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6일 광주문화방송의 요청으로 “장흥신북구석기유물”에 대하여 본지 안명규 기자와의 인터뷰 내용을 정리하여 보도한다. 장흥군은 역사적ㆍ학술적 가치가 증명된 신북구석기유물 박물관 건립 등 다각적인 대책을 주민들은 요구하고 있다.

장흥 신북 구석기유적은 장흥군 장동면 북교리 신북마을이 자리한 검은둥이 언덕(해발 190~165m)의 남쪽에 있다.

신북유적의 규모는 유물이 확인된 범위를 기준하면 약 12만여㎡으로 추산되고, 유물이 들어있는 지층의 분포 범위로 보면 신북마을을 포함한 언덕 전체가 해당되어 약 30여만㎡으로 추정된다. 2002년 8월에 국도2호선 장흥-장동간 도로 확포장 구간도로 건설 구간의 교량 터파기 공사 때 문화층이 드러나면서 발견되어 2003년-2004년 사이 7개월간의 발굴조사(조사기관 : 조선대학교 박물관, 조사 면적18,000여㎡) 결과 3만여 점의 유물이 발굴되었다.

그래서 2004년 5월 11일 지역 주민들을 중심으로 “장흥 신북구석기유적 보존회”가 결성되었고, 2004년 6월 22~24일 “동북아시아의 후기구석기문화와 장흥 신북 유적”이란 제목으로 국내외 저명한 구석기학자들이 참여한 국제학술회의가 개최된 바 있다.

장흥 신북 유적은 한국에서 보고된 후기 구석기시대 유적 가운데 가장 크고 유물의 밀집도도 높다. 그리고 신북 유적을 중심으로 반경 12㎞ 범위에 20여개의 구석기유적들이 유적군을 형성하고 있으며 그 가운데 신북 유적은 거점 유적으로 추정된다. 여기서 화덕자리가 6개 이상 드러났고, 대표되는 뗀석기로는 좀돌날(세형돌날)몸돌, 새기개, 밀개, 슴베찌르개, 창끝찌르개 등이 있으며, 유적의 중심 연대는 22,000년 전(방사성탄소연대)으로 재어져 후기구석기 후반의 석기발달상을 잘 보여주는 유적이다. 특히 국부 마제석부를 포함한 새로운 종류의 간석기들이 소량이지만 대부분 문화층의 중간과 아래에서 드러나서, 이제까지 ‘타제기법은 구석기시대’ 그리고 ‘마제기법은 신석기시대’라는 고정 관념을 재검토해야할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다.
국부마제석부는 일본열도에서 약 35,000년 전에 나온 예가 많아 구석기시대에 마제석기의 출현 가능성은 충분하다.
한편 이 유적 흑요석의 성분분석(PIXE) 결과 그 원산지가 백두산과 일본(큐슈 등)으로 추정되었다.

이 점은 유베쯔기법의 좀돌날몸돌, 슴베찌르개와 함께 신북유적의 후기구석기인들이 일본열도와 교류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라고 생각된다.
이처럼 장흥 신북유적은 후기구석기시대의 생활상과 문화상을 잘 보여줄 뿐 아니라, 우리나라 후기구석기유적 중 가장 크고 유물의 밀집도도 높은 유적이다. 그리고 일본, 중국, 시베리아 등을 비롯한 동북아시아 후기구석기문화와의 연관성을 풀 수 있는 귀중한 유적으로서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아주 크다고 하겠다. (출처 : 문화재청)

●황앵커>> 장흥 신북구석기 유적은 국내에 보고된 구석기 유적중 가장 크고 유물의 밀집도도 높아서 그 가치와 의미가 높이 평가되고 있습니다. 신북구석기 유적이 지니고 있는 의미, 장흥신문 안명규기자 연결해서 들어보겠습니다.

●안명규기자>> 안녕하십니까? 대한민국 구석기 수도 청정장흥에 살고 있는 장흥신문 안명규 기자입니다.

●황앵커>> 신북유적의 발견과 규모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안명규기자>> 신북구석기 유적은 장흥군 장동면 신북 검은둥이 언덕의 국도 2호선 도로공사 중 유물이 쏟아져 나와 도로공사를 일시 중단하고 2003~2004년에 조선대 이기길 교수팀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고 유물의 중요도에 맞게 2008. 4. 11 전라남도 기념물에 지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신북유적은 추정면적이 최소 4만여 평에 달하고 우리나라에서 보고된 후기 구석기 유적 중 가장 크고 6천여 평의 발굴에서 3만1천여 점의 유물이 쏟아져 밀집도 또한 가장 높으며 화덕자리가 6개나 드러나서 후기 구석기인들의 생활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할 것입니다. 또한 구석기시대 대규모 살림터가 자리해서 보성강 유역의 85개 유적군의 거점유적지로 볼 수 있다 할 것입니다. 그래서 첫 인사를 구석기 수도 청정장흥이라는 인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황앵커>> 그렇다면 신북 유적의 가치측면에서 말씀해 주시죠.

안명규기자>> 우리나라 서남부의 젖줄인 보성강 유역에서 발견된 신북 유적은 3가지 중요한 대목이 있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교과서를 다시 써야 한다.”입니다.
황 앵커께서는 학창시절에 구석기 타제석기, 신석기 마제석기로 배우셨을 텐데요 신북 유적에서 이 정설을 뒤집은 것입니다.
구석기 마제석기인 숫돌칼돌, 갈린돌 등 20여점이 나와 구석기 타제, 신석기 마제의 경계를 무너트려 세계 고고학회의 정설을 다시 정립해서 교과서 수정작업에 나서야 할 정도의 가치가 있다고 할 것입니다.

둘째, 왕인박사 이전에 이미 일본 열도와의 교류가 입증되었습니다.
한.일 양국은 이미 구석기 시대부터 문화 사회적 교류가 있었는데 신북 유적의 흑요석이 그 사실을 입증한다고 고고학계의 교수들이 인정하고 있습니다. 신북 유적에서는 백두산 직선거리 800km, 일본규슈 400km인데 두 지역의 흑요석이 출토되어 원거리 교류망 이었음을 알 수 있고 귀한 물품을 구하기 위한 구석기인들의 열정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셋째, 신북 유적이 발굴된 보성강 유역은 후기 구석기인들의 파라다이스였는데 석기들의 수준이 고려 청자급의 보물들로서 지역민의 자긍심을 북돋는 결정체이며 선조들의 삶을 이해하는 역사문화 교육 컨텐츠의 위대한 유산이라 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신북 유적은 세계구석기문화 연구의 산실인 프랑스 베제르 강 유역과 비견되는데요. 베제르강 유역에는 라스코동굴, 크로마뇽 사랑 유적 등의 구석기 유적이 즐비해서 전 세계인들과 학자들이 구석기인들의 세계를 연구 탐험하는 별천지로 자리한 지 오랜 일입니다. 그래서 신북 유적을 잘 보존하고 홍보한다면 프랑스 베제르강 유역을 뛰어넘는 세계적 문화유산으로 손색이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황앵커>> 신북구석기 유적의 보존 관리 및 활용 방안은요?

안명규기자>> 2008년 도 기념물 지정 후 10년 이상을 전남도 기념물에 머물러 있어 아쉬움이 큽니다. 그래서 신북유적보존회와 장흥군이 힘을 모아 국가사적지정 및 선사박물관 건립에 나서고 있습니다. 정종순 군수님과 황주홍의원님을 면담했는데 적극 추진하겠다는 강한 의지표명을 확인했습니다. 경기 연천, 공주 석장리는 국가사적지정 후에 선사박물관 건립과 구석기축제시행으로 지역 이미지 상승과 재정에 많은 도움을 가져와 지역의 성장 동력으로 자리했습니다. 우리 장흥군도 이 두지역의 시행착오를 잘 파악한다면 100년 먹거리 성장 동력의 원천을 만들 수 있다 할 것입니다. 또한 구석기 수도 청정장흥을 전국에 알린다면 지역 농수축산물의 판로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생각하고 진행해 갈 것입니다.

●황앵커>> 휴가가 피크인데 장흥관광지를 소개해 주시죠.

●안명규기자>> 예로부터 장흥은 문림의향의 고장으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사상가와 작가를 많이 배출했고 지금도 그 맥은 쭈욱 이어지고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반봉건 반외세 척양척왜 보국안민의 사상으로 세상을 바꾸자했던 동학전쟁 마지막 전투지인 석대들이 자리하고 기념관도 훌륭하게 지어져 있어서 관람하시면 역사의 현장을 보실 수 있습니다. 또한 1909년 제국주의 침략 원흉 이등박문을 처단하고 동양평화를 외친 안중근의사 사당 해동사도 자리합니다. 1급 전범 기시노부스케의 외손자, 정한론의 창시자 요시와쇼인을 가장 존경한다는 아베신조의 경제침탈과 대동아 공영전을 다시 시도하는 헛된 꿈을 분쇄하기 위해서라도 석대뜰과 해동사 방문을 권하고자 합니다.

마지막으로 2만2천년전 구석기인들은 한반도 가장 남녘인 장흥을 왜 살림터로 삼았을까요? 장흥은 그들이 살아가는데 가장 좋은 환경을 제공했기 때문 아닐까요? 아직도 원시자연을 보존하고 있는 구석기 수도 장흥을 찾아오신다면 여름휴가는 탁월한 선택이 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장흥 신북마을 신석기 유물▶
저작권자 © 장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