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栢江 위성록/장흥위씨 씨족문화연구위원

장흥군에는 호남5대 명산 천관산(723m) 등 산세가 뛰어난 산이 많다. 이중에 제일 높은 제암산(807m)은 장동면·안양면에 걸쳐 있으면서 보성군 웅치면과 경계되고 있다. 정상에 수십 명이 한자리에 앉을 수 있는 바위를 향하여 주변의 여러 바위와 봉우리들이 임금에게 공손히 절을 하고 있는 형상이어서 임금바위, 즉 제암(帝岩)이라고 하며 산 이름을 제암산이라 부른다. 곰재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연결되어 있는 산은 안양면의 진산 사자산(666m)이다.

임금 뒤 자리에 한일(一)자 형태로 병풍이 길게 펼쳐진 형상을 하고 있다. 다르게는 임금님 뒤에 치는 병풍이란 뜻의 임금 어(御)자에 병풍 병(屛)자를 붙여 어병산(御屛山)이라 불리고 있다. 산 아래 자락에 비동리가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예로부터 운림(雲林)과 천석(泉石)이 아름답고 식수와 땔감이 넉넉하며, 전답이 넓어 외지에서 초계卞氏 등 20여 성씨들이 입촌하였다.

1941년 이전에는 비동(飛洞)과 동촌(東村)으로 나뉘어 있었으나,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지명의 앞 첫자를 따서 비동리(飛東) 단일마을이 되었다. 현재는 장흥위씨, 평택임씨, 수원백씨, 김해김씨, 광산김씨 등 10여 성씨, 70호 가량 거주하고 있다.
이중 지난날 동촌마을에서 거주하면서 학문이 뛰어나 후학을 강학하여 풍속 교화 등 마을 발전에 공헌한 병은(屛隱) 위찬식(魏贊植) 선생의 흔적이 남아 있기에 소개하고자 한다.

■ 위찬식(1892~1962) : 자는 운중(雲仲), 호는 병은(屛隱)이다. 안항(顔巷) 위덕후는 9대조, 진사 영이재(永而齋) 위문덕과 생원 서계(書溪) 위백순은 5대조와 고조이다. 부친 위윤기와 수원백씨 사이에서 5남 1녀 중, 차남으로 용산면 상금리에서 태어났다.

어릴적부터 총명하고 돈돈하며 부지런하였다. 부친의 가르침과 잠계(潛溪) 백형기(1881~1948) 선생의 문하에서 晝耕夜讀으로 수학하여 문학과 예능이 성취되었다.
1931년 중년 연령 때, 長子 운식(芸植 1880~1920), 四子 이식(利植 1897~1961), 五子 정식(禎植 1902~1982)은 용산면 상금마을에서 안양면 목단마을로 이거하였다. 선생은 三子 남식(南植 1895~1958)과 함께 안양면 동촌마을로 입촌하였다. 1943년(癸未) 마을에서 서재를 열어 중암(重菴) 김평묵(1819~1891) 선생의 학문을 본받아 행실과 법도를 지키면서 후진을 장려하여 성취시켜 정학(正學)에 앞장섰다. 당대 선생의 문하에는 기산, 동계, 비동, 동촌, 월암, 고당, 여암, 운정 등 주변 지역 출신 100여명의 학동(學童)들이다. 또한 틈을 내서 선대 향촌인 관산읍 방촌리 장천재(長川齋), 다산재(茶山齋)에서도 강학을 하였다. 묘소는 비동리 뒤 대원등 아래 307번지 內子坐다.

선생이 타계하자 문하생들은 선생의 뜻을 받들고 일관된 삶을 산 스승을 높이 평가하고, 덕을 빛내며 정신을 이어 받고자 “게으르지 말자”는 뜻의 ‘무해계(無懈契)’를 조직하였다.

1987년(丁卯) 평택 임동귀 외 70명 문하생들은 마을 앞 회관 주변 도로변에 선생의 강학과 후진 교도를 찬하여 屛隱先生魏公行蹟碑를 세웠다.(현재 문하생 15명 가량이 생존한다.)
비문은 단기 4312 1979년(己未) 1월 1일 정양지초길(正陽之初吉) 족증손 백당(栢堂) 위대환(1907~1979, 월암마을 태생)이 근찬(謹撰)하다.
8년 후 1987년 2월 송천(松泉) 김태경(영광人 1918~2001, 부산면 내안리 태생) 근서(謹書)하다. 무해계에서 근수(謹竪)하다.
병은(屛隱)선생은 슬하에 2남 4녀를 두었다. 2남 중, 장자는 계현(啓玹 1929년생, 동촌마을 거주), 차자는 계후(啓侯 1931년생, 관산읍 수동마을 거주)이다.

2014년(甲午) 7월 자(子) 계현, 계후는 국역(國譯) <屛隱遺稿>를 간행하였다. 번역은 녹양(綠洋) 박경래(1946년생, 장평면 녹양리 태생) 고문연구원장이 하였다.
 
안양면 비동리 214번지(비동동촌길 41-1)에 위치한 한옥은 선생이 거주한 가옥으로 병은서옥(屛隱書屋)이라 한다. 선생이 용산면 상금마을에서 이사올 때 前 거주인 평택 임태호에게 매입하였다고 한다.
당시에는 초가집 이었으나 기와로 개축하였다.

안채 상량문에는 道光 三年인 1823년(癸未) 2월 6일로 기록되어 있어 196년 前에 건축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집안 내에는 여러 글 액자가 걸려 있다. 이중에는 보성강 강물을 먹물로 물 드렸다는 일화를 남긴 설주(雪舟) 송운회(여산人 1874~1965, 보성군 율어면 금천리 태생) 선생이 노년에 쓴 일심(一心), 병은서옥(屛隱書屋), 병풍첩 등이 소장되어 있다. 설주 선생과는 18살 차이임에도 우애가 각별하여 병은서옥에 자주 들러 보름 이상을 묵고 지냈다고 한다.

장자 유헌(裕軒) 계현丈은 선친으로부터 사서삼경(四書三經) 등 학문을 수학한 현세 마지막 한학 선비로 장흥지역에서 학문이 알려져 있다. 청장년시절에는 대덕, 명덕, 안양, 유치 등의 초등학교 교직에 15년 몸담았다. 이후에는 고흥군 해창만 간척사업 등에 종사하였다.

세예에 조예가 깊어 2003년 관산읍 방촌리에 위치한 선대 사우 다산사(茶山祠) 중건(重建)시 외문인 계연문(桂蓮門)의 상량문을 썼다. 장흥읍 원도리 연곡서원(淵谷書院) 등 장흥지역 주요 사우 제향 및 인근 나주시, 화순군, 장성군 내 위치한 여러 원사(院祠)에 참여해왔다. 또한 기산마을 광산노씨 효행비 등 여러 비문을 지어 지역 유도(儒道)발전에 공헌하였다.

차자 덕천(德泉) 계후丈은  중등학교 교직에 몸담아 정년 퇴임하였다.
장흥위씨 도문회보의론연구위원, 장천문계장 등을 맡아 문사를 이끌었다. 성균관 유도회 장흥군지부 관산읍지회장 역임 등 유도발전에 공헌하였다.

손자는 예비역 소령 해파(海波) 향량(1950년생 동촌마을 거주, 대한민국 미술대전 서예 심사위원), 상량(1953년생), 옥량(1956년생)은 계현 출(出)이며, 선량(1955년생), 규량(1962년생), 창균(1965년생)은 계후 출(出)이다. 이하의 손은 생략한다.

<병은 선생 위공 행적비 국역문>
일찍이 들으니 옛날 군자는 조신하게 도를 지키고 의연히 쉼 없이 하며 오직 행실을 돈독히 하고 효도와 우애로 가정을 다스리고 후학들을 성취 시키는일로 자신의 책임을 삼았기에 해가 갈수록 덕은 더욱 높아지고 사후에 그 이름이 더욱 뛰어나 사람들이 유구하게 추모하고 잊지 못하였다. 그런데 지금 나는 병은거사 위공을 보니 거의 옛날 군자의부류와 가까운 분이라 할 수 있었다. 공의 휘는 찬식(贊植), 자는 운중(雲仲)이다. 진사 춘곡(魏文德)과 생원 서계 위백순(魏伯純)은 공의 5대조와 고조이며 직헌 윤기(潤基)는 공의 선친이다. 공은 어릴 적부터 총명하고 또 돈돈하며 부지런하였다. 잠계 백형기(白亨璣) 선생이 강학하는 서재와 집과의 거리는 한 마장(1km) 쯤 되었으나 부친의 명을 받고 밤이면 반드시 배우러 갔고 주경야독의 공부를 열심히 하여 문학과 예능이 일찍 성취되었다. 당시의 홍의재 위봉(魏棒) 선생은 중암 김평묵(金平默) 선생의 수제자로 금능(강진군 칠량 영풍리)에서 강학을 하였는데 공은 부친의 명을 받고 찾아가 위기(1)의 학문과 존양(2)의 의리를 얻어 듣고 더욱 스스로 분발하고 매진하여 명성이 널리 알려졌다. 당시의 명성으로 우리문중의 오헌 계룡(啓龍)과 계은(大良) 같은 두 분도 계셨으나 또한 병은 공을 먼저 맞이하여 자질들을 가르친 것은 내실이 없었다면 그리 하였겠는가?
효성과 우애는 거의 천성적이었기에 부모를 봉양하며 지체(3)를 겸하였다. 부모의 상을 당하여서는 정과 예를 다하였다. 가끔 묘소를 찾아가면 필히 곡하며 이르기를 “고인이 부모의 품에 들어간 듯하다.” 하더니 그 말이 맞는 말이다. 라고 했다. 형제 5명중 공은 둘째였기에 위로는 형에게 공손하고 아래로는 아우를 사랑하며 일가친척 간에 한 번도 낯을 붉힌 일이 없었고 은혜와 의를 후하게 지켰으며 또 성품은 정의심이 많았다. 가끔 왕실을 염려할 때는 원안(4)과 같은 슬픔을 금하지 못하였고 십이역대 성군들이 주나라 법도를 존중하고 오랑캐를 물리친 다는 존이주양(5)에 관한 책을 읽어 내려갔다. 주자선생이 지은 <재거감흥(齋居感興)> 시와 증암 김평묵 어른이 지은 <해거관물(海居觀物)> <대명매인(大明梅引)>등의 시를 외우며 울적한 기운을 풀었다. 몸가짐이 신중하고 성실하며 일찍히 나라의 걱정을 잊지 않았다. 현인을 모신 사당이나 예를 닦는 자리에는 요청이 있을 때마다 곧 참석하였는데 사람들도 기쁘게 공을 맞이하기를 훌륭한 자리에 차윤(6)처럼 대하였다. 중년에 어병산 아래 동촌으로 이사하였는데 그 곳은 운림(雲林)과 천석(泉石)이 매우 아름다웠다. 그러므로 기뻐하며 마을 사람들도 공에게 자제들을 가르쳐 주기를 청하고 학도들도 풍문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기에 글방에 다 수용할 수 없었으나 공은 교육에 힘쓰면서 많은 저술을 남겼다. 학도들이 점점 문리를 깨달으면 반드시 <사례편람(四禮便覽)>을 읽게 하면서 말하기를 “이 책은 도암 이재(李縡)선생 제현들이 지은 예문을 절충하여 만든 책이니 먼저 읽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또 송나라 정이천이 말하기를 “횡거 장재(7)가 예서로 학생들을 가르친 것은 가장 잘 한 것이라고 하며 후학자들은 먼저 이것을 근거로 하여 지켜야 한다.” 하였으니 그 말이 어찌 우리를 속이는 말이겠는가? 이런 교육을 시행한지 몇 년 만에 마을 풍속이 크게 바뀌고 다수가 학문을 돈독히 하고 예가 높아졌다. 향리의 인사들은 모두 공의 문하에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였으니 마치 촉 땅의 문옹(8)과 같았다. 지금까지 세월이 쌓인 끝에 스승을 맞이하고 학당을 설치한 것도 공의 유풍 때문이다.
1962년(壬寅) 8월 21일 졸하고 1892년(壬辰)에 출생하였는데 향년 71세이다. 문도들이 게을리 하지 않고 계를 조직해 추모의 정성을 표하기 위해 넓은 도로가에 비를 세워 스승의 덕을 빛내기로 하였으니 더욱 사제의 의리를 볼 수 있다. 공자도 말하기를 “사람이 늙도록 교육이 없으면 죽을 때 돌이켜 생각할 것이 없다.” 하였으니 공은 참으로 잘 가르치고 신후(身後)에 생각하고 볼 점이 많다고 하겠으니 앞에서 말한 대로 옛 군자의 한분이 아니겠는가? 문생들이 공의 아우 정식(禎植)씨의 소개를 받아 나 대환에게 비문을 청하였다. 나는 공과 가까운 서계공의 후손이고 또 평소 존경하는 분이었기에 비록 글재주는 없으나 어찌 감히 이 일을 사양할 수 있겠는가? 옛날 송나라 구양공(9)도 말하기를 “비석에다 새겨서 후세에 알리는 것은 지금 세상 사람을 권면하려고 한 것이다.” 고 했는데 공의 사행도 세상에 권할 일이 많으므로 삼가 사실을 모아 기록하였다. 위하여 명을 하노니 중암선생의 사숙으로 행실의 법도가 있었고 후진을 장려하여 성취시켰으며 정학(正學)을 앞장서서 밝혔네. 빛난 군자여! 그 덕을 잊을 수 없도다. 이 한 조각 빛돌이 저 병산과 함께 만고에 전해가리라.
1979년 단기 4312년 기미 음력 1월 초하루 족증손 대환(大煥) 삼가 짓다. 주석( 註釋)은 생략한다.
사진 제공 : 마동욱(안양면 학송리 태생) 마을 드론 사진 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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