栢江 위성록/장흥위씨 씨족문화연구위원

장흥군 안양면의 진산(鎭山) 사자산(獅子山 666m) 아래에는 수원백씨의 집성촌 기산리가 위치한다.
인근의 동계마을은 행정구역상 기산마을 동계에 속해 있었으나 1980년 동계마을로 새롭게 마을명을 구성하였다.

풍수설에 의하면 마을은 챙이(키) 형국이라서 챙이 끝부분은 터가 좋지 못하다 하여 챙이 안쪽으로 들어와 마을이 조성되어 있어 이를 뒷받침 한다. 조선조가 건국되면서 불복신(不服臣) 마을로 폐촌되었다. 그 후 중엽 선조 때 기산 팔문장의 한분인 백광성(白光城)이 장흥의 제일(第一) 기산마을 동계 청계재(聽溪齋)에 터를 잡고 후학을 수학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안양면 기산리 67번지(동계길 33-26), 동계마을 안쪽에는 기양사(岐陽祠)가 위치한다.

이곳은 불복신(不服臣)으로 알려진 정신재 백 장(白莊) 선생을 중앙에 모시고 이하의 분을 좌우로 모시는 소목식(昭穆式) 형태의 13현(顯)의 위패를 봉안한 유서 깊은 사우이다.
이곳은 원래 기산 팔문장인 남계(南溪) 김 윤, 서곡(書谷) 임 분, 죽곡(竹谷) 임 회, 기봉(岐峯) 백광홍, 동계(東溪) 백광성, 풍잠(風岑) 백광안, 옥봉(玉峯) 백광훈, 지천(芷川) 김공희 등 8분 선생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장흥 유생 지지재(止止齋) 이상계(인천人 1758~1822) 선생 등이 제발하였다. 조정에 청사소(請祠疏)를 계청(啓請)하고 사림들과 백진항, 백사찬 등 후손들의 진력과 헌성으로 1808년(戊辰 순조8년) 창건되어 향사해왔다. 1868년(戊辰 고종5) 흥선대원군(李昰應)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어 매안하였다.
1901년(辛丑)에 복설하면서 정신재(靜愼齋) 백 장을 비롯하여 정해군(貞海君) 백수장, 사주당(思周堂) 백문린, 석담(石潭) 백한남, 술고당(述古堂) 백민수 등 5位를 추배하고 정신재(靜愼齋) 선생을 주벽으로 향사해오고 있다.
이후 1972년(壬子) 유사(有司) 백종기, 백준흠의 진력으로 3칸의 사우로 중건하였다.

1974년(甲寅) 내삼문인 동광문(東光門)을 복원하면서 모선에 앞장선 백채덕, 백여인의 의연비를 세웠다.
제향은 매년 陰 9월 상정일(上丁日) 지역 유림에서 주관하여 봉행한다.
1999년(乙卯) 2월 26일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 207호로 지정되었다.
그해 입동(立冬) 국무총리 김종필(金鍾泌 1926~2018)이 액호 편액을 썼다.
사당 좌측에는 1901년 기양사가 복설(復設)되면서 세운 단비가 있다.

1972년 중건 때 매안(埋安) 되었으나, 1998년 문화재 지정을 앞두고 고증을 위해 다시 발굴하여 세웠다.

배향인물(配享人物)의 행장을 살펴본다.

◆ 主壁 백 장(白 莊 1342~1418)
수원人으로 자는 명윤(明允), 호는 정신재(靜愼齋)이다.

포은 정몽주 문하에서 수학하여 16세 때 진사시에 입격하고 25세 때 원나라 제술과(製述科)에 장원으로 등제하여 한림원시독사(翰林院侍讀士)가 되었다. 고려 공민왕 때 광정대부 조전서 보문각 대제학 태자소보(匡靖大夫吏曹典書 寶文閣 大提學 太子少保))에 이르렀다. 원주 치악산에 은거 중, 이성계가 등극하여 公을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자 충청도 해미(海美)에 유배당하였다. 태종이 다시 불렀으나 불응하여 장수(長水)로 적거(謫居 재유배)를 옮겨 청심정(淸心亭)을 세우고 유배당한 황희(黃喜)와 어울려 시를 지으며 유배생활을 하였다. 유배지에서 졸하니 태종이 동방의 백이(伯夷)라며 의정부 영의정 겸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등을 추증하고 예관을 보내 치제하였다. 원주시 죽림서원에 배향되고 상덕사(尙德詞)라 사액하였으며, 장수군 월강사, 장흥군 기양사에서 제향을 모시고 있다.

◆ 백수장(白壽長 1469~1543)
수원人으로 자는 팽조(彭祖)이다. 1498년(연산군 4년) 무과 중시에 장원급제 하여 영흥판관(永興判官)에 제수되고 사복시첨정(司僕寺僉正), 도사(都事), 무과중시관(武科重試官) 등을 거쳤다. 1506년(연산군 12) 연산군의 실정에 반기를 들어 중종반정(中宗反正)에 참여하여 중종(中宗)을 옹립하니 반정공신으로 3등훈에 책록되고 병충분의정국공신(秉忠奮義靖國功臣)의 칭호와 정해군(貞海君)으로 봉하였다. 1509년(중종 4)에는 전라도 진도(珍島)에서 민란이 이어지자 진도군수(珍島郡守)에 제수되어 민심을 안정시키고 질서를 회복시켰다. 이후 훈련원도정(訓練院都正)을 거쳐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지냈다. 노년에 귀향하여 장재도에 백사정을 짓고 이곳에서 여생을 보냈다. 안양면 수양리에 신도비가 있다.

◆ 백문린(白文麟 1482~1544)
수원人으로 자는 자정(子禎), 호는 사주당(思周堂)이다. 학포 양팽손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정암 조광조와 도의교를 맺고 修己治心 理學究明에 힘써 후학을 가르치는 일에 힘썼다. 중종이 침랑(寢郞)에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고 경전에만 전념하였다. 다시 봉자전참봉(奉慈殿參奉)에 제수되었다가 명종 원년에 졸하였다.

◆ 김 윤(金 胤 1506~1571)
광산人으로 자는 찬중(纘中), 호는 남계(南溪)이다. 영천 신잠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1570년(선조 3) 사마시에 입격하고 효행으로 천거되어 참봉을 제수 받았으나 나아가지 아니하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 임 분(林 ? 1501~1556)
부안人으로 자는 성보(成甫), 호는 서곡(書谷)이다. 영천 신잠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1540년(중종 35) 사마시에 입격하고 1540년 교수가 되었다. 평생을 경전(經傳)과 역전(易傳)을 강구하고 현량지사와 교분을 나누었다.

◆ 임 회(林 ? 1508~1556)
부안人으로 자는 헌가(獻可), 호는 죽곡(竹谷)이며 초휘는 誨(회)다. 오봉 이호민 문하에서 수학하여 1534년(중종 29) 사마시에 입격하고 1540년에 문과에 등재하여 호당(湖當)에 뽑히고 공조정랑(工曹正郞)을 거쳐 남원, 상주, 순창, 나주, 광주, 능주 등 8주 목사를 지내고 검상(檢祥)에 올랐다. 부경(赴京)사신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천거되어 명나라에 들어가 그 곳 이름 있는 여러 학사들과 교유한 바가 있다.

◆ 백광홍(白光弘 1522~1556)
수원人으로 자는 대유(大裕), 호는 기봉(岐峯)이다. 일재 이항 문하에서 수학하여 1549년(명종 4년) 사마시에 입격하였다. 1552년 문과에 등제하여 홍문관 정자(正字)에 임용되고 시부회(時賦會)에서 장원하여 선시십권(選詩十卷)을 특사 받고 호당(湖堂)에 뽑혔다. 1555년(명종 10)에 평안도 평사가 되어 재임하던 중 관서지방의 절경을 가사로 나타낸 관서별곡(關西別曲)은 우리나라 기행가사의 효시가 되고 있다. 35세로 졸하니 公의 시문(詩文)이 뻗지 못함을 아쉬워하면서 1987년 11월 전국 가비동호인회에서 묘가 있는 부산면 호계리 운치에 가비(歌碑)를 세웠다. 2008년 기산마을에서 마을가꾸기 사업으로 촌전에 관서별곡, 동지부등 시가비를 세웠으며 팔문장의 대표시비도 세워서 전국 대상을 받았다.

◆ 백광성(白光城 1527~1567)
수원人으로 자는 대한(大?), 호는 동계(東溪)이다. 기봉 백광홍의 종제로 1561년(명종 16) 사마시에 입격하였으나 과업(科業)을 버리고 은거하면서 오로지 후진교육에 여생을 보냈다.

◆ 백광안(白光顔 1527~1567)
수원人으로 자는 이수(而粹), 호는 풍잠(風岑)이다. 기봉 백광홍의 제로 과업(科業)에 나아가지 않고 재가하여 학문에 전념하여 문장으로 이름을 날렸다.

◆ 백광훈(白光勳 1537~1582)
수원人으로 자는 창경(彰卿), 호는 옥봉(玉峯)이다. 기봉 백광홍의 제로 청연 이후백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13세에 상경하여 양응남, 노수신 등에게 사사(師事하였다. 1564년(명종 19)에 진사가 되었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오직 시서(詩書)에 열중하였다. 1572년(선조 5년) 명나라 사신이 오매 노수신을 따라 백의제술관(白衣製述官)이 되니 명나라 사신이 감탄하여 백선생이라 했다. 1577년(선조 10) 선능참봉(宣陵參奉을 시작으로 정릉(靖陵), 예빈사(禮賓寺), 소격서(昭格署)의 참봉을 지냈으나 벼슬보다는 시(詩)로 이름을 날려 삼당시인(三唐詩人)이라 하였다. 公의 유묵(遺墨)이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1981년 해남군 옥천면 송산리에 옥봉유물관이 세워졌다.

◆ 김공희(金公喜 1540~1604)
광산人으로 자는 지명(之鳴), 호는 지천(芷川)이다. 1564년(명종 19) 사마시에 입격하고 1580년(선조 13) 문과에 등제하였다. 임진왜란에 왜적과 싸워 전공을 세우고 군수(郡守)를 제수 받아 6군을 돌며 선정을 베풀었다.

◆ 백한남(白翰南 1567~1639)
수원人으로 자는 자우(子羽), 호는 석담(石潭)이다. 현 보성군 회천면 봉강리에서 태어나 백사 이항복 문하에서 수학하고 1589년(선조 22) 무과에 장원급제 하여 벼슬이 府使(부사)에 이르렀다. 임진왜란에 의주까지 선조를 호종하여 호성원종공신에 훈록되었다. 1598년 정절사(正節使) 이항복을 수행하여 명나라에 갔었다. 용모가 수려하여 중국인들이 公의 화상을 그려 팔 정도였다 한다.

◆ 백민수(白民秀 1577~1615)
수원人으로 자는 기원(起元), 호는 술고당(述古堂)이다. 임진왜란 때 풍암 문위세를 따라 의병을 모집하고 정사제와 더불어 장수, 성주, 개령, 금산, 이현, 무주 등을 돌며 적과 싸워 큰 功을 세워 제용감직장(濟用監直長)에 제수되었다. 정유재란에서도 문위세와 함께 용담에서 전투를 하여 적을 대파하므로 선무원종훈에 훈록되었다. 나주영장, 안동영장, 부사 등을 지낸 손자 백한상에 힘입어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원래의 강당은 1958년(戊戌) 장흥읍 월평에 거주한 백우인(1895~? 관산읍 당동 태생)의 사랑채를 뜯어 옮겨 기양강당(岐陽講堂)을 중건하였다.

기양사 중건기는 1974년(甲寅) 봄  후학 소성(?城) 이병교(인천人 1898~?, 부산면 호계리 태생, 제 10대 장흥향교 전교 역임) 근지(謹誌)하다.
강당중건기는 1999년(乙酉) 이른 가을 후학 백달순(1932~2003) 근술(謹述)하다. 반남人 박복서 근서(謹書)하다.

이후 1999년 전라남도(도지사 허경만)에서 기양사 정화 문화사업 지원으로 5칸 강당을 신축하였다. 이때 후손 백형훈, 백낙홍, 백정, 백종헌, 백광준, 백 익 등이 주선과 진력을 아끼지 않았다.
강당의 액호 편액은 송곡(松谷) 안규동(죽산人 1907~1987) 선생이 쓴 것으로 기존 건물에서 옮겨 걸었다.
기양강당 입구에는 정해군 백수장의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비신석(碑身石) 상단 전자(篆字)는 秉忠奮義靖國功臣資獻大夫工曺判書貞海君白公神道碑銘 이라 새겼다. 1900년(庚子) 11월 하순(上章困敦 復月 下澣) 면암 최익현(1833~1906)선생 찬(撰)하다. 1901년 8월 20일(翌年 仲秋 二十日) 14세손 중인 서(書), 13세손 영직 전(篆), 執議 주인, 門長 기옥이라 새겨 수원백씨 주산문중에서 세웠다. 이 신도비는 원래 안양면 당암리 청송마을 뒤에 세워져 있던 것을 6.25 전쟁 후 일부 훼손에 따라 1956년(丙申) 현 위치로 옮겨 세웠으며, 수양리 355-2번지 장흥읍~회진면 간 23번국도 도로변에 같은 기록의 오석(烏石) 신도비를 그해 9월 17대손 백종기 근서(謹書)하여 중수(重竪)하였다. 현재 정해군 백수장의 신도비는 2기가 있다.

본 사우는 대지 2,000여평에 사당 3칸 1동, 강당 5칸 1동, 내삼문(東光門), 외문, 직사 1동, 기타 부속건물 2동, 신도비 1기, 의연비 등

비석 5기, 표지석 4기, 안내판 1점, 주차장 등으로 조성되어 있다.
재원(財源)은 임야 2정, 제위답 7두락으로 기양사 법인 소유로 관리되고 있다.

17세조 백맹춘(白孟春)의 대표적 후인은 기봉(백광홍), 옥봉(백광훈), 동계(백광성), 백광린으로 후손들의 세거지는 기산, 동계, 비동, 수양, 모령마을 등 안양면 일원과 관산읍 당동, 해남군 옥천면 송산리, 광양시 태인동, 고흥군 점암면 장남리 등이다.
이중, 백형조 前 전라남도지사( 고흥군 장남), 백혜련 국회의원(수원시을, 모령), 백형구 前 검사장(수양), 백형순 변호사(수양), 백영홍 前 전남대학교 의과대학장(기산), 백수인 조선대학교 국문과 교수(동계), 백주선 변호사(동계), 백 건 변호사(기산), 백광철 장흥군의회 의원(기산), 백홍철 한미파슨스 상무이사(기산), 백두선 판사(비동), 백도인 백산건설 회장(장흥읍), 백운기 KBS 보도본부 해설위원(해남군 송산리), 백인순 KBS 기자(광양시), 백승호(전 전남경찰청장,변호사), 백종대(서울시 교육청이사관), 백무준(순천향대 병원 부원장,교수), 백자성(육군 준장) 등이 현대의 대표적 인물이다.

찾아가는 길은 남부관광로를 이용하여 장흥읍 방향에서 안양면 방향으로 가다보면 기산리 동계마을 삼거리에서 좌회전 하면 마을 입구에 기양사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마을길 300여미터를 들어가면 마을이 위치한다. 마을 중앙길을 따라 가다보면 막다른 곳에 기양사가 위치한다.

자문 : 남강(南崗) 백균(1940년 용산면 상금리 거주), 기암(岐菴) 백광철(1956년 안양면 기산리 거주, 장흥군의회 의원)
드론 사진 1장 : 마동욱(안양면 학송 태생) 향토사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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