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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군 삼산리 산서마을 경주이씨 이야기문화탐방/栢江 위성록 이야기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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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9.20  11: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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栢江 위성록/장흥위씨 씨족문화연구위원

장흥군 관산읍사무소에서 남쪽으로 약 4.5km 지점 평야지에는 삼산리 산서마을이 위치한다. 마을 초입(初入)에 경주이씨 2세 충효문(忠孝門), 세장비(世庄碑), 후박나무 등 마을 유적이 눈에 들어 온다. 마을 전체 90여호 중, 70호 이상이 경주이씨가 거주하고 있으며, 옆 산동마을 20호 이상을 포함하여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구전(口傳)에 의하면 1595년(乙未)경 개산공(介山公) 이주(李注 1564~1594)가 전란 때 이순신 휘하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남해안에서 사망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부인이 남편의 시신이라도 수습하기 위하여 아들 국세(國世)를 데리고 남해안을 헤매다가 인근 부안곡(浮雁谷, 어은 마을 옆 골짜기)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마을 앞으로 이주하여 터를 옮겼으나, 1600년경 다시 이곳 산연(山硯)으로 옮겨 오늘에 이른다.

삼산리(三山里)는 본래 고하면 지역인데 1914년(甲寅)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산서(山西), 산동(山東), 우산(牛山)을 병합하여 세(三) 마을에 산(山)자를 붙여 삼산리라 하여 고읍면에 편입되었다. 이후 1961년(辛丑) 관덕지구 간척사업 개척민들의 집단 거주를 위한 촌락이 형성되었다.

   
 

1965년(乙巳) 간척지 완공과 함께 각자의 삶의 터전을 찾아 그곳에 지역주민들이 입주하면서 산서마을 1개 반으로 편입시켜 운영되었다. 이후 1970년(庚戌) 행정구역 개편에 의해서 삼산리 4구 관덕마을 이라고 칭하고 산서마을에서 분리되었다.

인근 남쪽해변에는 1961년(辛丑)에 조성된 광활한 농경지가 펼쳐져 있다. 마을의 형국(形局)이 벼루에 물을 부운 것 같다 해서 산연(山硯)이라고 하며, 키(챙이)형국 이라고도 한다.

   
 

산연은 벼루 형국으로 3일간만 비가 안 오면 개밥을 안준다는 속설에 기인하며, 이는 천수답에 가뭄이 들어 흉년이 든다는 속설과 이 지역이 키(챙이) 형국이므로 키로 알곡만을 챙기니 밥은 굶지 않을 것이라는 속설에 의한 것이다. 현재의 산서 마을은 광활한 관덕 농장이 조성되어 있어 비교적 여유 있는 농촌마을이다.

■ 삼산사(三山祠)는 관산읍 삼산리 499-1번지(산서1길 58-50) 산서마을 내 위치한다.

   
   
 

본 사우는 1944년(甲申) 9월 창건하였다. 16세 문충공 익재(益齋) 이재현(1287~1367) 선생을 주벽으로 하고 25세 수문장공 개산(介山) 이주(1564~1594), 27세 도사공 붕운(鳳雲) 이귀희( ~ ?), 33세 호조판서공 단암(壇庵) 이관빈(1755~1822), 34세 호조참판공 수명당(水明堂) 이동의(1775~1834) 등 5位을 배향하여 제향을 매년 陰 9월 20일 지역 유림에서 주관 봉행하였다. 2017년(丁酉)부터 농촌사회의 고령화에 따른 제례문화 변화로 기존 5位와 이하 선조 6位를 합하여 문충공 익재 이재현 등 11位를 가을 합제 시제로 전환하여 후 陰 10월 16일 후손들이 모시고 있다.

■ 관덕재(冠德齋)는 삼산사의 5칸 강당으로 종중 서재와 행사 장소, 후손 강학 공간으로 이용되었다. 1944년(甲申) 9월 창건한 후 1959년(己亥) 10월 16일 중수하였다.

   
 

이곳은 창건되면서부터 1960여년 간에 이상옥, 송포 정노수 선생이 산서, 산동, 어은, 수동마을 등의 학동들을 대상으로 농한기 때 강학하였다.

   
 

- 관덕재상량문(冠德齋上樑文)은 1944년(甲申) 9월 12일 관산읍 방촌리 태생 오헌(梧軒) 위계룡(1870~1948) 선생이 근서(謹書)하다.

   
 

- 액호 편액은 경북 성주 태생 극암(克菴) 이기윤(성산人 1891~1971) 선생이 1945년부터 1950년 3월간 강진군 칠량면 송산마을에서 거주한 시기에 썼다.

   
 

- 관덕재기(冠德齋記)는 1950년(庚寅) 입하절(5월) 관산읍 학교마을 태생 송포(松浦) 정노수(압해人 1877~1964) 선생이 근지(謹識)하다.
- 관덕재운(冠德齋韻)은 야은(野隱) 이종석, 이종호가 고(稿)하다.
- 관덕재운(冠德齋韻)은 후손 춘희(春熙)가 썼다.
- 관덕재차운(冠德齋次韻)은 후손 윤우(潤雨)가 썼다.
- 근차판상운(謹次板上韻)은 남애(南崖) 정선수 선생이 썼다.
- 제관덕재벽상(題冠德齋壁上)은 김영성(金永聲)이 남겼다.
- 향사 오선생 행적 원문은 2001년(辛巳) 후손 상순(相淳 1929년생)이 근술서(謹述書)하다.

   
 

- 여기에 모신 五先生 행적문은 歲 高宗 元年后 2001년(辛巳) 봄 3월 吉日 후손 상순(相淳 1929년생) 근술서(謹述書)하다.
- 관덕재중수사실록(冠德齋重修事實錄)은 2014년(甲午) 6월 경주이씨 종중에서 기록하여 걸었다.
- 관덕재 강당 내에 액호 편액이 걸려 있다. 삼산사에는 액호 편액 3점, 시운 편액 10점 등 총 13점의 편액이 소장되어 있다.

   
 

외문은 1966년(丙午) 7월 21일 건축하였다. 2014년 외문 앞에 개산공 이주 기적비, 봉운공 이귀희 사행비, 이관빈ㆍ이동의 충효비 등 3기를 산서종중에서 세웠다.

삼산사(三山祠)는 3칸 사당 1동, 내삼문 1동, 5칸 강당 1동, 관리사옥 1동, 외문 1동, 기적비 1기, 사행비 1기, 충효비 1기 등으로 조성되어 개산공파 산서종중 소유로 관리되고 있다. 종중 재원(財源)은 논 60두락, 임야 15정 가량이며, 사우 재원은 별도로 정해져 있지 않고 가을 합제 시제와 시설물 보수시 발생되는 비용은 종중에서 일괄 담당하고 있다.

경주이씨 二世 忠孝門은 목조와가로 1879년(乙卯) 마을 입구에 건축하였다.

   
   
 

이관빈과 그의 아들 이동의의 충효(忠孝)을 기리기 위해 고종(高宗)이 명(命)하여 건립한 정려(旌閭)물이다. 이러한 부자의 충효정신을 나라에서도 높이 평가하고 1879년(乙卯) 이조판서 김병학이 충효록에 기록하고 현판서(懸板書)를 증(贈)하여 충효문을 마을 초입에 세웠다고 한다.

경주이씨 세장비(世庄碑)는 1982년(壬戌) 陰 9월 19일 경주이씨 개산공파 산서종중에서 마을 입구에 근수(謹竪)하였다. 비문의 내용은 고려 문충공 이재현 선생의 업적, 개산공 이주(李注)의 임진왜란 참전 공훈과 아들 이국세의 산연(산서마을) 정착과정, 도사공 이귀희의 행적, 호조판서공 이관빈, 수명당 이동의 부자의 행적과 충효(忠孝)을 기리기 위해 1879년(고종17) 마을 초입에 건립한 정려(旌閭) 등을 기술(記述)하고 있다.

   
 

근찬(謹撰) 병前書  술재(述齋) 정채균(나주人 1929 ~1983)이 하였다. 장성군 성산리 태생으로 서예에 조예가 깊고 문화에 관심이 많았다. 당동마을 태생 만취(晩翠) 위계도(1926~1999) 선생의 문하생이다. 전남도청 총무과장을 거쳐 제 21대 강진군수를 1976년 1월~1979년 5월 3일간 3년4개월 역임하면서 다산유적지 성역화, 청자 재현, 김영랑 생가 복원, 마량 소재지 공유수면 매립, 강진읍 토지 구획 정리, 강진군청 청사 설립 등 큰 업적을 남겼다. 광주시부시장 재임 때 불의의 교통사고로 별세하였다.

후근서(後謹書)는 송파(松坡) 이규형(전주人 1937~ )이 했다. 화순군 동복면 태생으로 松谷(안규동)의 문하생이다. 화순군 동복향교 전교를 역임하고 현재 광주광역시에서 삼락서예원장으로 활동중이다.

산서마을 태생 후손들 중, 현대의 대표적 인물은 1961년 간척사업 추진과 농경지 조성에 공헌한 이상덕을 비롯하여 이권호(서예가), 이채석(주택공사 충북지사장), 이재만(광주시 남구의원), 이삼전(서울시 성북구의회 의원), 이일호(영문학박사), 이광희(국방부 서기관), 이승량(변호사), 이재순(육군 중령), 이승현(물리학박사) 등이며, 인근 산동마을 출신으로는 이두식(법원 서기관), 이남근(문학박사 조선대학교 사범대 교수), 이홍필(영문학박사 전남대교수), 이선자(문예 작가) 등이 있다.

후박(厚朴)나무 관산읍 삼산리 326-7번지 산서마을 초입에 위치한다. 수령(樹齡)은 400여년 이상으로 2007년 8월 9일 천연기념물 제481호로 지정되었다.

   
 

후박나무는 녹나무과에 속하는 상록활엽교목으로 울릉도, 제주도, 남해, 완도 등 도서지방에서 자생하고 있다. 중국 일본에도 분포하고 있으나 세계적으로 흔하지 않는 수종(樹種)으로 내한성은 약하지만 내조성이 강하여 해변에 잘 자라며 잎은 광택이 나고 수형(樹形)은 아름다우며 수피(樹皮)는 향기가 좋고"후박피"라 하여 위장약의 원료로 사용되고 있다. 마을 입구에 심어져 있는 이 나무는 1600년경 이국세(李國世)가 이곳에 입향(入鄕)하면서 마을 입구 동서남북 방향으로 네 곳에 심었다고 傳한다. 세 곳의 나무는 고사(枯死)되어 없어졌고 남쪽의 나무만 생존하여 오늘에 이른다고 한다.

   
 

나무 주위에는 반경 7m에 이르는 팔각형 단(檀)이 90cm 높이로 축조되어 있으며, 단 위에 세 그루의 후박나무가 당당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그중 두 그루는 한 그루처럼 보이는데 아마 식재(植栽)당시 근접하게 심어져 뿌리가 성장하면서 서로 맞닿아 마치 한 그루의 나무가 근원부(根源部)에서 두 줄기로 갈라진 것처럼 보인다. 또 한 그루는 남쪽 5m 거리에 있다. 이곳의 나무는 세 그루가 한 무더기로 어우러져 하나의 수관(樹冠) 폭을 이루고 있다. 그 크기는 높이 11m, 수관 폭은 동서남북 방향에 따라 10~13m이며, 가슴높이 둘레는 3m 가량이다. 마을에서 쉼터로 활용하기 위하여 나무 아래 벤치를 설치하였다. 마을의 상징 나무로서 오랫동안 보존되어 왔으며 가지가 사방으로 균형 있게 발달하였다. 또한 성장 상태도 매우 양호하고 이 고장에서 보기 드문 노거수(老巨樹)이다. 주로 해안지방에서 자생하고 있는 난대식물로써 이만한 수령과 크기의 후박나무가 생육하고 있는 것은 흔치 않는다. 이곳 산서마을 후박나무, 진도군 관매리 후박나무, 통영시 추도리 후박나무를 우리나라 3대 후박나무라 칭한다.<장흥군청>

자문 : 경주이씨 개산공파 산서종중 남헌(南軒) 이상하(1933년생, 산서마을 거주)
사진 제공 : 마동욱(안양면 학송리 태생) 마을 드론 사진 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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