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하는 말
사실 이글을 쓰게 된 것은 이순신장군 수군재건로 현장상황 설명과 구현(具現)에 있어서 그 답사안내자의 특정지역에 편향된 사실판단이 많았고, 사업주관자(연구자)의 개인적 판단만으로 역사적 사실인양 재구성하여 그 현장답사를 하는 내내 마음이 너무 불편하였기 때문이다. 객관적으로 확인이 안된 자료를 사용하여 너무 많은 추정과 억지가 난무 하였다. 사실 몇 번에 걸쳐서 전남도 관광과에 건의를 하였으나 묵살되었고, 사업주관자의 오류를 수정할 의사도 없이 지역이기주의에 편승하여 그 사업은 일방적으로 추진되었다. 그런 연유로 장흥 지역은 소외되고 말아 지역민 자긍심에 큰 상처를 입혔다.

저자는 어떤 지역에 관련한 글을 쓸 때는 그 지역사정에 밝은 사람이 그 향토적인 속살을 바르게 정리(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늘 가지고 있다. 그 지역 일은 그 지역 사람이 나름 잘 알고 체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외지에 거주하는 다른 사람이 쓸 때는 현지 제보자의 감수를 받는 등으로 현지실정에 필히 유념하여야 한다. 그저 귀동냥 수준에서 넘겨짚어 들어 옮기다 보면 큰 착오가 생기고 전혀 엉뚱한 일들이 벌어지곤 한다. 우리나라 국토지리원의 지도도 그중 하나다. 직접 조사를 하였다고는 하나, 그저 듣고 받아 적다 보니 적은 뜸들의 명칭이 바뀌고 잘못 적은 소리글이 많다. 물론 그 지역 사람들 역시 역사적 사실과 기록을 객관적으로 꼼꼼하게 확인 검증하는 절차에 각별 노력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자기 출신 지역을 두드러지게 하려는 아전인수격 해석의 위험성이 늘 있기 때문이다.

●현장을 가다
현장은 ‘팩트(fact)’여야 한다. 역사적 현장은 더욱 그러하다. 허나 현실은 현장에서 ‘스토리텔링’이라는 해괴한 일이 덧칠해져 전혀 다른 이야기가 구성된다. 향토사에 관한 새로운 창작설을 내세우며 역사적 현장을 비틀어 버리고 오로지 지역관광 마케팅에 몰두하는 엉뚱한 결과를 낳고 만다. 우리들은 평소에도 여러 통로를 통하여 이런저런 역사적 현장을 접하면서 역사적 체험을 하게 되는데, 종종 우리가 찾게된 역사현장이라는 게 그 출발이 되는 재료 선택에서부터 오로지 ‘사업을 위한 사업’으로 변질된 현장이 많아 그 실망이 이만저만 큰 경우가 많다.
역사적 현장을 ‘처음 그대로 복원’은 못하더라도 그 실체에 가까이 접근은 해야 하는데, 그 사업주관자가 취사선택하는 재료부터 바뀌거나 부실하여 전혀 다른 상황과 결과를 연출하는 것을 우리는 여러 번 보아왔다. 지정문화재 선정사례도 그러한 경우에 해당한다. 담장복원을 빙자하지만 그 결과는 원형복원이 아닌 새로운 창작토건이 탄생하고 만다. 그 꾸며진 설치 예술품(?) 창작과 토건 작업으로 덧칠해진 역사적 현장은 역사적 진실에 관한 우리들의 건강한 상상의 나래를 온통 빼앗아 버린다. 왜? 라는 의구심을 봉쇄해 버리면 그 역사는 존재의 의미가 없다.

실제로 존재하는 자체의 전후 사정을 그대로 살필 줄 알아야하고 과거와 끊임없는 대화를 하며 그 의구심 해결을 위하여 긴 시간여행을 해야만 하는데, 이때는 필히 그 당대 시대의 역사적 재료나 자료를 먼저 찾아야 한다. 그 자료를 꼼꼼하게 챙겨 부실한 덧칠 왜곡을 막아야 한다. 먼저 사용된 재료나 자료도 다시 확인하여야 하며, 그 결과를 글로 옮길 때도 그 출처와 근거를 병기해야 한다. 팩트(fact)와 논픽션의 한계지점에서 그 출처를 감추어버리고서 또는 왜곡하고서 마치 그것이 팩트(fact)의 전부인양 꾸며대는 것은 결코 옳은 일이 아니다. 특히 그저 귀동냥 수준으로 들어 베껴 옮기는 것은 연구자 또는 학자의 자세가 아니다.

 1) 보성 조양창
이순신 장군은 정유년 8월13일자 <난중일기>에 보성 양산항(梁山沆) 집에 묵었는데, 거제현령과 발포만호가 와서 다녀갔고, 수사 배설과 여러 장수와 피난을 나온 사람들이 묵고 있는 곳(장흥 회령진)을 알았다고 적고 있다. 지난달 7월22일 노량에서 배설을 만나서 원균의 패망을 들은 후 헤어져서 소식을 몰랐는데, 다시 배설의 소식을 알았다는 것이다.
혹자들은 7월22일 이후 이순신 장군과 배설이 서로 연락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며, 이순신이 배설에게 회령진으로 모일 것을 지시하였다고 마치 실제로 본 것처럼 주장하나, 앞서 <난중일기>는 “비로소 배설이 묵고 있는 곳을 알았다”고 기록 하였으니, <난중일기> 쪽이 정답 아닌가? 또 뒤에 자세하게 언급하겠지만, 이항복의 <백사집(白沙集), 고(故)통제사이공유사(統制使李公遺事)>에 나오는 “단기치도 회령포(單騎馳到 會?浦)” 문구에 “도우(道遇: 우연히 만남)”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배설의 소식을 이때 비로소 듣기 까지는 그 행방을 몰랐다는 것이 정답일 것이다. 이후 8월18일 아침까지 보성에서 머문 사이 회령진에 먼저 사람을 시켜 보내 배설에게 배를 군영구미로 보낼 것을 지시한 것으로 짐작해 볼 수 있다.

 2) 보성 열선루
장군은 정유년 8월15일 비가 왔고 식후 늦게 열선루로 나가 선전관 박천봉이 가져온 유지(諭旨: 8월7일 작성)를 받아서 보고 바로 장계를 작성 하였다. 날이 개어 하얀 달이 다락 위를 비추니 심회가 편치 못하였다고 적었다.
수군재건로 전문가로 자처한 노기욱(전 전남대 이순신연구소 연구원: 현 무안군 문화원 사무국장)은 장군의 편치 못한 심회가 수군폐지론의 유지(諭旨) 때문이라 주장한다. 그리고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전선이 있습니다.』 라는 장계(狀啓)를 8월15일 열선루에서 올렸다고 주장한다. 어불성설이다. 회령진(장흥 회진)에 모인 배가 10여척이라고 이순신장군의 조카 이분(李芬)이 쓴 <이충무공행록>이 전한다. (※유성룡의 <징비록>에는 ‘벽파해전 이전 전선10여척’ 수습. ※이항복의 <백사집, 이충무공유사>에는 ‘회령진에 전선8척’으로 기록.) 이순신 장군이 아직 제대로 확인도 못한 전선집결 상황을 미리 알고 조정에 보고했다고 우기면서 보성 쪽 사람들은 “금신전선 상유12(今臣戰船尙有十二)”를 오석에 병풍처럼 써서 치장 설치하였고, 보성군청 뒤편 방진관(‘방진’은 이순신 장군의 장인인데, 임진정유난 당시에 현직 군수 직에 있었던 것도 아니다)에 그림과 함께 설명까지 친절히 하고 있다.

그날 답사현장에 설명을 나온 이수경 선생(전남대 문화유산연구소 선임연구원)은 “역사는 가정을 찾아 증명하는 것”이라 한다. 기가 막힌다. 역사는 왜?(의문)를 찾아서 자료와 사실에 부합한 추론은 해야겠지만, 이미 설정해놓은 가정에 꿰맞추기 하면 안되는 것 아닌가.
전남대 호남학연구원 이병혁 박사는 『정유년 여름의 기억』에서 12척의 소속을 사실에 근거하여 정리하였다. 공초에 답한 ‘김완’의 초사에 “칠천량 해전 당일에 남도포만호 강응표, 회령포만호 민정붕, 조라포만호 정공청, 해남대장, 강진대장, 사도첨사 김익귀가 먼 바다로 도주하였다”고 적고 있고.

그 해 11월에는 조선 조정에서 이순신의 명랑해전에서 전과를 명나라제독 총병부에 통보한 기록에는 “전선13척, 조탐선32척을 수습하였다”고 적고 있다. 그러면서 12척 내역에 대하여 “경상우수사본영선1척, 옥포만호선1척, 영등포만호선1척, 거제선1척, 조라포만호선1척이고, 전라좌수영 소속은 녹도선1척, 사도선1척, 전라우수영 소속은 남도포1척, 해남선1척, 강진선1척, 회령포만호선1척” 등으로 파악하였다. 그렇다면 조카 이분(李芬)은 왜 회령진에 모인 전선을 10여척이라 했을까? 라는 추가적 의문이 생긴다. 또한 도망 나온 선박들은 다 회령포에 집결해 있었을까?라는 의문이 생긴다. 그러나 아니다. 즉 모른다. 심지어 8척 운운한 자료도 있다. 이에 관련하여 ‘남도포 1척, 강진선, 해남선’은 회령포가 아닌 본영에 가 있을 수도 있었던 것은 아닐까?라고 정리할 수 있고, 명나라에 통보한 13척은 가리포첨사로 있던 김억추선 1척을 더한 것 같다.(‘김억추’에 대해 이순신장군은 만호에 적합한 인물인데 우수사가 되었다고 못 마땅해 했다) 당시 사정이 이러할진데 아직 확인이 안된 12척의 상황을 이순신장군이 미리 정확하게 알고서, 즉 “금신전선 상유십이(今臣戰船尙有十二)”의 장계를 보성 열선루에서 먼저 올렸다고 함부로 주장하여서는 아니 된다.

●군영구미
비가 내리다그치다를 반복하는 사이에 그날 답사단 일행은 ‘회천면 군학’에 도착하였다. 여기에서도 관광홍보용 병풍석 오석의 위용과 <수군재건로 표지판 안내도>는 빛났다. ‘선창(船艙,군영구미)’의 위치도 제대로 확인되지 못하고, 그 증거가 불충분한 해변가 시설물 설치에 헛웃음이 났다. ‘군영구미’가 ‘군학’ 지명표기에 맞다는 그런 설명을 붙여 놓았다하더라도 그렇게 그곳에 역사적 사실을 재현했다는 ‘군학리 현장’이 실제의 역사적 현장을 가늠할 수 있는 선창(船艙)포구(浦口) 장소에 전혀 부합되지 아니했기 때문이다.

국민의 세금인 예산을 이렇게 함부로 남용하여 이런 곳을 역사 현장이라고 우기고 있는 현상이 너무 서글프고 화가 났다. 그리고 여러 생각으로 착잡했다. 이순신 장군이 배설에게 전선을 보내라고 하였는데 배설은 보내지 아니한 사실이 기억나서 착잡했고,  장흥 회령포 통제사취임식 현장에서의 이순신장군과 배설의 반목, 김억추 장군에 대한 이순신 장군의 비하 발언은 이미 예견된 상황으로 당시 조정에서 자초하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칠천량 패전 후 이순신 장군이 삼도수군통제사에 다시 제수될 때 원래대로 종2품을 내려야 하는데, 선조는 경상우수사 배설과 전라우수사 김억추와 같은 종3품 품계로 삼도수군통제사에 제수하여 그 분란을 초래하였던 것이다. 배설이 도망가서 이듬해에 잡혀 권율에게 참형 당했음에도 전쟁이 끝난 후 배설이 공신 책록이 되는 웃지 못 할 코미디는 왜 발생하였을까? 라는 부질없는 생각에 혼자 쓴웃음을 지었다. 보성군 회천면 전일리 군학마을은 장흥군에 접경한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그때서야 보성 땅이 된 지역이다. 원래는 장흥부 직할인 회령방과 천포방이 합해져 회천면이 되면서 웅치면과 같이 1914년에야 보성군에 합해진 지역이다. 1914년 이전에 조선시대 내내 장흥 땅이라는 말이다.

회천면 역사는 조선시대 에 오롯이 장흥에 속해 있었다. ‘첫 회령포진(鎭),보성군 회천면)의 처음 설치는 1422년(세종4년) 11월 왜구의 침입에 대한 대응책으로 주포(장흥군 회진면)와 회령포를 관할하는 본영의 군선 2척과 전라 좌,우도의 군선 각 1척씩을 차출하여 첫 회령포에 정박시켜 둠으로써 급박한 참변에 대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가 시행된 3년 후인 1425년에 전라도 감사는 회령포 만호병선이 머무르고 있는 소마포(召麻浦)는 조수가 물러가면 물이 얕아져서 배를 움직이기가 용이하지 못하니, ’땅이 비옥하고 왜구가 처음 침입한 주포(장흥군 회진면)‘로 이박(移泊)시킬 것을 주청하여 회령포만호진을 현재의 장흥 회진 주포로 옮기면서 ’회령포 만호진‘ 이름은 그대로 사용한데서 장흥에는 “회령”이라는 지명이 ’구(舊) 회령’과 ‘회령’으로 두 곳이 되었다. 그리하여 장흥부 회령방에 대해 <세종실록지리지>에서부터 ‘구 회령’ 지역은 ‘회령폐현’으로 지칭하여 그 오해의 소지(素地)를 피했다.

세종 7년(1425년)에 옮겨진 ‘새로운 회령포만호진’은 주포에 전선을 정박하였고 왜구의 침입이 잦아들고 안정되면서 성종16년(1485년)에서 21년(1490년) 사이에 배에서 내려와 육지에 ‘회령포진 城’을 축성하여 현재까지 ‘장흥군 회진면 회령포성’으로 고착된 것을 명명백백하게 확인할 수 있다.
회령포진의 이설 경위에 대하여 이런실제적 사정과 다르게 기록한 일부 기록이 존재하는데 이는 전혀 잘못된 기록이다, 장흥향교 <장흥지(1940년)>에 『회령진은 명종9년(1554년) 보성군 회령면에서 옮겨와서 회령진으로 개칭하였다』고 잘못 기록한 것으로, 일제강점기에 발간된 후대의 오판에 불과하다. 그런 <1940년 장흥지> 기록을 추가적으로 뒷받침할 관련자료를 전혀 찾을 수 없음은 물론이다. <1747년 정묘지>의 “회령방 회령폐현” 기록과도 전혀 맞지 않아 <1940년 장흥지>는 명백하게 잘못된 것으로 폐기되어야 한다.

이제 회령포진의 내력은 대략 살폈으니, 군영구미(軍營龜未=軍營仇未)를 살펴본다. 그 지역 ‘군영구미’ 지명 자체는 어느 역사서나 향토자료에, 또 고지도에도 출전하지 않는다. 그 말뜻을 헤아리면 ‘군사가 주둔한 구미’라는 정도일 것 같은데 과연 어디일까? 조선시대에 군사가 주둔한 지역은 득량만 일대의 장흥 땅으로는 오직 ‘회령진’과 ‘해창’ 뿐이다. 물론 이순신 장군이 가야할 최종 목적지가 ‘회령진, 회령포’이니 그 중간의 군영구미가 그 회령진은 아닐 것은 분명하다. 살펴본다. 장군은 회령진 회령포로 가기 위해 배설에게 배를 보내라 하였는데 배설은 보내지 않았다. 이순신 장군이 기다리는 그곳 포구는 전선이 정박할 정도로 수심도 깊어야 한다. 그러나 현재의 보성 군학리에서는 아무리 찾아보아도 그럴만한 정박과 접안 장소는 보이지 않는데, 노기욱은 “지역민들이 가져온 향선들이 보성 군학에 모였고, 그곳 군학에서 양곡과 군수물자에 병사들까지 실은 이순신장군이 회령진으로 갔다.”고 주장한다. 그 생각이야 개인자유이니까 그렇게도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 실증적 합리적 자료가 전혀 없다.

정유년 8월17일 <난중일기> 내용이다. “장흥 땅 백사정에서 점심을 먹고, ‘군영구미’로 가니, 장흥의 군관 감관(監官)과 색리는 군량을 모두 훔쳐 나누어 고 있었으며 그때 도착하여 그들을 곤장을 때리고 군영구미에서 잤다.” 이 내용은 여러 객관작인 사정을 스스로 말해준다, 군영구미 그곳에는 군량을 저장하는 창고가 있어야 하고, 장군이 머물 수 있는 객관이 있어야 하고, 양곡과 색리를 관장하는 감관이 있어야 하며, 바닷가 선창(船倉)이어야 한다. 그러나 보성 회천면(백사정)에서 다음 기착지가 된, 현 보성 ‘군학’은 전혀 그런 사정에 부합하지 않는다. 어떤 군사가 주둔하였던 곳, 창고가 있는 선창에 관한 기록과 유적 현장이 전무하다. 군학마을 끝에 있는 조금 돌출한 곳에 축대 같은 흔적이 조금 남아 있는데, 이곳을 ‘구미영성’이라 하고 ‘회령폐현’의 흔적이라고 노기욱은 단정한다.

그러나 ‘회령폐현’에는 내성을 축성하지 않았고, 성종 16년(1485년)과 21년(1489년) 사이에 주포(장흥군 회진면)의 ‘회령진성 내성’을 축성하였다고 앞에서 확인한 바 있다.
마침 <1747년 정묘지>에 『해창은 장흥지역의 세미(세금을 걷은 곡식)를 보관한 곳으로 바다를 통해 서울의 창고로 운반한다. 해창에 소속되어 있는 선소(船所)는 창고 앞에 있다. 선창(船倉)은 매년 부역하는 민정(民丁)을 동원하여 땅을 판다. 대선 1척, 병선1척 사후선 1척이 모두 좌수영에 소속되어 있다.』 라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1872년 장흥부 지도(규장각 소장)>에 아주 소상하게 해창(海倉)과 전선3척과 창고가 그려져 있다.
또한 안양 해창 현지에는 그간에 여러 간착 사업이 있었어도 아직도 그 창고터, 선창터를 짐작할 만한 곳이 전해지고 일부는 남아 있다.

그럼 해창(海倉)은 조선 초 언제부터 운영 되었을까?라는 의문이 생긴다. 현존 남아 있는 기록 중에 제일 빠른 기록이 <정묘지>다. <정묘지> 보다 빠른 기록은 거의 없어 안타갑긴 하나, 조선초부터 장흥 세곡(稅穀)을 서울 한강 경강으로 올렸음은 분명하다. 역사적 사실이다. 해창(海倉) 마을에는 현재 판독이 불가한 돌비석 두 개와 철비 하나가 마을 안쪽 길가 집터에 있는데, 이 비는 조선 후기의 장흥부사의 선정비인데, 해창(海倉)은 그만큼 중요한 곳이었던 것이다. 해창(海倉)은 조선이 건국되고 장흥지역 세미(稅米)를 걷어 감관을 두고서 창고에 보관 관리하고 조운선으로 운반한 것으로 보아 건국 초기부터 운영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럼에도 그런 조건에 부합하는 ‘장흥 안양 해창(海倉)’을 놔두고 그들(노기욱,이수경)이 보성 군학을 주장함은 어불성설인 것이다.

●향선(鄕船) 이동설
이수경 선생은 ‘향선 이동설’을 처음 노기욱이 주장한 것이 아니라 영광정씨 ‘정명렬(반곡 정경달의 아들)’의 <제암집(63p)>에 향선 이동설이 있어서 노기욱이 인용 기술하였고, 본인은 그 원문을 확인할 수 없어 전라남도 문화재전문위원 김희태 박사에게 의뢰 확인하였다고 주장한바, 이에 필자가 직접 김희태 위원에게 다시 확인하였는데, <제암집>에 향선 이동설 기사는 직접 없어 보인다고 답하였다. 그리하여 직접 확인하였으나 <제암집> 어디에도 비슷한 문구를 찾을 수 없었다.
마하수 삼부자의 <마씨가장(이충무공전서)>에서도 마하수는 이충무공을 정유년 8월18일 군학의 군영구미로 간 것이 아니라, 19일 장흥의 ‘회령포 회령진’으로 가서 만났는데, 이충무공이 아주 반갑게 맞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노기욱과 이수경이 주장하는 향선이동설이 더 가관인 것은 답사 며칠 후 이병혁 박사와 연락 중에 “단기치도 회령진(單騎馳到 會?浦)”이라는 기사출전을 들어 알게 되었는데, 그 확인에 관하여 차일피일 개으름을 피우고 있던 중에, 마침 박형상 변호사(장흥신문 논설위원)가 장흥신문에 “단기치도 회령포(單騎馳到 會?浦)”를 논고(論考)하였다.
그  “단기치도 회령포(單騎馳到 會?浦)”근거는 아래와 같다.
㉠ 이항복의 백사집(白沙集) 기록 고(故)통제사 이공유사(李公遺事)에 “통제사에 다시 제수된 뒤에 단기치도회령포(單騎馳到會?浦: 한마리 말로 달려서 회령포에 이르러) 도우(道遇:우연히 만나다) 경상우수사 배설(裴楔) 시(時:때) 설소대전선형유팔집(楔所帶戰船只有八集:배설이 있는 곳에 전선 8척이 모였다)”
㉡ 윤휴의 백호집 제장전(諸將傳) 원균 편에 급(及) 순신(舜臣) 복장(復將:장군이 다시 되다) 聞 楔全軍在(설전군재: 배설과 전군사가 있는) 회령포에 순신단기치 견설(舜臣單騎馳見楔: 순신이 한 마리 말로 달려서 배설을 만나다)
㉢ 안방준의 은봉전서 기사(記事)에 부(夫) 순신지재위통제야(舜臣之再爲統制也: 순신이 재차 통제사가 되어) 聞 경상우수사 배설 以 소대전선(所帶戰船:그곳에 전선을) 래박(來泊: 와서 정박하여) 회령포(會?浦)에 단기치도(單騎馳到: 한 마리의 말로 이르다)
㉣ 이충무공전서 백사집(白沙集) 충민사기(記)에 공문명(公聞命:공은 명령을 듣고) 단기치도 회령포(單騎馳到 會?浦: 한마리 말로 회령포에 이르러) 도우(道遇:우연히 만나다 ) 경상우수사 배설(慶尙右水使 裵楔)을 만났다.
이런 여러 자료들이 쏟아짐에도 지금의 보성 군학에서 이충무공이 향선을 타고 회령포로 갔다는 내용으로 된 기사를 지금까지 한건도 찾지 못했다.
또 장군은 정유년 8월18일 난중일기에 “늦은 아침(晩朝) 회령포에 갔었다(直往)”고 적고 있다. 군학에서 회령포는 거리가 너무 멀다. 그 출발장소가 해창이면 가능하다. 안양 해창에서 용산을 거쳐 관산을 지나 대덕으로 돌아서 회령포에 도착하는 길밖에 없다. 날쌘 군사와 수종꾼들은 이순신장군을 뒤따랐을 것으로 추정된다.

5) 정유재란의 장흥

위와 같이 지금이야 장흥지역 내에서 여러 사료를 많이 찾아내어 확인하고 있지만, 예전에는 대충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사이에 일어난 구전(口傳)된 이야기로 범벅되고 말아 그냥 ‘임진난 무렵’이라고 퉁치고 지나갔었다. 반성되는 부분이다. 사실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도 세월이 바뀌고 다른 외지인들이 들어와 거주하게 된데서, 장흥 회령포진에서 정유재란 때 삼도수군통제사의 취임식이 있었다는 사실 마저도 이제는 모르는 사람이 많다. 그럼에도 임진난 이야기에서 빠지지 않는 소재(素材)가 여전히 전승되고 있다, “천관산에서 소나무를 베어 전선을 수선하고 판옥선을 만들고 귀선(거북선)으로 고쳤다”라는 이야기다. (그런데 장흥군청 문병길 면장은 아예 “장흥군 회진면 덕산리 답1번지가 선소이고, 정유재란에 판옥선을 전부 귀선으로 제작하였다”고 기고하고, 강의도 한다. 그러나 장흥군 회진면 덕산리 답1번지는 존재하지도 않으며, 회진면 덕산리 1번지는 덕산리 산속이다. 산속 선소는 보지도 듣지도 못한 일이다.) 이순신 장군은 정유년 8월18일 회령진에 도착해 이것저것 점검 지시하며 판옥선의 갑판이 깨진 것도 수리하라고 이르고(이충무공 행록: 이분) 그동안 있었던 일을 보고 받고 조사 지휘하였을 것이다. 다음날 19일에는 유지(諭旨)와 대장기에 숙배하게 하여 군기를 확립했는데, 이 자리에 배설이 뱃멀미를 핑계로 나오지 않아 그의 속리 이방을 잡아다 곤장 20대를 쳐서 엄하게 다스린다. 그리고 하룻밤 더 머무르고 20일에 회령진이 좁아 불편하다는 이유로 영암군 이진(梨津: 지금은 해남군: 전남도 지정문화재)으로 옮겨 간다. 이것이 <난중일기>와 <행록>의 전부다. 필자 생각으론 천관산에서 나무를 배어 거북선으로 건조 또는 개조할 시간과 판옥선을 건조할 여건이 충분하지 않았다고 판단한다. 또 이수경 선생은 “이충무공이 명랑해전을 보성 열선루 시점부터 기획했다”고 주장했다. 기가 막힌다. 전선 몇 척을 수습할지도 모르고 어떻게 싸움이 전개될지도 모를 한 달 후의 일을 미루어 알고 있다고 마치 직접 본 것처럼 말한다. 이 구상을 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시간은 정유년 9월16일에 이르기 까지 거의 한달 동안 강진, 완도, 해남과 진도, 목포 안쪽바다에 머물며 배를 수습 수선하고 어떻게 적을 막을 것인가? 궁리함과 동시에 선조의 수군폐지론과 맞서 각고의 시간을 거치는 과정 중에 최종적으로 결정하였다고 보아야 한다. 뼈에 살을 너무 많이 부치면 본질에서 벗어나게 되어있다. 충실한 자료에 입각할 때라야 그 결전장소 선택시점을 합당하게 판단할 수 있을 것. 너무 의욕이 넘치면 선과 도를 넘기 십상인데, 역사적 객관성여부에 대한 냉정한 고찰이 필요한 때이다.

  6) 글을 마치며
    물론 이 글과 자료가 전부는 아니다. 연구자마다 관점이 다르고 생각이 달라 이 글도 부족한 점이 있고, 공격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안다. 지금 장흥군에서는 확실하고 검증된 자료를 중심으로 그 생각과 관점이 다른 사람들이 한 자리에서 토론하거나 발표를 하여 장흥군에 관련된 역사적 사실에 대해 하나의 객관적 선(線)을 제시하여야 한다. 하나의 기준과 선을 일방적으로 강요하자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 터무니없는 수준의, 날조 왜곡 주장은 아예 차단하자는 것이다. 물론 생각이 다른 사람의 의견도 경청할 줄 알아야 한다.

일이 잘못 처리되면, 정당한 자긍심도 찾을 수 있는 역사현장의 문화적 복원이나 행사내용이 서로의 공격대상이 되고 정치적 다툼의 장(場)이 되어 지역과 사람이 서로 부딪치고 말아 우리가 계속 지키고 살아야 하는 장흥 땅의 명예가 실추되고 말 위험성도 크다. 그래서 역사는 팩트(fact)에 기초하여야 하고 객관적 사료와 사실로 증명되어야 제 구실을 한다. 역사는 스토리텔링 창착이 아니다. 원사료, 1차사료 원전확인과 역사적 현장의 현지확인에 소홀한 노기욱 이수경 선생의 각성을 촉구하며, 아울러 장흥군수님, 전남도 도의원, 장흥군 군의원의 각별한 관심을 촉구한다.

<참고문헌>
 1. 난중일기(이순신), 이충무공전서(이은상 번역본)
 2. 장흥읍지,  정묘지(1747,장흥향교), 장흥지(1940,장흥향교)
 3. 이병혁, 장흥도호부 수군만호진 회령포 연구, 정유년 여름의 기억“
 4, 박형상, “단치도 회령포” 등 장흥신문 기고문
 5, 장흥부지도(1872년: 규장각 소장)
 6. 기타 원전 재인용-백사집(이항복),백호집(윤휴),은봉전서(안방준),징비록(유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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