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의종3년(1149년)에 장흥부(府) 승격이 되던 무렵, 그 장흥府 지역에도 아마 曺氏는 거주했을 것. 조선초 장흥에 유배온 ‘이색(1328~1396)’이 쓴 <황보城記,1392>에 나온 축성 참여자4인 戶長에 ‘조수(曺修)’가 있었다.

(‘존재 위백규’의 글에 나온, 조선초 ‘좌랑 曺璲’, 1426년경 백련사 중창의 후원자로 나온 ‘曺隨’가 서로 겹칠 수도 있겠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장흥부(府)> 편에 ‘고려 인물 조정통(曺精通)’이 ‘탁괴(擢魁,장원급제자), 문하시중’으로 기록되어 있다.

<장흥읍지 정묘지>에 회주(본부) 토성(土姓)으로 ‘창녕 曺씨’가 나오고, 장흥부 부동방 인물로 ‘고려朝 조정통, 조한룡, 조경식’이, ‘조선朝 조희정’이 열거되어 있다. 그럼에도 현재 장흥군역에서는 그 曺氏인물들 흔적을 얼른 찾을 수 없다. ‘수운 曺精通’을 시조로 삼았던 ‘장흥 曺씨’도 있었다지만, 결국 동원대본(同原大本) 흐름에 ‘창녕 曺씨’에 합쳐졌을 것. 그런데 유념해 볼 사정이 있다. <신증,강진현>에는 ‘고려인물 조정(曺精)’이 등장하는데, 그렇다면 ‘장흥府 曺精通’과 ‘강진현 曺精’은 어떤 관계인가?

한편 진도 쪽은 '진도인물 조정통'을 언급하고 있다. 앞서 조경식의 아들, 즉 조정통의 증손 조희직을 입도조(入島祖)로 삼고서, 조정통을 그곳 효충사 주벽으로 모셨다. 나주 남평에는 曺精通의 다섯 아들 급제자에 관한 五龍洞 전설이 남아있다. 특히 조정통의 3남 조한룡(曺漢龍,1340년대~1415)이 나주 출신으로 '불회사'를 창건한 원진국사라는 것. 그러나 <신증,나주목(牧)>엔 曺氏 인물들이 따로 기록되지 아니했다. 다시 돌아와 ‘장흥府 曺精通’과 ‘강진현 曺精’은 어떤 관계일까?

현금 장흥에서 曺精通의 자취를 바로 찾을 수 없어도, 장흥읍 평화리, 안양 요곡, 장평 제산 등에 曺氏가 모여 살았다. (장흥 <사마재 제명록>에 나온 진사 '조여해'는 ‘조정통’의 후손이라고도 했다.) 반면 강진 쪽에는 그 구체적 자취가 추적되고 있다. 거기서는 ‘강진현 曺精’을 ‘철야君 수운(水雲) 조정통’으로 추정하며, 강진현 동쪽 20리에 있는 ‘운수(雲水)부곡’ 또는 ‘水雲향(鄕)’, 즉 현 ‘군동면 풍동’ 일대를 출신지로 지목한다. 그 물길 동쪽으로 조금 더 오르면, 현 장흥읍 독곡(독실포)과 부동방 평화리가 있다. 그 曺精通은 고려 충렬왕(재위1274~1308) 원년 무렵에 몽골(元) 쿠빌라이 황제의 부름을 받고서 바둑을 두었다한다. 역시 원(元)나라와 바둑교류를 했다고 다른 기록에 언급된 ‘조윤통(允通, ~1306)’과 동일인으로 보기도 한다.

允通의 초명(初名)이 精通이라는 것. 그러니 강진 쪽은 ‘조정통, 조정, 조윤통’읕 같은 인물로 보며, ‘바둑의 왕’이자 ‘산삼의 왕’이라 불렀다는 것. 그는 중국과 고려간의 산삼 무역을 독점하면서 횡포가 심했다고 한다. 강진 대구면에는 大鷄祠(대계사)라는 曺氏 祠堂이 있고, 마침 <신증, 강진현>은 강진쪽에 인삼이 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런 내역의 ‘강진현 인물 曺精’과 ‘장흥府 인물 曺精通’은 왜 강진과 장흥에 중복 기록된다는 말인가? 바로 짐작되는 사정이 있다. 그 고려시절에는 강진현 자체가 아예 없었으며, 장흥반도의 서쪽을 포함한 탐진현 전체가 약200년간 장흥府에 소속된 속현이었기 때문이다.

그 曺精通이 살던 당대를 기준하면, 응당 ‘장흥府 사람 曺精通’이었을 것. 그러다 조선초 1417년에야 강진현이 창립(創立)되면서 비로소 ‘강진현 인물’로 분속(分屬)된 반면에, <신증,장흥府>기록에는 여전히 ‘고려 장흥府 인물’로 남게 된 것. 아울러 “장흥府 서쪽 41리에 아서鄕이 있다”는 사정이 장흥府 기록에 남게 된 연유도 ‘고려 장흥府의 서쪽에 연접하던 탐진현 지역’이 조선초에 신설된 강진현 관할로 통째로 빠져나가면서 그 서쪽 경계에 남긴 역사적 흔적에 해당할 것. ‘고려 장흥府 탐진현’을 단서로 삼게 되면 그 시절 역사적 사정이 다시금 풀린다. 예컨대 고려 시절에는 강진 자체가 없었던 만큼 ‘고려 강진 청자'는 그 자체로 어불성설 표기모순인 것이고, 그 시절 행정관할 '고려 장흥府 탐진현'이라는 당대 사정을 기준하면 ‘장흥 청자, 탐진 청자’로 불러야 백번 합당하다.

그 ‘장흥 탐진 청자’에서 얻은 재력을 발판으로 장흥府의 장흥任氏와 탐진崔氏 세력이 수도 개경으로 진출할 수 있었을 것. 당대 지명과 현재 지명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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