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 장흥회? 언뜻 들으면  일본에 거주 하는 재일동포들의 모임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것 같다. 그러나 이 모임은 순전히 일본인들의 모임이다. 구성원들은 일본 전역에  거주 하고 있고,매년 1-2회의 모임을 갖고 친목(?)을 다짐 한다고 한다. 이쯤 되면 짐작이 되겠지만 이 모임은 일제 강점기에 장흥에 살다가 패전 후 일본으로 돌아간 이들의 모임이다.

필자는 우연한 기회에 장흥회의 회장격인 일본인을 알게 되었고 이들이 발행하는 회지격인 ‘장흥회지 長興會誌’를 받아보게 되었다. 40여쪽의 이 회지는 1979년 5월(일본식 년호로는 쇼와昭和 54년) 발행 일자가 명기되어 있었고 부제副題는 ‘탐진강耽津江’이었다.
회지에는5-6편의 회원 기고문이 게재되어 있었는데 참으로 흥미로운 대목이 많이 있었다.
그 중의 한편의 제목은 ‘현해탄의 12시간玄海灘 十二時間’이었다. 패전 후 장흥을 떠나 일본으로 돌아가는 장흥 거주 일본인들의 상황을 사실적으로 기록한 내용이었다.

1945년 9월26일부터의 기록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다.
‘장흥에서 일본으로 돌아갈 일본인들은 약 8-9백명쯤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패전 후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어떻게든 일본으로 돌아가기 위하여 혹은 개별적으로 혹은 무리를 지어 방법을 찾고 있었던 일본인들 중 이 기록에 나타난 숫자만 거의 1,000여명에 이르고 있다는 사실이 아연했다. 유추 하건대 일제강점기에 우리 장흥에 거주한 일본인들이 1,000여명을 훨씬 넘어선 숫자였다는 사실이다.
당시 장흥군 전체의 인구가 얼마였을까?.
이들 1,000여명의 일본인들은 장흥의 관직, 교육직, 상업, 농업, 운수업 등 모든 분야의 우월한 위치에서 군림하고 수탈하고 행세하는 신분과 위치를 향유하는 침략의 선봉이었을 것이 아닌가. 이들 9백여명의 일본인들은 필사적으로 한국을 떠나기 위하여 단체로 모여 방법을 찾았다. 그래서 5척의 목선(密船)을 준비 하였다. 배 한척에 당시에는 엄청난 거금인 9만엔-12만엔에 구입 하여 5척이 1945년 9월26일 수문포항을 출항 하였다.
항해의 과장은 실로 어려웠다. 미군의 검사, 기항한 항구에서 조선인들의 검색 등 쉽지 않은 여정이었다.
이렇게 출발한 5척의 배는 3척은 무사히 일본에 도착 하였지만 한척은 기뢰와 부딪쳐 완전히 침몰 하였다. 그 중 한척은 항해중에 부유기뢰와 충돌하여 선미가 파손되어 침수되어 조금씩 침몰해 가고 있었다. 기고자는 이 침몰해 가는 배에 탑승한 이였다.
사력을 다해 물을 퍼내었지만 배는 침몰해 가고 있었고 눈 앞에서 노모와 형제와 아들과 동족들이 파도에 힙쓸려 죽어가고 있었다 그 절명의 시간에 화물선 한척이 다가왔다. 살아남은 이들이 간절한 몸짓으로 구명을 요청했다. 가까이 다가온 화물선에는‘경상남도 송도환’이라는 선명(船名)‘이 선명하게 씌여 있었다.

송도환의 선장은  수몰 직전에 남아있는 20명의 일본인들을 구명 하였다.
그 날이 11월3일 오후 3시30분 경이었다. 선장은 굶주리고 지친 일본인들에게 식사도 대접 하면서 자신은 시모노세키에서 한국으로 귀국을 하고자 기다리고 있는 가족들을 데리러 가는 길이라고 했다.
한없이 고마운 송도환의 선장 때문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일본인들은 11월4일 시모노세키에 도착 하였다.

시모노세키항에는 한국으로 돌아가려고 기다리고 있는 한국인들이 수천명도 넘게 모여 있었다. 그들이 도착하자 많은 한국인들이 한국의 사정을 알고 싶어서 찾아 왔다. 먼 북해도에서 몇 날 몇 일 동안 걷고 기차에 메달려 시모노세키에서 배편을 구하려고 왔다는 한 한국인은   한국의 이야기를 듣고 거금 40엔을  고마움의 표시라고 주기도 했다.
우리 일행 중 갓난아기를  데리고 오던 동족은 그 아기가 복통으로 시달리다가 죽은 안타까운 처지여서 근처의 병원에 들려 ‘사망확인서’발급을 부탁 하였다. 동족인 일본인 의사는 수수료를 내지 않으면 ‘사망확인서’를 발급할 수 없다고 거절 하였다. 우리에게는 돈이 없었다. 그런데 마침 북해도에 왔다는 한국인이 도와준 40엔이 있어 수수료를 내고 확인서를 발급 받을 수 있었다.

패전 후 장흥의 한 장소에 모여 일본으로 돌아갈 계획들을 의논하고 있을 때 장흥 사람들이 말했다고 한다.
‘당신들은 살아 돌아가는 것을 다행이라 생각하고 재물 같은 것은 가지고 갈 꿈도 꾸지 말아라’ 맞는 말이었다.  우리는 그저 고마울 뿐이었다. 한 장흥회 회원의 회고였다.
침몰해 가는 일본인들을 살려준 배의 선장은 한국인이었다. 고국의 소식을 알게 해 주어서 고맙다고 40엔의 돈을 건네준 이도 한국인이었다.

장흥에서 살다가 패전 후 일본으로 돌아간 일본인들은 경제가 회복되고 1965년 이후  한.일 관계가 회복되자 서로 수수문 하여 연락을 취하고 모이고 옛날 이야기들을 나누다가 ‘장흥회’라는 단체를 만든 것으로 추측이 된다.
 그 장흥회는 한.일간의 왕래가 자유로워지자 단체로 수 십여회 장흥을 방문 하였다고도 한다. 그들은 어떤 생각을 하면서 장흥을 찾아 왔을까. 40여년을 강점한 군국주의, 대동아공영, 식민사관의 우월감을 회상 하는 장흥 방문이었을까.
관직에서 금융업과 상업에서 상대적으로 지배적이었던 강점의 시대를 회상 하고자였을까.
패전의 입장에서 한국인들이 어떤 위해를 가해도 속수무책으로 당했을 처지에서 살아 돌아 갈 수 있었다는 고마움을 전하고자 찾아 왔을까 침몰하는 왜놈들을 외면 하지 않고 구해준 한국인 선장, 고국의 소식을 알려 주어서 돈으로라도 고마움을 표시한 참으로 양심적인 한국인을 기억하고 감사해 하는 방문이었을까.

필자가 듣기로는 일본에는 ‘장흥회’와 유사한 ‘목포회’ 등 한국의 지역 이름을 빌린 모임들이 많이 있다고 한다. 
40여년의 강점기에 일본인들이 국권을 찬탈하고 지배하고 학살하고 투옥하고 징용에 동원하고 위안부로 능멸하였던  일본인들의 만행을 생각 하면 패전 후 일본인들을 살아 돌아 갈 수 있도록 자제했던 한국인들의 대의적인 심정을 아는지 묻고 싶어 지는 것이다.
‘장흥회’ 따위의 모임이 장흥인들에게 어떻게 이해 될지를 생각이라도 해 보았는가.
그들에게 당부 한다. 1세대 당사들은 거의 죽었겠지만 그 후손들이 일상과 생업을 향유 하는 것은 무사히 살아 돌아갈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살아 돌아갔고 구명과 감사의 사례를 잊지 않았다면 반성하고 회개하고 엎드려 사죄하며 한국과 일본의 새로운 미래 시대를 여는 언행을 보여 주라.

아베와 그 일당들에게 저항 하라. 그것이야 말로 ‘살아 돌아가 대를 잇고 사는’당신들의 책무인 것이다.

저작권자 © 장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