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정묘지(장서방 편)>에 나온 ‘高山寺’는 과연 어느 곳인가? 거기에 있다고 기록된 '조암(槽岩,돌구시), 석교(石橋)'를 기준으로 판단해보면, ‘현 장평면 용강리 高山寺’는 ‘그 <정묘지>에 나온 高山寺’로 볼 수 없다. '조암, 석교'에 더 가까이 위치한, ‘현 장동면 북교리 용화사(龍華寺)’가 그 <정묘지>의 高山寺에 합당할 것. (그런데 장평 용강리와 장동 북교리는 그 면계(面界)에 가까이 있으니 일부 혼선이 생길 법했다. 원래 장서방 지역인 일부가 장동면 지역으로 편입되었던 것) 게다가 ‘현 장평면 용강리 高山寺’ 명칭은 1966년에야 늦게 명명된 것이고, ‘현 장동면 북교리 龍華寺’ 명칭 역시 나중에 작명되었기에 <정묘지,1747>에 나온 '槽岩, 石橋'를 기준 삼아 그 사찰 이름을 다시 찾게 되면, ‘현 용화사’의 본디 명칭에는 ‘<정묘지>에 등장한 高山寺’가  해당할 가능성이 높다. 그 高山寺의 후신, 현 龍華寺에는 퍽 비범해 보이는 약사여래좌불이 있는데, 옛 장택현 사창(社倉)을 배경으로 그 신통한 원력을 발휘했을 것. 다른 한편으로 안양 사자산록에 있었던 “안양 高山寺”와 혼동하지 말아야할 일. (다음 지면에 ‘선시계’ 선생의 “안양 高山寺”를 말하기로 한다)
이제,  옛 高山寺 가는 길에 있던 '단교(斷橋)'를 이야기해 본다. 그 장동 북교리에 있던 석교(石橋)는 '단교(斷橋)'라 불리면서, 장동방 출신 두 분 선현의 詩에 그 모습이 담겨져 있다.

 - 단교귀려(斷橋歸驢). 관수헌 10영중 제4영, 송정 김경추(1520~1612)

綠萍池上斷橋邊 푸른 부평초 연못 위로 '斷橋' 근처에
何處吟翁駐過鞭 어디서 온 음옹(吟翁) 급히 떠나가네
不覺斜陽猶在嶺 지는 해가 고개에 아직 있음 모르고
却望新月仰高天 고개 돌려 높은 하늘 新月 바라보네(주, 석교 부근에는 '조암池'가 있었다)

 - 단교귀승(斷橋歸僧), 반곡당 8영중 제6영, 반곡 정경달(1542~1602)

廣野茫茫人跡稀 광야는 망망하고 그 인적 드물어라
一僧歸去夕陽時 夕陽녘 스님 한 분 古寺로 돌아가네
遙聞古寺鳴殘聲 멀리 울려오는 古寺 종소리 들으며
回首西山步步遲 고개 돌려 西山 보며 발길 늦어지네.
나귀를 타고 건너는 옛 그림 <귀려도(騎驢圖)>에 '단교(斷橋)'가 나온다. 섶나무로 만든 나뭇단 다리로 큰 물에 자주 끊겨져 '斷橋'라 했다한다. ('섶나뭇 단'의 우리말 '단'을 한자어 '斷'으로 받았을 수 있다.)  널리 알려진 斷橋고사(古事)로는 중국 항주 서호(西湖)10경에 나오는 "단교잔설(殘雪)"이 있다. 西湖에 큰 눈이 내리면 그 斷橋 부분만 눈이 녹아 마치 '끊겨진 다리'처럼 보였다한다. 사람들은 그 斷橋의 西쪽에 있는 ‘고산사(孤山寺)’로 매화를 찾아갔다한다. 그 나귀를 타고 '단교'를 건너가는 <귀려도(騎驢圖)>는 기실 매화를 찾는 <심매도(尋梅圖)>인 것. 어쨌거나 그 장흥 사람들 역시 古寺 高寺로 가기위해  '斷橋'를 건너야 했다. 그 다리가 이어져 있다한들 그 다리 이름은 '斷橋', 즉 끊어지고 끊겨진 다리이다. 그 高山寺로 잇는 다리는 세속 단절의 斷交 다리인 것이니, 잇는 게 끊어지고 끊어지는 게 잇는 역설인 것이다.
나귀 타고 찾아온 음옹(吟翁)이 '斷橋'에서 서글피 노래 부르다가 급히 떠나간다. 古寺 종소리 울리는 夕陽 무렵에 '단교僧'이  斷橋를 건너  '단교 高寺'로 천천히 돌아간다. 해는 西山으로 뉘엿 지고 하늘에 新月이 둥실 뜬다. 그렇게 斷橋라 해도 지는 해와 뜨는 달의 인연까지 끊겨질 수야 있겠는가? 봉동에 있는 '관수헌 김경추' 선생에게나, 반산에 있는 '반곡당 정경달' 선생에게는 장동 북교리 벌판에 있는 高山寺로 건너가는 '石橋 斷橋' 다리에 걸린 풍경이 한 폭의 철학적 화두(話頭)였던 모양이다.
덧붙이면, 정경달 선생은 고향의 처사 김경추 선생을 선학(先學) 스승으로 평생 지극 공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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