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주년의 3.1독립만세 운동을 되새기며
일제강점의 그 치욕의 시대는 우리의 역사에서 아직도 진행되는 미완의 과거사이다.
청산되지 않은 식민의 잔재는 사회의 도처에서 부끄러운 민낯을 보이고 있다.
금년이 3,1독립만세 100주년이 되는 해임에도 불구하고 최근의 일본은 군국주의로 회귀하는 듯한 정치적 기만의 양상을 보이고 있고  국내 정치와 사회의 일각에서도 용납될 수 없는 언행으로 민족적 민주적 자긍심을 위협하고 있다.

동학농민혁명, 4.19 학생의거, 6.3 민중항쟁, 5.18민주화운동과 2016년의 촛불혁명으로 이어지는 이 땅의 민주적 민중 항거를 훼손 하려는 일각의 동향이 심히 개탄스럽거니와 이러한 때일수록 3,1독립만세 100주년의 그 처절하고 치열했던 민족의 독립의지가 재확인 되는 해로 승화 되어야 할 것 같다.

100년전의 3.1독립운동은 국내외적인 여러 갈래의 상황과 연결되어 발화 되었다.
1918년 우드로 윌슨 미국대통령은 민족자결주의를 주창 했다. “어느 민족이든 그 민족은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 하여야 한다”라는  윌슨 대통령의 말은 억압받는 민중과 약소국가의 국민들 마음을 파고 들었고 파도를 일으켰다. 1910년 8월 29일 일제의 강압에 의해 국권이 완전히 박탈되어 조선총독부가 설치되고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 민중의 의식속에는 한 줄기 희망으로 저항의 불길로 윌슨의 선언이 전달되었다.

1919년1월21일, 대한제국의 고종황제가 승하하였다. 이미 주권을 상실한 대한제국이었지만 상징적 존재였던 황제의 승하와 고종의 사인이 독살이라는 소문이 확산 되면서 나라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이러한 항일의 기류가 1919년 2월8일 일본의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구체적인 저항운동으로 표출 되었다. 일본의 유학생들은 2.8일 일본의 수도 동경에서 “2.8조선청년단독립선언서”를 발표하면서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일본 유학생들의 거사에 자극을 받은 국내의 항일 독립지사들, 종교인들, 지식인들이 주동이 되어 민족이 총궐기하는 독립만세 시위를 하기 위한 은밀한 계획을 추진하였다.
민족의 대표인 33인의 지도자들이 주동이 되어 거사일과  각 지역의 책임자들을 정하여 연대하면서 3월1일을 만세 시위와 독립선언의 거사일을 잡았으나 일제의 염탐과 지도자들의 탄압으로 33인 민족 대표는 서울의 태화관에서 기미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삼창하여 독립의 의지를 표명 하였다. 같은 날 정오에 탑골 공원에 모인 시민 학생들 역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국내외에 대한독립의 의지를 선언하였다.

3.1독립만세 운동은 국내 전역과 국외의 교민들에게 요원의 불길처럼 번지어 나갔다.
대규모 저항과 조선의 독립을 외치는 운동이 확산 되면서 일제의 진압은 무자비 하였다. 독립운동사에 기록된 일제의 탄압은 그야말로 짐승같은 체포와 구금과 고문과 살육의 만행이어서 필설로 형용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1독립만세 운동은 민족의 독립 의지와 저력이 대중적 기반을 형성하고 체계화 조직화 활성화 되면서 이 저항의 정신과 활동은 1945년 8월 해방이 되기까지 조선의 민주, 민중 정신의 자양이 되어 이어졌다.

■근대 장흥의 항일 투쟁
근세의 장흥은 1894년 발발한 동학농민혁명의 참여와 석대전투의 치열한 저항 정신을 비껴 갈수 없는 역사일 것이다. 특히 동학농민혁명의 최후 전투로 지칭되는 “석대혈전”은 경군과 일본군의 연합군에 의해 장렬한 패퇴를 하였다. 당시의 국권은 이미 행정, 치안 사법권이 일제에 늑탈 되어 자주권이 상실된 상황이어서 농민혁명군의 좌절은 불가피한 사정이었고 제폭구민, 보국안민, 척양척왜를 4대강령으로 주창한 농민군의 이념은 통한의 좌절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농민혁명의 좌절과 석대혈전의 패전은 장흥 전 지역에 피바람이 부는 탄압과 숙청으로 이어졌다. 관군과 일본군은 농민혁명에 연루된 가족 친척과 사돈네 팔촌까지 연좌를 물어 색출 하여 무자비한 검속과 체포 구금 처형으로 장흥 일원을 공포의 지역으로 장악하였다.
당시 장흥읍의 장터(현, 장흥서초등학교 인근)와 벽사역(현, 장흥읍 원도리 일원)은 장대에 묶어 세우고 우지개를 씨워 처형한 농민군 연루자들의 시신이 즐비 하였고 호곡과 비명이 밤낮을 채웠다고 전해 진다. 장흥군의 전 지역은 관군과 일군의 무도한 검색과 연행으로 백성은 숨을 죽이며 세월을 한탄하였다.

1906년  전라남도 경무서 장흥분서가 설치 되었고 이어 1907년에는  일반경찰력보다 기동력이 월등한 일제 헌병 조직이 도입되어 영산포 헌병분견대의 장흥분견소가 장흥에 주재 하게 되었다. 다른 지역에 비해 일찍이 장흥에 헌병분견소를 설치한 것은 동학농민혁명  당시 보여 주었던 장흥 농민 민중의 기개를 의식한 장흥 탄압의 본을 보여 주기 위한 조처가 아니었는가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흥의 항일 저항과 의병활동은 다른 지역에 비해 더욱 활발하고 조직적이었으며 특출하였다.
일제의 침략 야욕이 본격화 되어 1876년 한일병자조약이 체결되고 이어 한일합방의 치욕스러운 상황으로 국권이 상실되자 장흥의 우국지사들은 비분강개하여 순절의 저항을 하고 백경인,위계룡,백형칠,이남재 등은 의군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중에서도 심남일(沈南一)이 이끄는 의병 부대는 그 규모가 9백여명에 이르렀으며 도처에서 일경과 헌병대를 급습하는 저항을 하였다. 기록에 의한 장흥의 의병활동은 다음과 같다.
1908.1.8. 의병 900여명 장흥경찰서 기습 왜군 7명 사살.소총 7정, 탄약 400발 노획, 의병 20명 전사
1908.1.9. 장평 우산 병동에 매복한 의병 왜군 기습,7명 사살, 소총과 일본도 노획
1908.3.16.  장흥경찰서 의병 토벌대를 능주 호암에서 기습, 5명 사살, 총기13정 노획
1908.4.16.  심남일 부대 유치 관동에서 왜병 3명 사살
1908.6.11. 나주경찰서 소속 순경과 헌병 토벌대 부평 명동에서 기습 2명사살, 총기4정 노획
1908.6.16. 장흥헌병대 기습 왜군 7명 사살
1908.8.23. 심남일 부대와 연합의병 장흥헌병대 본부 습격
1908.9.20 .심남일부대 대치전투에서 적 20명 사살
1908.9.26. 유치 신풍에서 토벌대와 교전
1908.10.27. 장흥헌병대 본부 기습, 의병 피해 막심
1908.11.9. 안양면 해창 거주 일인(요네무라 米村 仁一)습격 총살
1908.12.30. 용산 운주동에서 출병한 의병 헌병대 기습,8명 사살,1명 포로, 총기 도검 10점 노획
1909.3.11. 심남일 부대 왜군 5명 사살
1909.4.3. 부산 용반에서 일진회원 습격 부상 및 사살
무력으로 항일 투쟁을 전개한 장흥의 의병들과 더불어 대내외에서 해외에서 치열한 항일 독립운동에 투신한 장흥 출신의 독립지사들의 행적은 본고에서는 생략 하기로 한다.
수많은 항일독립 지사들의 할동 상황과 사건들은  최근에 이르러 많은 학자들이 발굴하고 조사하고 있으며 일본측의 재판 기록이나 보고서를 바탕으로 보다 상세하게 밝혀지고 있으므로 언젠가는  “장흥항일독립운동사”가 총정리 되어 “문림의향 장흥”의 자긍심 있는 역사로 조명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장흥의 기미3.1독립만세 운동의 전개
장흥의 3.1운동은 천도교를 중심으로 전개 되었다고 알려 지고 있다. 장흥 덕도 출신 김 재계와 신 명희는 일찍이 천도교에 입교 하여 중앙총본부의 중책을 역임 하는 등 활발한 민족주의 사상을 전파 하는데 헌신하였다.

김재계는 천도교 중앙총회 금융관장, 중앙감사원장, 천도교 월보의 편집위원의 중책을 역임하면서 헤이그 밀사 파견의 후원을 하는 등 천도교 활동을 통한 독립운동에 깊이 관여하였다. 신 명희는 천도교중앙총회 상임위원으로  재임하면서 장흥과 중앙과의 시국 관련 정보들을 공유하면서 장흥 지역 천도교들을 중심으로 하는 민족정신의 함양에 기여하였다.

천도교는 1918년 이미 독립기원 49일 기도 독립운동 성금 모금 등의 활동으로 민족의 독립 의식을 고취 하는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신명희는 그러한 연고가 있었기에 일찍이 3,1만세 거사를 인지하고 2월말경에 기미독립선언서를 장흥에 가지고 와서 3월1일 만세 시위를 준비하였다.

그 기간동안 김재계는 장흥의 천도교들이 중심이 되어 모금한 독립운동 성금 500원을 중앙총회에 전달하면서 장흥에서의 만세 시위 준비에 착수 하였다. 그러나 일경의 집요한 감시와 사찰 때문에 3월1일의 거사가 어렵다는 상황을 파악하고 장흥의 만세 시위는 3월15일로 미루어 결행 하기로 하였다.
3월15일의 만세시위 결행을 위하여 면단위 지역 책임자를 선정 하고 기미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제작 하여 비밀리에 배포하기 시작 하였다.

시위 책임자들은 천도교 교인인 회진 덕도의 김재계, 김재반, 황생주, 황업주 등이었고 면단위 연락 책임자들은 다음과 같다.
대덕면:김상준, 안분열, 조홍준, 김상호, 김영재, 김덕역
관산면:이순홍, 백태순, 박춘식, 박진록
용산면:최기홍, 김병무
장흥면:김서삼, 박동일
안양면:김진학, 최기흥
장평면:고광신, 엄대만, 김유근

■기미년 3월15일 장흥의 독립만세 운동
독립을 염원하는 장흥의 지사들은 은밀하게 움직이면서  선언서를 등사하고 태극기를 만드는 등 준비를 갖추어 3월15일의 예정일을 기다렸으며 장터에 모인 사람들에게 선언문과 태극기를 나누어 주어 만세운동에 참여를 독려하였다.

지사들은 몫을 나누어  김 재계 김 재반이 선두에 서서 만세운동을 주도하기로 하고, 황 생주는 교도들과 호응 하는 군민들을 규합 하는 일에 진력 하면서 가가호호 선언서와 태극기를 돌리기로 하고, 황업주는 지역 책임자들과의  연락을 하기로 조직적인 준비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러한 사전계획을 토대로 하여 3월 15일 김재계, 김재반의 주동인사들에 의해 시장 중앙에서 태극기를 높이 드는 것을 신호로 하여 만세를 부르기 시작하자 삽시간에 수백명의 천도교인들과 군민들이 모여들며 만세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모여든 군중들이 몇차례 만세를 부르기도 전에 일본 헌병들이 들이닥쳐 만세군중의 폭발적인 기세가 누그러질 수 밖에 없었고 모였던 군중들은 간헐적인 시위행진으로 끝낼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은 주동인사들이 철저한 준비가 되지 못했다는 배경도 되지만, 시일이 서울보다는 15일씩이나 늦었기 때문에 일본헌병과 경찰들의 삼엄한 경비망에 이들의 만세운동 준비가 이미 정보로 포착되었기 때문에 만세운동이 시작되자마자 경찰과 헌병들이 출동하여 만세운동을 진압할 수 있었다.

이와 더불어 동학농민혁명의 가담자들이 무자비하게 탄압 당한 장흥은  피해 의식과 공포심이 아직까지도 장흥지방에 남아있었기 때문에 천도교인을 제외한 일반민중들의 자발적인 참여가 이루워지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장흥에서의 만세 시위가 대규모로 과시 할 수 없었던 연유가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일제 경찰은 만세 시위를 진압하는 것은 물론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군민들 가운데서 50여명을 체포했다. 만세운동을 주동했던 인사들은 자신들이 책임을 지겠다고 다른 양민들은 석방시켜 줄 것을 요구함에 따라 이들 대부분의 군민들은 단순가담 혐의만 인정되어 태형을 당하고 다시는 그러한 불온한 행동에 가담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하고 15일만에 석방시켜 주었지만, 각 면단위의 책임자들은 모진 고문과 취조를 받은 후 장흥 검사국에 송치되었다.

장흥에서 김재계 등 만세운동 주동자들이 검속당한 뒤에도 이미 각 면단위 만세운동의 준비가 알려져 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3월 20일에는 대덕면에서 천도교인 인 다수가 모여 시위운동을 주도하자 주변에 있던 수 백명의 면민들이  이에 호응하여 만세운동을 벌였으며 경찰에 의해 해산되었다.

또한 4월1일경에는 군내 용산, 안양, 장동, 장평, 유치, 부산, 관산 등 7개면에서 만세운동이 계속 일어나 오후 2시부터 밤 8시까지 수천 면민이 산봉우리에 위에 올라가 봉화를 올리고, 해변에서는 횃불을 밝히고 만세를 부르면서 시위운동을 하였다. 이러한 산발적인 시위와 참여 군민들이 다수여서  숫적으로  중과부적이었던 경찰들은 공포탄을 쏘면서 만세운동을 저지하였다.

장흥의 3.1만세운동으로 구속된 인사는 17명이었으며 이중 실형을 받은 인사들은 10명이었다. 현재까지 확인된 구금 수형의 지사들 명단은 다음과 같다.

김재계 3년 광주형무소 대덕면 덕산리
김덕호 3년     〃       〃        신삼리
김재반 3년     〃       〃        덕산리
김영재 2년     〃       〃        신상리
김덕렬 2년     〃       〃        대  리
황생주 3년     〃       〃        덕산리
황업주 3년     〃       〃        덕산리
김상준 2년     〃       〃        연지리
안분열 2년     〃       〃        산정리
조홍준 2년     〃       〃        산정리
백태순 2년     〃       〃        우산리

■장흥의 항일 투쟁과 독립운동, 조사와 조명이 필요하다.

본고에서는 한정된 지면의 사정상 장흥에서의 항일 독립운동 그 사건과 인물에 대해 제한적인 기술을 하였다.
그러나 장흥에서는 항일 애국단체의 조직적인 저항운동이 그치지 않았으며 유무명의 지사들이 목숨을 초개같이 여기며 항일 투쟁을 전개 하였다. 이러한 의로운 사실들이 구체적인 조사가 미흡하고 사료가 미흡하여 피어린 선열들의 공적들이 조명 되지 못하고 있다. 실로 아쉬운 일이다. 장흥 출신의 애국지사들 중  독립운동의 공적이 인정되어 건국훈장 서훈을 받은 분들도 있지만 보다 철저한 공적을 조사 하여 서훈 등급의 조정을 요청 하는 것도 과제일 것이다. 아직 서훈받지 못한 항일 독립시사들의 공적을 확인 하여 그 공로가 합당한 예우를 받을 수 있도록 행정 지원도 필요하다.

최근 국가보훈처에서는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기억과 계승.예우와 감사.참여와 통합”을 주제로 하는 대대적인 사업들을 추진할 계획을 발표하였다.
특히 국가보훈처가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에 연루되어 형벌을 받았던 수형자 5,000여명을 전수조사하여 확인 하였다고 하니 보훈처의 이 사료에 장흥인들이 포함된 사실을 추려 내어 그 공적을 확인 하는 작업도 선행 되어야 할 것 같다. 보훈처의 기념 사업에 발 맞추어 우리 장흥군에서도 3.1절 100주년을 기념하고 문림의향 장흥의 자긍심을 확립 하는 규모 있는 기념 행사가 치루어 졌으면 하는 소망이다.

작금의 한반도는 평화 프로세스의 소망스러운 기류와 이에 반하는 일본의 도발이 양립되어 보다 확고한 민족의 정체성이 요구되고 있다.
제100주년 3.1절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의 해에 우리 장흥군도 합당한 사업들이 추진 되기를 바란다. 더불어 장흥군이 추진하는 “안중근의사 선양, 역사공원 조성”사업도 이러한 이념적 바탕 위에서 추진 되었으면 한다.(昊潭)
◈ 참고문헌
장흥군지(1993,장흥군),명덕(덕도)향토사(1995,명덕향토사편찬위원회)
장흥지방의 국난극복사(1998,장흥문화원,이상구편저),장흥의 향토인물열전(2011,장흥별곡문학동인회,김석중 편저),장흥경찰100년사(2012,장흥경찰100년사발간추진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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