쫒겨난 광해군(재위1608~1623)에 대한 평가는 폭군(暴君)설과 현군(賢君)설로 엇갈린다. 반대파들은 '혼조(昏朝)'라 불렀다. 어쨌거나 서울 정쟁은 천리길 장흥에 그늘을 드리웠다. '청금 위정훈(1578~1662)'의 인생과 <聽禽유고> 행간에도 昏朝 얼룩이 배어있다. 파당에 따른 붕당 현상이 장흥에도 생겼기 때문이다. 그 무렵 광해군 시대와 聽禽이 살던 시절로 되돌아가 본다.

1603년 '선세강, 위정철, 위정렬', 강진 고금도 별시(庭試) 무과급제.
1604년 천풍산에서 '위정훈, 선세휘' 공부. '장흥 병영시대(1599~1604)' 마감,
1606년 '선세기, 선세휘' 형제 사마시 연벽입격, '이승(1556~1628)' 진사입격, 영광丁씨 丁경달의 아들 '丁명렬(1566~1627)' 문과급제.
1608년 '광해군' 등극 (재위1608~1623 /생몰1575~1641)
1610년 진주鄭씨 '정첨(鄭명세 아들)' 진사입격, 죽산安씨 '安유경' 생원입격.

1612년 천관산 지진사태, '위정훈' 진사입격, 해남尹씨 '尹선도(1587~1671)' 진사1위 입격, (호서試 참시관을 했던, 장흥부사 '김정목'이 "임해군 옥사를 빗댄 시험문제 출제"로 인하여 파직되고 함경도 회령에 유배되어 사망)
1613년 '安유신(1680~1657)' 진사입격, 인목대비의 부친 '김제남(1562~1613)'사사(賜死), <동의보감> 발간, '청계 위덕의(1540~1613)' 타계. ‘昏朝에 내심 반대하던 丁명열(丁경달 아들)'의 '10년 청맹과니 행세' 시작.
1614년 폐모론 반대 상소 '安유신' 유배. 창녕조씨 曺장일妻 원주이씨 정려각.
1616년 '김제남' 부관참시, '이이첨' 비판상소로 '윤선도' 경상도 기장 유배.
1617년 인목대비 폐비론 등장. "서궁(西宮)의 죄를 잡초에 빗댄 폐비론, 이항복 처벌" 주장한 유생 '선세휘' 상소. <동국신속삼강행실도> 간행.
1618년 인목대비 폐비, '이항복(1556~ 1618)' 북청유배死, '허균(1569~1618)' 처형. 인목대비 폐비에 대한 장흥사람 '田유추(1594~1674)'의 비판. ’위정훈‘의 글(’잡술‘)에 언급된 장흥부사 ’박상‘의 대모갑(大龜,거북) 사건
1619년 2월 ‘심하 전투' 파견군 패배, 장흥출신 '魯홍(1561~1619), 卞덕일' 전사, 요동에 파견된 군병의 절반 이상 미귀환 사태로 전국적 인심의 요동.
1620년 장흥거주, 前 도승(渡丞) '嚴대인'이 昏朝의 궁역(宮役) 중지를 상소.
1621년 청금 위정훈 집안형제들이 ’혼조불과장(昏朝不科場)‘ 귀향, 장흥출신 北人 '宣세휘'의 장원급제. 고향 장흥과 수원白씨 외가에서도 냉대 외면함.
1623년 인조반정, 北人 '鄭인홍(1535~1623)' 처형, 北人 '宣세휘' 삼수 유배, '尹선도' 기장 해배. 광해군을 지지했던 北人에 대한 전국적인 척결 작업
1624년 北人'沈지청(1596~1658)' 장흥유배, '丁남일(1588~1640)' 생원입격.

그 시절 '청금(聽禽) 위정훈'은 어떤 당파활동은 하지 아니했고, 그 좁았던 교제 범위에 자회(自悔)할 정도였다. '1612년 진사, 위정훈'과 '1613년 진사, 남파(南坡) 안유신('동애 안중묵'의 아들이다.)'은 동향 출신연고자로 서로 모를 리 없으련만, <청금유고>에 南坡는 없고, <남파유고>에 聽禽은 없다. 내향적 聽禽과 외향적 南坡는 그 대척점에 있었던 것 같다. <聽禽유고>에 장흥의 당대인물들 '안유신,전유추,김정화(1599~1660,1635년 진사)'는 나오지 않았다. 
<南坡유고>쪽에 '노명선,전유추,김정화'가 나오며, 西人계열 중앙명망가들이 등장한다.

‘안유신’은 이항복과 인척관계였고, 1637년에 양천현감이 되었다. <聽禽유고>에 ‘노명선,宣씨형제,김여원,위씨집안 사람들’이 나오고, '유사(遺事)'에는 '丁명열,李승,宣세기,安억,金여원,金여규,丁남일,鄭첨,文홍개'등이 나온다. 聽禽과 영광丁씨 집안의 유대는 '천방 유호인
(1502~1584)'의 제자인 '청계 위덕의, 반곡 丁경달'의 동문수학 때문으로 여겨진다. 그 '위덕의'의 제자들인 聽禽과 '宣씨형제'의 각별한 우정을 앞글에 언급했는데, '선세휘'가 '北人'쪽에 가담한 배경은 임란 때 '임계영, 박광전의 전라도의병'이 '北人 鄭인홍의 경상도의병'과 상주 연합작전을 했던 인연에서 시작되었을지 모르겠다. <聽禽유고>에는 장흥적객 중에 ‘北人심지청(1596~1658)'과 교류詩는 있어도, ’西人심동귀(1594~1660)'는 나오지 않았다. 그 ‘심동귀’는 <송담유고, 전유추> <감호유고,김정화>에는 등장한다.

한편 聽禽과 진사시 동방인 '윤선도'는 <聽禽유고>에 안 보였지만, <감호유고>에는 등장한다. 참고로 광해군 이후 사정을 보면, '노봉 민정중(1628~1692)'이 ‘위천회’를 발탁(1651)하고, 장흥에 유배(1679)오고, 인천이씨 이민기(1646~1704) 형제와의 사제인연 등으로 '연곡서원(1698)'이 세워졌고, 전라감사를 역임했던 동생 ‘둔촌 민유중(1630~1680)’도 장흥府와 인연으로 추배되는 등, 장흥은 여흥閔씨와 장흥魏씨,인천이씨 교분 속에 西人땅으로 굳어졌다. 西人송시열(1607~1689)은 예양서원 배향을 위한 ‘추강선생 봉안문(1681)’을 썼고, 훗날 '존재 위백규(1727~1798)'는 '송시열- 윤봉구'의 적통 계승자를 자부하였다.

덧붙이면, 광해군 昏朝시대를 겪고 난 '위정훈'은 시궁(詩窮) 속에서 마치 '백아, 종자기'처럼 '선세휘, 선세기' 형제 詩友와 우정을 유지하며, 불우한 운명의 동생 ‘선세휘’를 끝내 위로했고, 형 '선세기' 입장을 감싸주는 <南湖시사記>를 남겼다고 본다. 아마 1623년 반정직후에 진행된, 광해군 지지파 北人에 대한 전국적 척결작업에 대비한 변론차원이었을 것. 그리하여 北人절멸 이후 西人시대가 되었고, 남도의 '해남,장흥,보성' 등에서는 '퇴계 이황(李滉)'의 도산서원에 학맥이 닿은, '해남尹씨, 남평文씨(문위세), 진원朴씨(박광전)' 등 후손들로 南人명맥을 겨우 이어오고 있다. 聽禽 당신은 ‘인조’를 지나 1662년(효종3년)에 천풍산 품으로 조용히 돌아가셨다.

저작권자 © 장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