栢江 위성록/장흥위씨 씨족문화연구위원

德菴魏錫奎先生義烈碑는 장흥군 관산읍 옥당리 88-2번지(천관산길 142) 담소원 앞에 위치한다.

<비문> 슬프다 한말의 정국이 혼미하여 임오군란이 일어난 뒤에 왜국의 침략이 날로 거세어 갈 무렵에 선생은 1883년 3월 19일 전남 장흥군 관산읍 천관산하 당동에서 태어났다. 선생의 휘는 석규요 자는 여장이며 호는 덕암이다. 멀리 신라 회주군의 후예로써 자람 기우가 청수하고 예능이 숙달하여 학문에 자진근공하고 어른들의 교지를 번거로이 하지 않았다.

스승을 찾아 서사를 몇 차례 옮겼으나 당시 서구의 사조와 학문이 노도와 같이 밀려와도 선생을 전통의 보수와 한학의 수호로 추호의 오염됨이 없이 나아가다가 19세에 성리대전을 읽고 다음해에 다시 중용을 읽어 우주와 세속의 유전한 원리를 고구하였다. 그러나 왜국의 침략적 독아가 날로 노골화하고 조정의 무능으로 인하여 국가안위 앞날을 내다보고 선생은 초조와 개탄을 가눌 길이 없었다. 고종 1902년 9월 7일 선생이 꿈을 꾸니 왜구가 조야를 점거하자 선생은 동지 23인을 이끌고 죽창으로 왜구를 물리쳤다고 한다. 이는 평소 선생이 민족을 위하고 구국하겠다는 단심이요 유자의 의리라고 여겨진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순국한 민영환의 충혼을 조위하였고 다음해에 면암 최익현이 창의하자 전국의 의사들이 호응하였으나 세불리 하여 대마도에 연행되어 절사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복국의 웅지를 더욱 굳혔다. 1906년 5월 25일 선생은 구국운동의 전선에 몸을 던지니 당24세의 청년이었다.

사랑하는 부모처자를 향리에 남겨두고 중국 러시아에서 동분서주하면서 독립운동의 선배들과 함께 고난의 길로 나섰다. 황량한 만주의 벌판 눈보라치는 노령에서 고투한 선생의 공력을 어찌 필설로 쉽게 말하겠는가. 아! 슬프도다 하늘이 돌보지 않음인지 노령 니쿨라이스크의 한사에서 1913년 4월 27일 묘시에 울울 급환으로 서거하니 이 무슨 하늘의 섭리이며 어찌된 인과인가 이때가 바로 선생의 춘추 겨우 31세였다. 생자필멸이요 회자정리는 불가의 철리라고 하지만 독립투사인 선생을 추모하는 우리 후학들의 마음엔 애절한 원한이 풀릴 날이 없으려니 한다. 여기 선생의 높은 정신을 숭모하고 고혼을 달래는 군민의 뜻을 합하여 이를 한 돌에 새겨 수려한 이 고장에 세우나니 재천의 영혼이시여 향기로운 땅 이곳에 오시어 영원토록 편안히 안기소서.

단군 기원 4322년(1989) 己巳 한식절
문학박사 이숭녕 謹撰
영천후인 이돈흥 謹書
장흥군민 竪
근찬(謹撰)을 한 이숭녕(연안人, 1908~1994)의 호(號)는 심악(心岳)이다. 국어학자로 서울대학교 대학원장, 한국어문교육연구회 부회장, 한국정신문화연구원부원장을 역임하였다. 서지학ㆍ문헌학적 관점에서 탈피 과학적 국어학 정립을 위해 애썼으며 국어계통론을 연구하였다. 저서는 <국어음운론연구 제1집ㆍ음고>, <국어조어론고> 등이 있다.
근서(謹書)는 이돈흥(영천人, 1946년생)의 호(號)는 학정(鶴亭)이다. 호남 서예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광주시 금남로 舊)전남도청 앞에서 학정서예원을 운영하고 있다.
수(竪)는 장흥군민 이름으로 하였다.

<순국선열 덕암 위석규선생 의열비 건립 및 추모사업 추진위원회 방명안>

 

덕암(德菴) 위석규(30세 1883~1913) : 초헌공 위윤조(1841~1915)와 配 수원백씨의 4남2녀 중, 장자이다.
일제는 1905년 을사늑약을 체결하고 통감부를 설치하여 조선을 식민지화 하였다.
선생은 1906년 국내에서는 독립운동을 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24세 때 손톱, 머리카락 등 유물을 남기고 중국 만주와 러시아로 건너가 박태문, 강명운, 국사성 등과 함께 항일운동을 펼쳤다. 1913년 4월 27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톡 니콜라스에서 급환(急患)으로 세상을 떠났다. 묘는 니콜라스 한인공동묘지에 안장되었으나 시신을 찾을 길이 없어 고향에서 유품으로 대신 장사를 지냈다. 저서로 <덕암문집>이 있다. 1990년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자(子)는 인재(忍齋) 계동(1902~1956)이다.

손(孫)은 옥천(玉泉) 욱량(1921~1994), 덕운(德雲) 황량(1927년생), 춘오(春塢) 재량(1933~2005), 계암(桂菴) 기량(1938~2016)이다. 1989년 의열비를 세울 때 사손 욱량과 황량 형제는 모든 제반 일을 추진하였다. 이하의 후손은 생략한다.  출처 : 덕암문집

聞剃髮令下奮筆書壁(문체발령하분필서벽)
머리를 깍으라는 영이 내려왔다는 소식을 듣고 붓을 떨쳐 벽에 쓰다.
                                      -덕암(德菴) 위석규(魏錫奎)

上天降此仁(상천강차인)
하늘은 仁義 마음 내리셨지

吾性非吾身(오성비오신)
내 본성은 내 몸이 아니네.

傷毁元非義(상훼원비의)
본래 의 아니면 훼상하지마라

生無不死人(생무불사인)
살다 죽지 않은 사람 없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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