 강진현 점령, 12월 10일 전라병영 점령에 이어 12월 12일~12월 15일 장흥석대들 전투는 잔혹한 최후를 맞이했다.
장흥농민군은 1,500명이상이 죽었으며, 수성군 역시 장흥부사 이하 부민 500명이 사망하고 관민가(官民家) 3,700호가 불탔다. 이와 같은 참혹한 결과를 초래한 것은 11월 하순 장흥 동학농민군이 장흥. 강진을 점령한 뒤 영암을 거쳐 나주를 공격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장흥농민군은 승승장구하던 12월 초순,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농민군지도자들이 차례로 체포되거나 살해되었고 주력부대 역시 속속 해산하여 장흥지역 농민군은 급속히 고립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반면에 일본군 미나미 대장이 총지휘하는 연합군은 원래 작전대로 전라도 서남부농민군을 장흥지역으로 집결하게하고 12월 10일 나주성에 입성하면서 장흥으로 회군한 농민군은 해산하던지 최후의 결사항전 하던지 양자택일 해야만 하게 하였다.

■ 벽사역 점령
고부민란 진압차 안핵사로 파견된 장흥부사 이용태가 인솔한 벽사역졸 800여명의 횡포가 있었기에 11월 7일경 지원 파견된 김방서 부대 1천여 명 동학농민군들이 12월 4일 오전8시에 벽사역을 공격해 관아와 일부 민가를 불 태웠다.
벽사역 찰방 김일원은 가족과 함께 장흥읍성으로 피신하였으며 벽사역이 불타는 것을 보고 전라병영으로 달려가 구원 요청하였다.

■ 장흥읍성(장녕성) 점령
12월 5일 새벽 장흥읍성 북문에서 대포소리를 신호로 이사경부대가 북문을 넘어 장흥읍성으로 들어왔고, 뒤이어 남문과 동문이 열리면서 동학농민군들이 물밀듯이 성안으로 쳐들어왔다.
끝까지 장흥읍성을 지킨 장흥부사 박헌양, 기실 박영수, 수성별장 임기남, 수성통장 주두옥을 포함하여 96명 수성장졸과 민간인이 희생되였으며, 장흥읍성은 농민군에 의해 철저히 점령되었다.

■ 장흥석대들 전투
12월 12일에는 소모관(召募官) 백낙중(白樂中) 등이 이끄는 경군(京軍)이 장흥도호부에 도착하여 장흥지역 농민군과 최초로 전투를 벌였으며 12월13일 일본군 제19대대 제1중대, 제2중대의 지대(枝隊)와 일본군 제18대대 시라카(백목:白木)중위가 지휘하는 교도중대와 연합하여 세 방면에서 진격하여 12월 13일 일본군과 경군(京軍)이 동학농민군들을 공격하여 농민군 시체가 산을 이루었다고 한다.
(출처: 일본방위청 방위연구도서관 소장 “전사편찬준비서류(58)동학당상황”)
장흥석대들 전투는 1894년 11월 11일 공주 우금치에서 패한 동학농민군, 이방언을 중심으로 한 장흥지역 동학농민군과 전남지방 동학농민군 3만 여명이 장흥석대들에 집결하여 12월14일~12월 15일 수성군과 일본군에 대항하여 벌인 전투였다. 그 주력부대는 이방언지도자가 이끄는 동학농민군 이였다.
12월 15일 이진호(李軫鎬)가 이끄는 관군 교도중대와 일본군 제19대대본부 및 제3중대가 장흥석대들에서 농민군 약 3만 여명과 전투를 벌여 농민군 수백여명이 희생당하고 나머지 농민군은 자울재를 넘어 퇴각하였으며 농민군은 일본군 신식무기 위력 앞에 굴복하고 동학농민군의 대일전쟁은 끝났다.
일본군 후비보병 제19대대장 미나미 고시로(남소서랑:南小西郞)는 장흥강진전투이후 ‘동학농민군을 많이 죽이는 방침’을 취하는 이유는 ‘소관(小官,미나미 고시로) 한 사람만의 생각으로 한 것이 아니라, 훗날에 제기할 가능성을 제거하기위해 다소 살벌하다는 느낌을 살지라도, 그렇게 하라는 공사(公使, 이노우에카오리)의 명령이 있어 장흥석대들 전투 이후 1895년 1월 11일까지 장흥일대에서는 또 다른 피의 살육전이 벌어졌다.

■ 장흥 석대들 전투 성격
1894년 11월11일 공주 우금치 전투가 좌절된 이후 관군과 일본군 공격을 받고 대부분 흩어져 남쪽으로 후퇴하던 12월 10일 관군과 일본군에 쫓겨 장흥으로 밀려 내려오던 농민군들이 장흥읍성과 전라병영, 벽사역, 강진현을 점령한 최후의 전승지이였다.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일반 인식은 1894년 1월 10일 고부봉기에서 시작되어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패함으로써 동학농민혁명이 끝났다고 역사교과서에 기록하고 있으나 장흥석대들 전투는 언급된바 없다.
그래서, 다른 어느 지역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의(義)와 충(忠)이 공존하는 장흥 동학농민혁명은 관군 측과 농민군 측의 입장에서 조명하는 서로 달리하는 상반된 가치관을 교과서에 꼭 수록해야 한다.

■ 장흥동학농민군 위령탑 건립 검토
장흥동학농민유적지 가운데 무명 농민군 1,165명이 묻힌 곳에 장흥 실내체육관이 자리하고 있어 그 흔적을 찾을 수 없으나 이름도 없이 쓰러져 간 농민군의 영혼과 넋을 위로하고 추모하는 장흥동학농민군위령탑 건립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또한 1,200여명 농민군 원래묘역 터(현재 장흥실내체육관 옆 (구)장흥공동묘지) 를 확인할 수 있는 표석이나 안내판을 장흥실내체육관 주변에 설치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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