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전)대통령 78일 가택 연금에 항의해 남궁진 전)의원과 김옥두 전)사무총장이 김 전)대통령 자택 옥상에서 항의하고 있는 모습. 사진/김옥두 전)사무총장 제공

홍일이 동생, 옥두 형이네, 그동안 고생 많았네, 동생이 하느님의 부름을 받고 소천했다는 비보를 듣고 통탄하면서 눈물을 많이 흘렸다네. 어찌 슬프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이승의 마지막 길을 가는 동생을 바라보며 왜, 동생이 먼저 가는가, 이 사람아! 온몸으로 일어나길 바랐건만 하늘도 무심하지, 천상에 계시는 아버님(김대중 전 대통령)을 먼저 뵈러 그렇게 빨리 갔는가?, 야속하기 그지없네. 자네가 가고 나서 그간의 세월이 주마간산처럼 떠올라 잠을 이룰 수가 없다네, 그래서 이렇게 안타까운 심정으로 동생에게 생각나는 대로 추모의 정(情)을 담아 편지를 쓰면서 그나마 위안을 삼고자 하네,

사랑하고 존경하는 동생에게 한 없이 죄스럽게 생각하네. 세월은 빠르게 흐르고 있지만 악몽 같은 지나간 날들을 생각하면 트라우마처럼 일상을 괴롭히고 있는 게 사실이네, 그 하나가 바로 고문의 후유증으로 다리를 절며 일상이 불편할 때 그 날들이 자꾸 생각나고, 악몽으로 되살아 날 때 더 더욱 고통스럽네, 나보다 동생이 고문의 후유증(파킨슨 병)이 더 심했고, 12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병상에 누워 식물인간으로 살아온 그 세월들을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오를 만큼 분노할 때가 더 많다네, 가족들이야 오죽 했겠는가. 그 고통은 이루 말 할 수 없도록 클 것이며 동생 역시 그런 생각들을 했으리라 보네. 하지만 이제 그 암울한 고통의 긴 세월을 다 잊고 천상에서 아버님과 함께 편히 쉬시게.

 벌써 동생이 그립고, 동생과 함께 한 지난날들을 반추(反芻)해 보며, 그때를 회상해 보니 눈물이 앞을 가리네. 슬프네, 나는 1965년부터 지금까지(매주 화요일 민주화 동지들과 함께 국립현충원 참배) 존경하는 아버님을 선생님으로 일평생 모시면서 자부심을 가지고 한길로 걸어왔네. 아버님은 박정희 유신독재부터 전두환 군사정권까지 수십 년 동안 갖은 탄압과 고문은 물론 도청, 감시, 연금, 옥살이(6년), 의문의 고통사고, 미행, 납치, 사형선고, 망명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의 시간이었네. 혹독한 그 암흑의 시대, 야만의 시대에 아버님은 이 나라 민주화운동의 버팀목이었고 희망이었네.

홍일이 동생 역시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이 나라 민주화와 아버지를 위해 목숨 걸고 투쟁하였네. 그 과정에서 모질게 고문당했지, 나 역시 마찬가지였네, 어머님 이희호 여사께서는 그런 고통과 고난을 겪을 때 마다 주님한테 의지하면서 기도로 그 고통을 이겨냈고, 아버님께서는 오직 국민만을 믿고 이 나라 민주주의, 인권, 평화통일을 위해서 ‘행동하는 양심’으로 독재정권과 타협하지 않고 정의의 편에 서서 온몸으로 저항했고, 이 나라 민주주의의 초석을 놓았던 것이네, 특히 지난 1980년 5월 17일 저녁 동교동 자택에서 총을 든 무장군인들에게 납치하다시피 연행되고 남산 중앙정보부 지하 3층에 갇혀 한달 동안 무지막지하게 고문당한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치가 떨리네,

동생도 마찬가지로 “너의 아버지는 빨갱이다, 너도 빨갱이 새끼다”라면서 잔인하게 고문하기에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자살하려고 시멘트 바닥에 머리를 심하게 쳤지, 그때 나도 옆방에서 “빨갱이 새끼들 다 죽인다”며 고문하고 협박하며 “김대중이는 빨갱이라고 싸인하고 인정하면 돈은 물론이요, 국회의원도 시켜주겠다”고 회유, 협박을 했어도 동생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죽을 고비를 그렇게 수 없이 넘기며 버텼다네,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은 천인공노할 만행으로 ‘내란음모죄’로 허위 조작하고 사형을 선고했지, 하지만 역사는 우리 편이 되었다네. 진실과 정의가 승리한 것이네. 그런 참담한 고통의 세월을 이겨냈으며 훗날 동생은 민의의 전당에 들어가 국회의원으로서 국가발전은 물론 아버님과 함께 이 나라 민주주의와 정치발전에 공을 세웠고, 나나 동생이나 5ㆍ18민주화운동 보상금 전액을 장학금으로 돈 없는 사람을 위해 사회에 환원한 것은 참 잘한 일이라 보네. 동생이 한 없이 고맙고 존경할 따름이네, 고난의 일생을 살아오면서 아버님에게는 그 누구보다 든든한 정치적 동지이자 민주화 동지, 투사였네,

박정희 유신독재를 거처 전두환 살인군사독재정권 시절을 상기해 보게, 그 야만의 시대에 얼마나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죽음과 희생을 당했는가, 지난 1997년 12월 50여년만 이뤄진 정권교체로 탄생한 국민의 정부 직전까지 매년 4~5명의 젊은 대학생들이 고문치사, 분신자살, 의문사 등으로 이 나라 민주화운동을 위해 희생당했지만 아버지 시대에 이런 불행한 죽음은 더 이상 발생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네.

나 역시 8번 중앙정보부에 끌러가 모진 고문을 당하고 두 번에 거쳐 3년 6개월 동안 서대문 형무소에서 감옥살이를 하고, 12년 동안 정치활동정화법에 묶여 정치활동을 하지 못하는 불이익을 당했지만, 국민의 정부 탄생에 우리가 일익을 담당했고 외환위기 최단 시일 극복과 함께 생산적 복지 확충과 더불어 최저생계비 보장제 등 복지국가 실현, 국가인권위 설치, 최초 남북정상회담과 ‘6·15공동선언’으로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 경의선 철도와 육로 개설, IT강국과 월드컵 4강 신화 그리고 세계가 존경을 표한 김대중 대통령님의 노벨 평화상 수상은 온 겨레의 영광이자 대한민국 국격을 한 차원 끌어 올렸지, 이렇게 신나는 일도 있었다네.

아무튼 우리의 삶에서 아버지의 고통에서 자식의 고통으로, 처자식들의 고통으로 이어지면서 우리는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아버님(김대중 전 대통령)을 모시고 이 나라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한 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한 삶이었다고 자부하네. 홍일이 동생 안 그런가? 아버님이 평소 말씀 하신대로 ‘죄는 미워하되 인간은 결코 미워하지 않는다’고 했듯이 정치보복도 하지 않았고, 우리를 고문한 사람들도 다 용서해 주지 않았던가!

아버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마지막 일기에서 ‘인생은 아름답고 역사는 계속 발전한다’고 했듯이 우리의 인생도 그간의 고통도 있었지만 아름다운 시절도 있었고, 보람된 시간도 있었으니 그리 아시고 편히 쉬시게, 역사는 우리의 삶을 헛되게 평가하지 않을 거라 생각하네, 하늘나라에 계시는 아버님께서 ‘왜, 일찍 왔냐?, 네 어머니도 아파 병상에 누워 계시는데’ 하시거든 ‘아버지를 보고 싶어 왔어요’, 하면서 아버님 손을 잡고 마음껏 눈물 흘리면서 편안한 마음으로 이 세상처럼 다시 아버님를 잘 모시라고 당부하면서 이만 접네, 두손 모아 명복을 비네. /2019.04.25. 동생의 삼우제를 맞아 김옥두 쓰다.

▲김대중 전)대통령 단식투쟁 당시 이희호 여사, 김홍일 전)의원, 동교동계 인사들 모습. 사진/김옥두 전)사무총장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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