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은 전남 서남권을 관장했던 부사고을로서 1938년까지 장흥신청이 존재하여 「서편제 소리 본향」으로「소설 서편제」와「영화 서편제」는 국악 저변확대에 획기적으로 크게 기여하였다. 그래서「장흥신청」복원 당위성을 정리한다.

■ 장흥 신청(神廳)출신 국악인?
1919년 개설된 장흥신청에서 신재효(申在孝)의 족제(族弟:같은 집안의 아우 뻘 되는 남자) 신평재(申平在), 신홍재(申洪在)와 주화봉(周和奉)이 국악사범으로 활약하였다. 신홍재는 전국명창대회 판소리 가야금 부문에서 특상을 받았을 만큼 실력이 있는데 교육방법이 대단히 엄격하였다고 한다.
국악을 배우려는 국악인들은 새벽에 일어나 신주(神主)에게 배례하고 오전 내내 시가(詩歌) 연습 오후에는 판소리, 춤, 가야금, 양금을 익히고 밤에는 국악강연과 독서로 일과를 정하여 교육하였다.
장흥신청 출신의 국악인들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조선말엽 명창 김채만(金采萬,화순출신)과 김녹주(金綠珠), 최옥삼(가야금), 김병(피리), 김막동, 성명수, 선동진, 박옥화 등이며 그다음 세대는 유영애(일명 유앵),성화춘, 성봉수, 김영자, 강홍도, 최은주 등이다.
 한편, 신평재(申平在),신홍재(申洪在)형제는 남도창(南道唱)계발에 일익을 담당하였으며, 장흥신청 후인으로 경향각지에서 활동하고 있는 명창들이 국악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최옥삼(1903-1956)은 장흥읍 괘야리1길14(구지번:건산4구 518번지 -현재 주택개량신축 중)에서 태어나 13세 때 영암에 살고 있는 가야금산조 명인 김창조 제자가 되어 수업을 한지 3년 만에 스승이 세상을 떠나자, 고향으로 돌아와 피눈물 나게 연마 하여 1921년 전국명창대회에서 우승하고 장흥신청에서 젊은이들에게 대금을 가르쳤다.
가야금에 심취하던 최옥삼은 일제식민치하 정책으로 장흥신청이 없어지자, 함경도 원산음악양성소 사범으로 거취를 옮겼다. 그 이후 한국전쟁으로 남북이 분단되어 잊혀진 인물로 치부되었지만 그 당시 북한에서 최옥삼과 같이 활동하다가 1.4후퇴 때 월남했던 전황(한국국악협회이사장)의 증언에 의하면 최옥삼은 세계적인 무용가 최승희 반주자와 작곡자로 활동하면서 그 명성을 떨쳤다고 말했다. 2000년 11월 「제2회 장흥가무악전국제전」에 참여한 연변 국악인들은 최옥삼 존재를 신격화하다시피 하였으며, 북한방문길에는 그의 무덤을 빠짐없이 순례하고 묘비명을 외우고 있을 정도였다.
최옥삼은 북한에서 가야금 산조 중 가장 짜임이 좋고 높은 예술성을 지녔다는 옥산류 가야금 명인으로 그 명예를 지키며 살았던 것 같다.

■「서편제」란?
판소리는 흔히들 동편제, 서편제, 중고제로 나뉘어 구분하고 있다.
그 중에서 서편제는 판소리의 전형인 것 같이 대중화되고 있다.
 우리 장흥이 자랑하는 소설가 이청준 선생께서 소설 서편제를 통하여 자신의 유년 기억과 고향의 한스러움을 표현하였으며, 임권택 감독의 영화 서편제는 한국 영화사상 역대 최다 관객을 동원하였음은 물론, 국악의 저변확대에 획기적으로 크게 기여 하였다.
 장흥출신 국악인은 유영애(광주시립국악단장), 김규문(전.국립극장진흥회장), 강행복(정읍국악단), 이영애((사)낙안읍성 가야금병창보존회 이사장), 이현미(전남도립국악단), 문효심(서울판소리 대통령상 수상), 김효정, 이미리 등이 향맥을 이어가고 있다. 지금 장흥국악은 쇠잔한 편이나 명맥이 끊긴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장흥전통가무악전국제전이 전국 명성있는 국악제전으로 발돋음 하다가 16회를 끝으로 막을 내려 가슴아픈 사연으로 남는다.

■ 서편제 본향은 장흥이었다.
조선시대 장흥도호부 판소리는 물론 전통국악이며 온갖 민속예술을 전수하고 교육하는 장흥신청이 있었다.
따라서 남도소리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판소리에 대한 전수나 교육 열기는 대단하였다.
서편제 창시자 박유전은 장흥땅 웅치면 강산마을에서 여생을 마감할 때까지 많은 제자가 있었는데 그중 장흥 안양면 신촌리 출신 정재근은 흥선대원군으로부터 홍패를 받았던 판소리의 명인이었으며 정재근의 창법을 이어받은 조카 정응민은 정권진의 아버지로 순수한 서편제의 맥을 이어오면서 20~30명의 문하생을 배출하였다.
그런 연유로 서편제 뿌리는 장흥이고, 그래서 장흥이 서편제 원류라고 하며 또한, 판소리 서편제의 뿌리와 동기는 바로 남도국악의 산실인 장흥신청이었다.

■ 장흥신청 복원되어야 한다.
한국의 전통음악에서 가장 많은 역사성을 가지고 있는 집단은 무(巫)를 수행하는 무인(巫人)들의 조직체로서 신청(神廳)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집단이었다.
신청후인들은 한국근대음악사에서 민간음악을 성장시키고 발전시키는 역할을 충분히 수행했다.
조선시대 성숙청(星宿廳)에 국무(國巫)를 두어 “국가기관으로서 8도 으뜸되는 읍에 이르기까지 모두 신청출신의 관선(官選) 무(巫)가 주관하는 제사(산신제)를 수행하였다.
남들은 없는 것도 만들어 내는 세상이다. 장흥신청이 1938년까지 이어오면서 장흥신청 후인들은 현제까지 그 향맥을 이어오고 있으며 국악발전에 많은 기여해왔음에도 남도국악 명소가 되지 못하고 있다.
이제라도 우리가 장흥신청이 있었던 주변에 가칭「정남진 장흥 전통예술 전수관」으로 복원하여 장흥국악발전을 위한 토대를 만들고 장흥문화의 줄기를 더욱 튼튼히 할 수 있는 소중한 장흥의 문화상품으로 재탄생시켜야한다.
장흥신청을 복원 하지 않는다면 우리 모두는 역사 앞에 장흥의 소중한  또 하나의 문화유산을 없애버리는 죄인이 아닌 죄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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