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청금(聽禽)유고>가 국역되었다. <지지재유고,이상계 /남파집,이희석>을 옮기고 펴낸, '인천이씨 이병혁'이 그 역자다. 노고에 감사드린다.

先人문집은 그 시대와 인간사를 총체적으로 말해준다. <역주 청금유고> 역시 '청금 위정훈(1578~1662)'이 살았던 시대상과 인간적 면모를 알려준다. 1612년 진사 입격자 聽禽은 벼슬이 평생 없었으며, 82세에 받은 '의금부 도사'는 불취(不就)했다. 그 문집이 1936년에야 간행된 만큼 원래 유고의 일부 산실 가능성이 높다. <역주 청금유고>는 그 의의에 관하여 "위정훈 시대와 교류인사, 도학자 면모, 동계(洞契)정신과 의고(義庫)전통 등을 알 수 있다"고 요약했다. 여기에 필자 소감을 덧붙여본다. 우선, 탁월한 詩人으로서 청금(聽禽)이다. 그 <유고>에 '청사(晴沙) 노명선         (1587~1655)', '사촌(沙村) 선세휘  (1582~1644)', '남호(南湖) 선세기(1572~1536)'와 여러 교류시를 남겼는데, 그 인생관과 詩才 詩格이 드러나 보인다. 聽禽은 '노명선', '숙옥 김여원(1593~1662)'과 집안 형제인 '소옹 위정호(1582~1647)'와도 가까웠다. (영광김씨 김여원(汝王+原)은 1624년 진사에 1648년 대과급제자이다.) 특히 聽禽은 '노명선(청사,복초,옥천,낭한,낭사)'에 대해 각별했고, 장흥의 '詩聖人‘, 시맥(詩脈)으로 '백광홍,백광훈,김윤,선세휘,노명선,선세기'를 거명하며 '天風之客'을 덧붙였다. 聽禽은 향촌사회의 조율사(調律士)였다. 장흥의 오랜 유배객 ’영천 신잠(1491~1554) 사우‘와 ’예양서원‘ 설립에 앞장섰고, 정묘호란에 창의(唱義) 했고, 하층민 약자와 성주(城主)간의 매개 역할을 했다.

이제, 聽禽 선생과 ‘沙村 선세휘, 南湖 선세기’ 형제와의 우정에 대해 살펴본다. 그들 인간관계의 평생 전말이 늘 궁금했었다. 聽禽의 조부 '위곤(1515~1582)'과 宣氏형제들의 외조부 '백광홍(1522~1556)'은 1549년 사마시 동방이었다. 또한 聽禽은 '선세기'와 함께 천관산에서 공부했으며, ‘청계 위덕의(1540~1613)’가 초기 스승이었다. (그 공부 무렵에 일어난 아육왕탑 붕괴사건에 관련하여 <지제지, 위백규>는 '가까스로 살아났다는 인물 선세휘'를 小人처럼, '미리 피할 수 있었던 인물 위정훈'을 君子처럼 그 운명을 대비하였는데, 정작 聽禽은 그런 언급을 남기지 않았다.) 沙村은 1606년 생원시, 1621년 문과 장원급제를 하였고, 聽禽은 1612년 진사시에 입격했다. 그러나 沙村은 광해군을 지지한 대북(大北)파로 적극 활동했기에 장원급제에도 불구하고 서인 세력이 주도하던 고향 장흥에서도 경원시되었으며, 광해군이 내몰린 1623년 인조반정 직후에 '함경도 삼수(단천)'로 바로 유배되고 말았다. 이때 聽禽은 과연 어떤 처세를 했을까? 한참 후대인이 쓴 <행장>에는 “마침내 절교(絶交)했다.”고 되어 있으나, 그런 일방적 絶交 조치는 아니었다고 판단된다. 聽禽은 <삼수적소(三水謫所)로 보내는 편지>에서 “沙村이 급제한 1621년경, 나주(금성) 귀로에서 잠깐 보고 다시 안부를 못 물었다.”고 말하고 있다. 聽禽은 동향출신 관료 '위정철(1583~1657), 김여원' 등의 힘을 빌려 북쪽 유배객 沙村에게 안부 시편(詩篇)을 주고받기도 했다. 沙村이 '강원도 평해' 이배(移配)를 거쳐 10년 만에 해배된 후에도 그들 우정은 변함없었다. 聽禽은 '선세기, 선세강, 선세휘 3형제'와 '沙村의 妻'를 위한 만시(挽詩)는 물론이고, ‘선세기 祭詞’와 ‘선세휘 祭文’도 썼다. 이번 <역주 유고>에서 聽禽과 宣氏형제의 따뜻한 情分과 信義를 재확인할 수 있었다. 여기서 유념해볼 부분이 있다. <청금유고, 남호시사기(南湖詩史記)>에 聽禽 작품으로 소개된, “시국 비판詩 2수”의 작자가 누구인지이다. <정묘지,1749>는 '南湖 선세기'에 대해 “혼조불복(昏朝不服)”이라 하면서 그 작자로 거명하였다. 비록 몇 글자 출입이 있다한들, <정묘지>와 <유고>는 동일 작품에 대해 그 작자를 따로 말하고 있는 것.

-詩1) 오언시/ 仕路無銀子   관료 길에 銀子(은자)는 없고
科場昧試官   科場(과장)에는 우매한 試官(시관)
何爲浪自苦   어찌 풍랑에 스스로 괴로워할까나
湖上有靑山   남호에 가면 靑山(청산)이 있거늘
(필자 주), <유고>에 “환로(宦路), 호위(胡爲), 강상유청산(江上有靑山)”이라 되어 있으며, <유고 / 남호시사記>, <장흥읍지 정묘지>에 중복 수록되어 있다.

-詩2) 7언시 / 三千胄子坑中土  삼천 儒者 땅속에 묻어버리고
萬卷詩書一炬燒   만권 시서 한 번에 몽땅 태워도
莫道秦皇無道主   진시황 두고 無道하다 말 마소
當年有不殺茅焦   그래도 그때 '茅焦(모초)' 안 죽였으니.
과연 위 ”두 작품”의 작자는 누구인가? “1)詩”에 대하여 <유고>에는 “기(寄)이제(二弟) 정렬, 정명”이란 시제가 붙어있고, 실제 聽禽에게 ‘1603년 무과합격자로 환로(宦路)에 들어선 동생 위정렬 (1580~ 1656/1610년 선전관)’과 ‘소과에 매진하던 동생 위정명(1589~1640)’이 있었다. 그런데 ‘남호 선세기’도 ‘같은 1603년 무과합격자로 벼슬길(仕路)에 들어선 동생 선세강(1576~1636)’과 ‘대과에 매진하는 동생 선세휘’가 있으니, “1)詩”에 얽힌 동생들 정황은 얼핏 엇비슷해 보이기도 한다. (계속)

저작권자 © 장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