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면 수양리 앞에는 장흥~회진 간 23번 국도(장흥대로)가 있다. 마을 뒤에는 억불산이 병풍처럼 감싸고 지류 수대천이 사자산의 지류 도곡천과 합류하여 홍거천으로 이어져 주변 평야를 관수한다.

전면에는 안양면 소재지와 드넓은 운흥들판이 펼쳐져 있다. 수양리는 양옆 산 형세와 마을 앞 도로가 활모양의 궁형(弓形)으로 수서(水西)마을과 양사(養士)마을을 합한 첫 자를 따서 붙여진 지명이다.
수양리 96-2번지(용안로 709-28) 양사마을 언덕바지에는 김해김씨 사현사(四賢祠)가 위치한다.

이곳 사우는 1846년(乙巳 헌종12) 김효좌, 고의진, 기용현 등 전라도 사림들이 제발하여 축은(築隱) 김방려(金方勵), 퇴은(退隱) 김계희(金係熙), 담헌(淡軒) 김극검(金克儉), 절옹(節翁) 김 혼(金 渾) 등의 학덕과 충효 절의를 기리고자 후손 김석률, 김석중의 주도와 장흥 사림 이학량(1770~1845), 순천 유생 정환묵 등의 성력(誠力)으로 3칸 사우를 창건하고 4현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그 후 1868년(戊辰) 서원 훼철령에 의해 훼철되었다가 1898년(戊戌) 설단 복설하였다. 1901년(辛丑) 4월 묘정에 김해김씨사현사유허비(金海金氏四賢祠遺墟碑)를 세웠다.

비신석 상단 두전(頭篆)에 金海金氏四賢祠遺墟碑라 고제영 서(書)하다. 전면에 築隱金先生 東魯春秋, 退隱金先生 西山日月, 淡軒金先生 道德淵源, 節翁金先生 孝行卓越 이라고 썼다. 비문은 안종묵 찬(撰)하고, 후계(後溪) 백영우 서(書)하다. 1973년(癸丑) 사현사유허비중건사실기(四賢祠遺墟碑重建事實記)는 월암마을 출신 백당(栢堂) 위대환(1907~1979) 찬(撰)하다. 이 기록 편액은 분실되어 현존하지 않는다.
1976년(丙辰) 4월 3일 사당을 중건하였다.

1977년(丁巳) 10월 14일 내삼문인 앙지문(仰止門)을 중수하였다.

매년 음 9월 9일 지역 유림의 주관으로 제향해오다가 농촌사회의 고령화에 따른 제향문화 변화 등으로 2015년부터 후손들이 주관하여 제향을 봉행한다. 제향시 장흥군(수양·수락), 보성군, 완도군, 고흥군, 순천시, 여수시, 광양시, 김해시, 고성군, 제주도 등 전국 여러 세거지의 후손 30여명이 참석하고 있다.

배향인물의 행장을 살펴본다.

◆ 54세 김방려(1354~1423) : 자는 여용(汝用), 호는 축은(築隱)이다.

고려 5은(隱) 중에 한사람으로 벼슬이 고려 판종부사(判宗簿事)에 이르렀다. 포은 정몽주와 오랫동안 사귀어 존명척원(尊明斥元)의 대의명분을 위해 힘썼다. 1363년(공민왕 12) 덕흥군(德興君)의 난 때 교주도(현 강원도)에서 징병관을 역임하였고, 부사신으로 사신 전녹생과 함께 원나라에 다녀왔다. 1375년 이 첨, 전녹생, 정몽주 등과 이인임의 친원 정책을 반대하다가 김해 퇴은에 유배되었다. 1388년(창왕1) 위화도 회군 때 이성계(李成桂)를 도와 조선개국에 功을 세웠다. 후에 김해 퇴은으로 낙향하였다. 公의 행적은 김해 김씨김씨 족보인 종부시사 축은공 행장(宗簿寺事築隱公行狀)에 기록되어 있다. 문집으로 축은집(築隱集)이 있다.

◆ 56세 김계희(1400~1455) : 자는 회숙(晦叔), 호는 퇴은(退隱)이다.

1441년(辛酉) 생원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과 예문검열을 거쳐 승평부사 재임 때에는 선정을 베풀고 치적을 쌓았다. 이어서 사헌부 집의, 이조참판, 한성부윤 등을 지냈다. 단종이 숙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되자 관직을 버리고 매월당 김시습, 추강 김효은 등과 더불어 음주양광(飮酒佯狂)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갈건(葛巾)과 야복(野服)으로 산수를 즐기면서 방랑하였다. 세인들은 公을 ″西山日月″이라 하였다.

◆ 58세 김극검(1439~1499) : 자는 사렴(士廉), 호는 담헌(淡軒)이다.

일찍이 생원시와 진사시에 잇달아 입격하고 1459년(세조5)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한림이 되었다. 특히 시문에 능하여 1469년 세조가 양성지 등에게 명하여 연소한 문신을 육문(六門)으로 나누어 배정할 때 성현, 유순 등과 함께 시학문(詩學門)에 선발되었다. 이어서 예문관대교에 올랐는데 당시 발영시에 수석으로 합격하였다. 그 뒤 승문원교리로서 조운사종사관(漕運使從事官)으로 활약 경상도 연변의 군량미 10만석을 함경도로 운송하는 功을 세웠다. 예문관부교리로서 세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여 하고 장령, 예문관응교를 역임하였다. 이후 예종실록 편찬에 참여하고 성종 초년에는 목민관으로 나가 뛰어난 치적을 보였다. 이어 사표(師表)로 추천되고 1477년 다시 장령을 역임하였는데 그때에 신주(辛柱)의 분경죄를 다스리지 못하여 고신(告身)을 빼앗겼다. 1482년 사간이 되어 충청도진휼사의 종사관으로 나가 빈민구제에 힘썼다. 1487년 승정원으로 옮겨 동부승지, 우부승지, 좌부승지, 우승지 등을 역임하고 1491년 홍문관부제학에 제수되었다. 그때 언관으로서 크게 활약하여 제천정(濟川亭)의 역사(役事)가 불가함을 주장하고 여진정벌의 부당함을 역설하였으며 언론의 기능 정상화를 요구하였다. 이로 인하여 성종에게 기피되어 1개월 만에 전라도관찰사의 외직에 제수되었다. 이듬해에 동지중추부사가 되어 정조사로서 명나라에 다녀왔다. 한성부우윤을 거쳐 호조참판에 올라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연산군 때에 지중추부사 등을 지냈다.

◆ 62세 김 혼(1565~1622) : 자는 사형(四亨), 호는 절옹(節翁)이다.
어려서부터 인품이 비범하고 학문이 뛰어났다. 지극 효성으로 부모를 봉양하면서 父의 病(등창)이 오래 낫지 않아 위독에 이르자 종기를 입으로 빨아 병이 나았다. 이후 4년 만에 아버지가 다시 병으로 누우니 밤낮으로 정성을 다해  보살폈으나, 별세하자 3년 시묘를 하면서 풍설를 가리지 않고 묘소를 호위하였다. 公의 효성과 학문이 어사(御使) 성학인에게 발탁되어 조정에 알려져 1606년(丙午 선조39) 특별히 광릉참봉에 제수하였다. 이어 1610년(庚戌) 옥구현감에 제수되고 선정을 베풀어 현민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公의 행장은 1923(癸亥) 정창(廷昌) 안처옥이 지었다.

사당 좌측에는 배향된 4분의 단비(壇碑)가 세워져 있다.

강당은 1955년(乙未) 3월 26일 4칸으로 중건하였다.

강당의 명칭이 없어 액호 편액이 걸려 있지 않는다.

1998년(戊寅) 5월 23일 외문인 숭보문(崇報門)을 중수하였다.

본 사우는 억불산 동쪽 끝자락 언덕바지에 동향으로 건축되었다. 맞바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장소에 위치해 있어 태풍으로 인해 건물이 훼손되는 피해가 수회 발생되고 붕괴될 위험이 있었다.

1996년 1월 문의(門議)에 따라 각 지역 종중과 후손들의 헌성 참여와 장흥군(군수 김재종)의 지원으로 강당, 내삼문를 보수하고 외문을 신축하였다. 대지를 매입하여 축대를 쌓고 주위 담장을 축조하였으며, 사우 진입로와 연결되는 마을 앞 도로 확장 포장공사 등 정화사업을 2003년(癸酉) 완료하였다.
특히 후손 중, 제 28대 성균관 유도회 장흥군지부 회장을 역임한 취헌(翠軒) 김섭흠(축은공 21대손 1930~2004, 안양면 수락리 태생)이 정화사업 추진을 주도하였다.
2004년(甲申) 4월 사현사보존회(회장 김주본)에서

金海金氏四賢祠遺墟碑를 번역(飜譯)하여 세웠다.
경당(絅堂) 신사범(愼思範 1925~2010, 고창군 부안면 태생)이 번역하다.

제주판관공종중 등 17종중과 168명 후손들의 문사 참여 정성을 표하고자 사현사 보수 헌성비를 세웠다.

사현사(四賢祠)는 사당 1동, 강당 1동, 내삼문 1동, 외문 1동, 직사 1동, 4위 단비(壇碑), 유허비 1기, 번역 유허비 1기, 보수 헌성비 1기 등으로 조성되어 있다.

재원(財源)으로는 임야 11정, 논(畓) 16두락, 밭(田) 9두락, 기타 대지 118평 이다. 김해김씨 축은공문중 소유로 관리되고 있다.

찾아가는 길은 (구)안양서초등학교 앞 수양 삼거리에서 안양면 모령리 방향으로 오다보면 수양마을 앞을 지나면 우측 도로변에 사현사 안내 표지석이 위치한다. 표지석 옆 입로를 따라 오르면 산 아래 사우 건물이 위치한다.

자문 : 김영주(축은공 22대손 1952년생, 안양면 수락마을 거주, 사현사 총무)
사진 : 마동욱(안양면 학송리 태생) 드론 사진 2장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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