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면의 진산 사자산(666m)의 동쪽 낙맥 중에 하나인 칼바위산(劍岩山 500m) 아래에는 선인봉(220m)을 따라 옥녀봉(160m)이 형성되어 있다.

옥녀봉 요치(蓼峙) 아래에 세거한 보성宣氏는 1530년(?) 7세 양진당(養眞堂) 선대륜(宣大倫 1504~1568)이 보성에서 안양면 동촌마을로 입촌하여 장흥파 파조(派祖)가 된다. 배(配) 광산김씨 사이에서 아들 세분을 두었다. 장자는 선봉명(宣鳳鳴 1532~1593)으로 후손들은 안양면 고당마을 출신이다. 차자는 선봉문(宣鳳聞 1537~1610)이고, 후손들은 안양면 요곡·장수마을 출신이다. 삼자는 선봉장(宣鳳章 1541~?)이며, 후손들은 안양면 신촌·회천면 신리마을 출신이다. 이들 삼형제 후손들로 장흥문중을 구성하고 있다. 이곳 요곡마을에는 1560년경 안양면 동촌에서 차자 선봉문이 산수가 좋아 입촌하였다고 傳한다. 마을 뒤 옥녀봉 자락에는 양진당 선대륜, 선봉명, 선봉문, 선봉장, 선세강 등 5분의 묘소가 위치하고 있다.

선조를 모시는 신실 포충사(褒忠祠)는 마을 뒤쪽 운흥리 산 45번지(요곡길 65-90)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 사우는 원래 1726년(丙午 영조2) 매곡(梅谷) 선세강(宣世綱)의 충절을 기리고자 士論으로  안양면 수양리 수대곡(옥담안)에 설단하였다. 그 후 남호(南湖) 선세기(宣世紀)를 추배하였다. 1846년(丙午) 현 장소에 사당을 창건하였으나, 1868년(戊辰 고종5) 대원군의 서원훼철령에 따라 훼철되었다. 이후 1901년(辛丑) 강당 뒤편에 설단 복설하면서 옥암(玉巖) 선시중(宣時中), 통찬(通贊) 선상진(宣尙進), 영모재(永慕齋) 선우빈, 군수(郡守) 선 한(宣 漢) 등을 추배하였다. 그 뒤 1961년(辛丑) 문중합의하에 시조 퇴휴당(退休堂) 선윤지(宣允祉)를 주벽으로 유성군(楡城君) 선 형(宣 炯), 친친재(親親齋) 선거이(宣居怡), 강의재(剛毅齋) 선약해(宣若海) 등을 배향하고 선상진, 선세기, 선 한 등 3분을 매안(埋安)하였다.

1970년(庚戌) 전면 3칸, 측면 2칸 사당을 중건하고 一門 7현의 위패를 소목식(昭穆式) 형태로 봉안하였다. 매년 음 3월 15일 지역유림의 주관으로 제향을 봉행해오다가 농촌사회의 고령화에 따른 제향문화 변화로 2012년부터 후손들이 제향을 봉행한다.

배향인물의 행장을 살펴본다.

◆ 시조 선윤지(宣允祉 1352~1415) : 자는 덕빈德彬), 호는 토휴당(退休堂) 또는 용암(龍巖)이다.

명나라 문연각학사(文淵閣學士)로 명조의 명을 받고 고려에 들어왔다. 임무를 마치고 명나라로 돌아가지 않고 1382년(우왕8) 호남안렴사(湖南按兼使)로 임명되어 관음포 일대에서 왜구를 크게 물리쳤다. 우왕은 公에게 조양(兆陽)과 복홀(伏忽) 두 곳의 현(縣)을 합하여 군(郡)으로 하고 지방일대를 다스리게 하니 이곳이 지금의 보성군이다. 公은 불교를 배척하면서 유교를 숭상케 하고 교학과 애민으로 선정을 베풀었다. 고려왕조가 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호를 退休堂이라 하고 조선조 조정에서 수차례 출사를 권유 하였으나 나아가지 않고 고려조의 지조를 지켰다. 보성에서 여생을 보내어 그 자손들의 관향(貫鄕)을 보성(寶城)이라 하였다. 그 후 1862년(壬戌 철종13)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보성군 오충사, 장흥군 포충사, 고양시 오충사에 배향되었다.

◆ 4세 선시중(宣時中 ~ ?) : 자는 화중(和重), 호는 옥암(玉巖)이며, 父는 부사 선구령(宣龜齡)이다.
어려서부터 영민 근엄하여 어른스러워 도학을 깊이 연구하여 문장이 특출하였다. 세종 때 생원ㆍ진사 양시에 입격하고 여러 관직을 거쳐 능주현령에 부임하여 치적을 쌓고 선정을 베풀었다. 현민들이 능주향교에 선정비를 세우고 청백리로 칭송을 받았다. 그 후 여러 관직을 거쳐 공조판서에 이르렀다.

◆ 5세 선 형(宣 炯 1434~1499) : 자는 명여(明汝) 또는 정강(正剛)이며, 父는 선 화(宣 和)이다.
1451년(辛未) 17세에 무과에 급제하고 선전관겸비국랑을 제수 받고 여러관직을 거쳐 1460년(庚辰) 안주목사를 지냈다. 이후 경성부사와 회령병마첨절제사가 되어 변방 방어에 功을 세워 한성부윤과 의주목사를 지낸 후 황해도관찰사에 제수되었다. 1467년(戊子 세조14) 재임 때 이시애 난을 토벌하는데 功을 세워 유성군(楡城君)에 봉하고 병조판서에 제수되었다. 1471년(辛卯 성종2) 충청도관찰사와 경기도관찰사를 지낸 후 영안도병마절도사로 제수되어 야인정벌에 功을 세워 의정부 좌찬성에 이르렀다. 이후 우의정에 추증되고 보성군 오충사, 장흥군 포충사, 고양시 오충사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평양(平襄)이다. 보성선씨 오세충의록에 의하면 우암 송시열이 公의 화상찬(畵像讚)을 짓고, 문헌공 정여창이 행장을 지었다.

◆ 6세 선우빈(1483~1524) : 자는 빈지, 호는 영모재(永慕齋)이며, 父는 선상진(宣尙進)이다.
덕성과 자품이 뛰어났으며 문학이 널리 알려졌다. 진사에 입격 후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효성으로 부모를 섬겼다. 牛山 안방준은 ‘우리고장 선진사의 효행은 전고에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효자로서 현세의 증자’라 칭송하였다. 公은 여력으로 공부하여 도의에 전심하니 백행의 으뜸이요 일세의 師表라고 칭하였다.

◆ 8세 선거이(宣居怡 1550~1598) : 자는 사신(思愼), 호는 친친재(親親齋)이며, 父는 도사(都事) 선 상(宣 祥)이다.

1569년(己巳 선조2)에 선전관(宣傳官)이 되고 다음 해 무과에 급제하였다. 1586년(丙戌)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이일(李鎰)의 계청군관(啓請軍官)이 되었다. 1587년 조산만호(造山萬戶)이었던 이순신(李舜臣)과 함께 녹둔도(鹿屯島)에서 변방을 침범하는 여진족을 막아 공을 세웠다. 1588년 거제현령, 진도군수를 지내고 이어 청백리로 성주목사를 거쳐 1591년에 전라도우수군절도사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 해 7월에 한산도해전에 참가하여 전라좌수사 이순신을 도와 왜적을 크게 무찔렀다. 1592년 12월 독산산성(禿山山城) 전투에서는 전라도병사로서 전라순찰사 권율(權慄)과 함께 승첩을 올렸는데 이때 크게 부상당하였다. 다음 해인 1593년 2월 행주산성 전투에 참가하여 권율이 적을 대파하는데 功을 세웠다. 같은 해 9월에는 함안에 주둔하고 있던 적군이 약탈을 일삼고 있었으므로 이를 공격하다가 부상을 당하였다. 그 뒤 충청도병마절도사에 올랐다.
한산도에 내려와서는 이순신을 도와 둔전(屯田)을 일으켜 많은 군곡(軍穀)을 비축, 功을 세웠다. 1594년 9월에는 이순신과 함께 장문포(長門浦) 해전에서 功을 세웠다. 그 뒤 충청수군절도사가 되고 다음 해 황해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남해, 상주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1598년에는 울산 전투에 참가, 명장 양호(楊鎬)를 도와 싸우다 전사하였다. 이순신과 절친한 사이로 전투에서도 서로 도와 이름이 높았다. 1605년(선조38) 선무원종일등공신(宣武原從一等功臣)에 훈록되고 1861년(辛酉) 우의정에 추증되었다. 보성군 오충사, 장흥군 포충사, 고양사 오충사, 광주시 원산사(圓山祠), 정읍시 충렬사(忠烈祠), 금산군 금곡사(金谷祠)에 배향되었다.
2016년 6월 경기도 고양시에 위치한 제 60보병사단 권율부대에서는 임진왜란 때 행주대첩 등 여러 지역 전투에서 큰 功을 세운 선거이 장군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산하 부대를 "선거이 연대"로 명명하였다.

◆ 9세 선세강(宣世綱 1577~1637) : 자는 사거(士擧), 호는 매곡(梅谷)이며, 父는 참의 선봉장(宣鳳章)이다.

1603년(선조 36) 무과에 급제하여 1618년(광해군10)평안도 벽단진첨사(碧團鎭僉使)를 제수받았다. 그 뒤 경기중군(京畿中軍)이 되어 영평산성(永平山城)의 축조를 감독하였다. 당상관이 된 뒤에 홍주영장(洪州營將), 안동영장(安東營將)을 지냈다. 1636년(丙子 인조14) 병자호란 때 경상좌도병마절도사 허완(許完)과 함께 경기도 쌍령(雙嶺)에서 우세한 적과 접전하여 많은 적을 죽였으나 끝내 전사하였다. 병조참판에 추증되었다. 보성군 오충사, 장흥군 포충사, 고양시 오충사에 배향되었다.

◆ 9세 선약해(宣若海 1579~1643) : 자는 백종(伯宗), 호는 강의재(剛毅齋)이며, 父는 대구도호부사를 지낸 선의문(宣義問)이다.
1605년(선조38) 무과에 급제, 선전관(宣傳官)이 되었다. 1631년(인조9) 비변사낭청(備邊司?廳)으로 있을 때, 문무의 재주를 겸비하였다고 추천되어 국서(國書)를 가지고 청나라 심양(瀋陽)에 사행(使行)하였다. 이때 숭명배청(崇明排淸)의 대의(大義)에 입각하여 일을 처리하고 외국의 위력에 굴복하지 않았다 하여 돌아와서 품계가 승진되었다. 이후에 평산부사, 경상좌도수군절도사를 지냈다.
보성군 오충사, 장흥군 포충사, 고양시 오충사에 배향되었다.

포충사 뒤에는 1970년 중건되기 前까지 제향해왔던 7현(퇴휴당, 옥암, 평양, 영모재, 친친재, 매곡, 강의재)의 단비를 매안하지 않고 그대로 세워 두었다.

1921년(辛酉) 4칸 성동강당(聖洞講堂)을 중건하여 묘각, 후손 강학,  문중행사 장소 등으로 이용되었다.

액호 편액은 강당 전면 중앙에 걸려 있고, 낙관 등 기록이 없어 글쓴이를 알 수 없다.

별칭으로 양진당(養眞堂) 또는 영모재(永慕齋)로 불리운다.
양진당 편액은 1920년(庚申) 王月(1월), 영모재 편액은 그해 동지절에 안양면 장수마을 출신

동곡(東谷) 선영완(1878~1938) 근서(謹書)하다. 1921년 현재의 강당이 중건되면서 기존 강당에서 옮겨 걸었다. 매년 10월 14일 강당에서 장흥파 파조 양진당 선대륜(宣大倫) 이하 선조 10위 시제를 모신다.

외문은 양양문(洋洋門)으로 1958년(戊戌) 2월 24일 세웠다.

양양문 액호 편액은 2010년 태풍으로 훼손되어 걸려있지 않는다.

포충사는 사당 1동, 강당 1동, 외문 1동, 관리사 1동으로 조성되어 있다. 재원(財源)은 임야 25정, 논(畓) 20두락, 밭(田) 30두락 등으로 보성선씨 장흥문중 소유로 관리되고 있다.

장흥군 내 후손들의 주요 세거지로는 안양면 고당, 요곡, 장수, 신촌마을  등이다. 이중 현대의 인물로는 선석규(중학교 교장), 선유철(성균관 유도회 장흥군 회장), 선정규(초등학교 교장), 선선정(변호사), 선왕주(내과 원장), 선종근(전남대 의대 교수) 등은 고당마을 출신이다. 선호영(의학박사 선영병원 이사장), 선형성(교수), 선윤규(초등학교 교장), 선세환(안양농협조합장), 선두훈(의학박사) 등은 요곡마을 출신이다. 선웅규(회계사), 선석문(한국 SM 대표이사)은 장수마을 출신이다. 선옥규(보성선씨 대종회장), 선한규(은행지점장), 선양규(전남도청 투자유치 과장), 선석기(대한무역진흥공사 상임이사) 등은 신촌마을 출신이다.
그 밖의 집성촌은 보성군 봉산리, 광산구 송정동·비하, 논산시 마산리, 고양시 매화정마을, 강릉시 송암마을, 울주군 금곡리, 김해시 봉화마을 등이다. 전국 종원수는 4만여명이다.

찾아가는 길은 안양면사무소에서 요곡마을 까지는 1.2km 가량 소요된다.

마을 입구에 도착하여 농로길을 따라 마을 좌측 뒤쪽 산 아래로 가면 포충사가 위치한다.

● 자문 : 보성선씨 대종회장 청계(淸溪) 선옥규(21세 1944년생, 안양면 신촌리 거주), 선창기(21세 1945년생, 안양면 요곡마을 이장)
● 사진 제공 : 마동욱(학송리 태생) 마을 전경 드론사진 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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