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전라관찰사는 남도연안(沿岸) 순행 길에 보성을 둘러보고 이제 장흥으로 왔다. 1583년 음9월9일 중양절(重陽節) 무렵이다. 그 문집에 따르면, 순시경로는 '보성 열선루 -장동 만수원 -장흥읍 동정 -장흥부사 이기(李?) 접견 -장흥읍 면치(자울재) -‘숙(宿)회령포’ -장흥 해령(蟹嶺,게재)-장흥부 해안재상(災傷)현장-‘숙(宿)강진 마도(馬島)’였을 것. 그는 장흥 ‘예양강 동정(東亭)’에도 올라갔고, 그 맞은편 사자산(獅子山)을 '사후창봉(獅吼蒼峰)'이라 읊었다. 아마 그때 '장흥 회령포'에서 '강진 마도' 쪽으로 지나가는 중에 ‘대덕(대흥)~ 대구’ 구간에 '관찰사봉(觀察使峰)' 명칭을 남겼을 것 같다. 그때 찾아온 관찰사가 아니라면, 그런 觀察使峰 유래를 남길만한 다른 관찰사는 없었을 것.(그는 '강진, 영암, 능주, 동복'을 거쳐 ‘전주’로 되돌아갔다)

장흥 회진성(會鎭城)에 온, '전라관찰사 백담 구봉령(1526~1586)', 당시 57세, 본관 능성(綾城, 능주), 안동출신으로 퇴계 학맥이다. 이미 '직제학 대사헌 대사간 이조참판' 등 요직을 거치면서, 평판과 신망을 얻은 엘리트 관료였다. 그 출발 관력은 장흥출신 '기봉 백광홍(1522~1556)'과 대비될 수 있다. 1522년생 '기봉'은 1549년 사마양시에 1552년 식년시 병과1위 출신이고, 1526년생 '백담'은 1546년 사마시에 1560년 별시 을과1위 출신이다. '기봉'은 홍문관(옥당)을 거쳐 평안도 평사로 갔다가 신병 사직하고 젊은 나이에 타계하고 말았다. 1583년 9월경, ‘관찰사 구봉령’은 장흥府를 시찰하며 詩 “장흥도중 과(過)구중유감(九重有感)”을 비롯하여 몇 편 詩를 남겼다. '장흥 회령포'에서 숙박하며 남긴 詩,“숙(宿) 회령포”도 있는데, '장흥 회령포'는 1555년 을묘왜변 때 왜구침입을 당한 국경 요충지였다. 위 회령포 방문詩를 오늘 일부러 소개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아직도 '현 장흥 회진 회령포'와 '현 보성 군학에 있던, 옛(구) 회령포'를 혼동하고서 "정유재란 때 장흥에 오신 李충무공을 찾아간, 의병향선 10척이 모인 회령포"를 '현 보성의 舊(廢) 회령포'라 우겨대는, 황당한 주장이 있기 때문이다. 당시는 그 회천 군학리 자체도 장흥府에 속한 관할지였을 뿐더러, 칠천량에서 패전한 병선(兵船) 12척을 인수받은 李충무공이 그를 찾아온 향선(鄕船) 10척을 함께 거느리고 삼도수군통제사로 취임한 장소가 '장흥 회진 회령포'였다. 임진왜란의 발발 백 년 전에 이미 '구(舊.廢)회령포'에서 '현(現,新)회령포'로 이진(移鎭)한 사실이 <조선왕조실록>에서 바로 확인됨에도 일부 보성 사람들은 눈을 감는다. '구봉령 관찰사'의 전라도 남해 연안(沿岸) 순시는 왜구침입에 대비한 성지(城池)정비와 감독차원이었다. '구봉령'은 당시 북쪽 국경이 소란스러워 유사시에 서울 지역을 방어하는 원수 적임자로도 거명되다가, 다시 남쪽 국경태세를 강화하라는 특명을 받고 전라관찰사로 부임하였다. 1583년 9월경, '장흥 회령포진(會寧浦鎭) 城을 찾아온 ‘관찰사 구봉령’은 다음 詩를 남겼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9년 전으로, 그 순시 3년 후에 '백담' 자신은 타계하였다. 그 문집 <백담집>에 수록되어 있다. 국경(國境)의 밤, 그 긴장감과 경계 분위기가 물씬하다

◆숙(宿) 회령포
蠻煙蜒雨竝冥濛 / 변경에 만연 蜒雨(연우)로 어둑
斗絶孤城控海衝/ 벼랑 孤城은 바다 길목 지키네
警夜旗幢凝曉露/ 밤새운 깃발에 새벽이슬을 맺고
嚴更鐘鼓和秋風/ 칼 밤에 북소리 秋風을 타는데
身隨楚塞三千里/ 몸은 남쪽 楚塞(초새) 삼천리길
夢入秦關百二重/ 꿈에 본 서울은 엄중 경계태세
聞道北塵猶末靜/ 듣자하니 북쪽 소란은 여전하고
甘泉烽火夜猶紅/ 감천宮 烽火는 밤새 타 오른다지

◆이(以)장흥민인(民人)等소소(所訴)왕검(往檢)장흥해안재상(海岸災傷)
-장흥주민들의 所訴에 따라 장흥해안 재난현장을 직접 점검하다.
馬頭呼叫苦哀憐/ 말머리에 마주친 苦哀와 가련함
爲向山平如蟹田/ 산야 평지와 갯벌 향해 가는 길
風雨旱蝗禾稼盡/ 風雨 한해 충해에 식량 거덜 나
生民那得免顚連/ 백성들 거푸 고통을 어이 면할까

덧붙인다. 정유재란의 반전(反轉) 계기가 된, 역사적 현장 ‘장흥 회령포’에 다음 조형물 등을 세워보면 어떠할까?  이른바 회령포 비석들로, ‘李충무공과 그 참모들 조형물’, ‘의병향선家 10척 조형물’, ‘초계 변씨 충훈비’, ‘무명용사 격군(格軍)추모 백비(白碑)’ 등을 세워보자. 그리고 통제사 취임이 있던 8월 중순경부터 명량대첩을 거둔 9월 중순경까지 회령포 바닷바람에 휘날리는 깃발 게양을 해보자. 해전(海戰)영화를 상영하는 ‘작은 영화제’도 개최해보자. 그리고 李충무공 취임식을 재연하는, 회덕중학생들의 연극도 공연해보자. 누구는 각오를 다지고, 누구는 갈등을 빚고, 누구는 도망을 가고, 누구는 준비를 하고, 누구는 천시(天時)와 재기(再起)를 믿는, 그런 사람들이 모인 현장(現場)에 관한 작은 연극을 만들어보자. 장흥 회령포 축제의 내실화에 여러 지혜를 모아보자. 이른바 축제업자에 의한 형식적 축제는 피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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