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 총체적으로는 우리의 전통적인 민족음악을 포함한 가무악(歌舞樂 )을 지칭하는 것으로 본다면 그 종류와 분야가 간단치는 않을 것이다. 그 간단치 않은 국악에 대한 전문성이 없으므로 이 글은 우리 장흥지역에서 태동하고 이어져온 국악 활동이 우리 시대에서 어떤 모양으로 조명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고찰하는 것이 주제라 하겠다.

장흥의 국악을 논하자면 먼저 장흥신청(長興神廳)의 존재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시대의 특수계층이 주축이 되어 활동한 신청은 그 계층만큼이나 독특한 공동체로 알려져 왔다. 신청에서는 신주(神主)의 위패를 모시고 선생안제(先生案祭)도 행하며, 무부(巫夫)와 무녀(巫女)가 그 일들을 집행한다.

소위 선생안(先生案)이라는 것은 조선시대 각 관청에 있던 전임 관원의 성명, 관직명, 생년간지, 본적 등을 기록한 책자이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신청은 어떤 관료조직의 일원으로, 현임 관원들이 수행할 수 없는 민감하고 수월치 않은 일을 맡아 처리했음을 짐작할 수가 있다. 그런 연유로 신청에 속한 조직원은 관료조직에 종속된 무인(巫人)이 아닌가 추측할 수가 있다. 이들 무인(巫人)의 조직은 단순한 제례행사 뿐만이 아닌 악공(樂工), 공인(工人)의 역할까지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연유로 신청에서는 당연히 음(音)과 율(律)과 기악(器樂)을 필요로 하였으며, 그 필요성은 음악수업, 후계 양성의 다면적인 기능을 수행하여 왔다고 볼 수 있다.

이런 모양의 신청은 전라도에서는 나주(羅州), 광주, 남원, 전주와 더불어 상당한 규모의 조직을 갖추고 있었다. 장흥읍 기양리에 위치한 신청에는 군내외(郡內外) 무부(巫夫) 100여명으로 이루어진 20세 이상의 대동계(大同契, 巫夫契)로 조직되었다. 매년 2회(3월3일, 9월9일)제례를 행하고, 정월과 삼월에는 가무향연(歌舞饗宴)의 낙(樂)을 행하였다.

이렇듯 독특한 신청의 후인들은 자연스럽게 가무악(歌舞樂)에 정통하였고 국악의 창작과 진흥에 기여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근대 장흥의 국악은 우선 장흥신청의 후인들로부터 그 향맥이 이어져 왔다. 입증할만한 자료에 근거하면 신재효(申在孝,1812~1884)[전북 고창출신. 이속에서 입신하여 호조참판까지 신분상승을 하면서 재력을 이용 판소리를 즐기고 국악인들의 후원을 해주었다. 판소리의 정리, 보존, 계승에 크게 기여하였다.]의 족제(族弟)인 신평재(申平在), 신홍재(申洪在), 양인과 주화봉(周和奉)이라는 인물이 국악 사범으로 활약하였다.

신홍재는 전국명창대회 판소리 가야금 부문에서 특상을 받았을 만큼 실력이 있는데 교육방법이 대단히 엄격하였다. 우선 새벽부터 일어나 신주(神主)에 예배하고 오전에는 시가(詩歌)를 연습하였으며, 오후에는 판소리, 춤, 가야금, 양금을 익혔고 밤에는 이론까지 공부하였다.

이 신청의 후인으로 분류할만한 장흥출신의 국악인들을 열거하자면 다음과 같다. 우선 조선 말엽의 김채만(金采萬,화순출신으로 장흥에서 활동)명창(名唱)이 있고, 그 제자인 신홍재와 신홍재의 문하로 김녹주(金綠珠), 가야금의 명인 최옥산(崔玉山), 김병(피리), 김막동(젓대), 성명수(장구) 선동진, 박옥화 등이 거명되고 있다.

그 다음 세대로는 유앵(劉鶯, 一名 永愛) 성화춘(成和春), 성봉수(成鳳洙), 김영자(金英子), 강홍도(姜紅桃), 최은주(崔恩珠) 등이 있다. 이들의 활약상을 살펴보면 신홍재 형제는 남도창(南道唱)의 계발에 일익을 담당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으며, 신청에서 이들 형제들에게 사사받은 국악인들 중 현재 중앙(서울)을 비롯하여 경향 각지에서 활동하는 명창들이 상당하다. 뿐만 아니라 그 계보가 이 나라의 국악에 기여한 바도 지대하다고 할 수 있다.

▲판소리/ 김녹주

장흥출신으로 특출한 활동을 했던 국악인으로는 우선 김녹주(金綠珠)를 꼽지 않을 수 없다. 김녹주(1922-1997)는 장흥읍 동동리 25번지에서 태어나 9세 때부터 신홍재 문하에서 판소리와 단가를 배웠는데 진국명산(鎭國名山) 초한가(楚漢歌)를 14세 때까지 배웠고, 이어서 산악(山岳)과 춘향가를 익혔다. 또한 박군옥에게 심청가의 추동만정, 적벽가고당상 등 토막소리와 단가인 국장망, 만고강산을 배웠다.
 이렇게 착실하고 단계적으로 수업을 하면서 소리의 진수를 익혀가던 김녹주는 16세 되던 해 순천의 권번(卷番)에서 2년 동안 오바둑의 판소리를 배우고, 19세 때는 광주의 권번(券番)과 함께 박동실(朴東實)에게 판소리를 배웠다. 김녹주는 수궁가(水宮歌)진바탕, 심청가 진바탕, 흥부가 등을 중심으로 배웠다.

19 세 때 소리공부가 결실을 맺어 조선일보 주최 명창대회에서 1등으로 입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20세 되던 해에 OK레코드사에서 흥보가전집(興補歌全集)을 취입 했는데, 그 때 같이 활동한 국악인은 임방울(林芳蔚), 오수암(吳壽岩), 이화중선(李花中仙)이었다. 당시의 반주자는 장단의 김막동, 기악은 한갑득이었다. 김녹주는 소리뿐만이 아니라 기타, 바이얼린, 가야금 등 기악에도 발군의 기예를 보여 주어 가히 만능의 예인이었다.
필자는 작고하기 이전의 김녹주 할머니가 기양리 자택의 골목 양지에 앉아 휴식하던 단아한 모습을 수차 뵌 적이 있었다. 뛰어난 실력에도 불구하고 빛을 보지 못한 김녹주의 행적은 언젠가는 새롭게 조명 되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전도유망하던 김녹주는 30세 되던 해에 장흥에서 요리집을 경영하다가  결혼을 하였고, 그 결혼에 실패한 뒤에 이후로 빛을 보지 못하고 향촌의 소리꾼으로 머물다가 쓸쓸한 종말을 맞게 되었다. 김녹주 생존 당시 남도를 방문하는 유명 국악인들은 그이의 면전에 큰 절을 올리며 존경의 예의를 표하였다고 하니 국악계에서 그 위상을 짐작 할 수 있을 것이다.

▲가야금의 명인/최옥삼

김녹주와 필적되는 국악인으로는 단연 최옥삼(一名 玉山, 막동)을 꼽을 수 있다. 최옥삼(1903-1956)은 장흥읍 괘야리(현 건산리 518번지) 출신이다. 13세 되던 해에 김창조라는 가야금 산조의 명인이 영암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그의 제자가 되었다. 최옥삼은 김창조와 그의 제자 한성기에게서 본격적인 가야금 수업을 하였다. 그러나 김창조의 제자가 된지 3년 만에 스승이 세상을 떠나자, 고향으로 돌아와 피눈물나는 연마를 하였다. 그러다가 1921년 전국명창대회에서 우승하고 장흥신청에서 젊은이들에게 대금을 가르쳤다. 그의 제자 중에는 함동정월(중요무형문화재 23호)이 있는데, 최옥삼은 함동정월을 매우 아껴 목포의 권번에서 독선생으로 오로지 그녀만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그렇게 가야금에 심취하던 최옥삼은 식민치하의 정책적으로 신청이 없어지자, 원산의 기생학원 사범으로 초청되어 올라갔다. 그 이후로 소식이 끊겼는데 남북이 분단되자 잊혀진 인물로 치부되는 듯 했다. 그러나 당시 북쪽에서 최옥삼과 같이 활동했던 전황(배우 전옥씨의 오빠)씨에 따르면, 그는 세계적인 무용가인 최승희씨의 무용 반주자로, 작곡자로 활발하고 뛰어난 활동을 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공산권인 북구(北區)지역에 순회공연을 하며 명성을 떨쳤고 ?사도성의 비밀?같은 뛰어난 음악극을 작곡하였으며, 북한 가무단의 악장 정도의 위치였으니, 그 쪽에서도 인정받은 가야금의 명인으로 인정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입증하는 사례로는 1992년, 서울에서 열린 대한민국 국악제에 참여한 연변 가무단의 악장 김동설씨가 초청되어 대금을 연주하였는데 그는 북에서 최옥삼에게서 대금을 사사 받았다고 증언하였다. 또한 2000년 11월 "장흥가무악전국제전"에 참여한 연변의 국악인들은 취옥삼의 존재를 신격화하다시피 하였으며, 북한의 방문길에는 그의 무덤을 빠짐없이 순례하고 묘비명을 외우고 있을 정도였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최옥삼은 북한에서의 가야금 산조 중 가장 짜임이 좋고 높은 예술성을 지녔다는 옥산류의 명인으로 명예를 지키며 살았던 같다.

이와 같은 장흥 국악의 산실인 신청의 후인들은 고향 땅에는 국악을 진흥시키지 못했지만 이 나라 국악의 발흥에는 많은 기여를 했던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아쉬운 것은 남도 국악의 명소가 될 수 있었던 장흥신청이 그 유래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소멸되어 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서술한 장흥의 국악은 장흥신청의 후인들 중심으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장흥국악은 신청과는 그 유파가 또 다른 국악의 한 지류가 있었다.
 이제는 보편적으로 알고 있는 창악(唱樂)은 흔히 동편제, 서편제, 중고제로 나뉘어 구분할 수가 있다. 그 중에서 서편제는 최근에 마치 판소리의 전형인 것 같이 인식되어 대중화되고 있다. 이것은 한 작가의 소설과 영상예술인 영화에서 기인되었음은 널리 아는 사실이다.
 우리 장흥이 자랑하는 소설가인 이청준 선생님께서는 그 분의 소설 서편제를 통하여 자신의 유년의 기억과 고향의 한스러움을 표현하였고, 마침 맞게도 영화의 장인 임권택 감독과의 만남으로 또 다른 성과를 거둘 수가 있었다. 영화 서편제는 한국 영화사상 최초로 최다관객을 동한 하였음은 물론, 국악의 저변확대에 획기적인 기여를 하였다. 서편제 이후로 우리의 전통음악이 인구에 회자되어 국악의 발흥 시대가 도래한 듯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이렇게 국악, 특히 판소리 중 서편제로 대변되는 소리는 장흥, 보성, 광주, 나주쪽, 즉 전라도 서남지역에 전승되어 오는 유파라 할 수 있다. 이 소리제는 철종대의 명창 박유전(朴裕全)에서 이날치(李捺致), 김채만(金采萬)으로 이어졌고 정창업(丁昌業), 김창환(金昌煥), 김봉학(金奉鶴)으로 전해져 왔다.

흔히 서편제의 창시자처럼 말하는 박유전(1835-1906)은 전북 순창에서 태어났다. 박유전의 가세는 부유했고, 소리를 좋아해서 그의 큰형은 소리선생을 모셔다가 공부를 할 정도였다. 그러나 우연한 계기로 애꾸눈의 불구인 박유전의 소질과 능력을 발견한 아버지의 배려로 소리 공부를 하게 되었다. 그 때부터 소리에 전념한 박유전은 전주대사습에서 장원을 하였다. 이렇게 명창의 이름을 얻은 박유전은 소리로 명성을 날리면서 남도창의 고장인 전라도 장흥땅의 옥암면 강산(玉岩面 康山)[장흥의 옥암면 강산은 1914년 식민지 치하에서 웅치면으로 개명되어 웅치면, 회령면, 천포면이 보성군으로 편 입되었다.]에 내려와 소리를 가르치게 되었다. 그때 당시의 권력가인 대원군이 박유전의 소리 소문을 듣고 어전공연을 시켰다. 박유전이 신기에 가까운 소리 공연을 하자, 대원군은 감탄을 금치 못하면서
" 자네 어디서 왔느냐?"
" 네, 소인은 전라도 장흥고을 강산에서 왔습니다."
" 그래, 네 소리가 가히 천하제일이니 '제일강산'이라 함직하다."
선달(先達)의 첩지를 내리고 오수경(烏水鏡-색안경)을 선물하여, 애꾸의 눈을 가리는데 사용하라고 하였다.
 박유전은 장흥의 강산에서 무업(巫業)을 겸한 소리선생을 하였는데 그의 문하에서 특출한 국악인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오늘의 한국 국악계에서 왕성한 활동을 보이고 있는 조상현, 성창순, 성우향 등도 이 계보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장흥땅에서는 박유전의 수제자로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이 같은 장흥의 용산면 출신으로 알려진  정재근(鄭在根)을 꼽을 수 있다. 이 정재근의 창법을 이어 받았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정응민(鄭應珉)으로 그 둘은 숙질간이기도 하다. 또한 정응민의 아들이 정권진(鄭權鎭)이니 판소리 무형문화재 기능자로 서울에서 활동하다 세상을 떠났는데, 이 계보가 장흥의 판소리 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 국악인들은 식민치하에서 그 형편이 척박해지자, 유랑극단 등에 합류하여 전국을 순회하는 중에 서편제 소리 더늠의 순수성이 혼탁해 지기도 했다. 그러나 정씨 일문만은 웅치면과 장흥을 왕래하며 문하를 거두어 가장 정통성 있는 서편제 소리를 유지해 올 수가 있었다. 이런 분위기에 힘입은 듯, 당시의 장흥은 그야말로 국악인들의 전성기였다. 당시 장흥읍 남동리에서 남산관 요리집을 경영하던 옥화(玉花) 할머니의 증언에 의하면, 규모있는 요리집이 십여 개소에 이르렀고, 여기에 종사하는 기생들이 200여명이 넘었으며, 그냥 접대만 하는 기생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것은 물론, 상당한 교양을 갖추고 자부심도 대단했다고 한다. 물론 국악의 어느 한 분야에 출중한 기예를 갖추고 있어서 그야말로 골목골목에서 가무악의 기예들을 넘어 볼 수가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국악에 입문하기 위한 동기(童妓)들이 문전성시를 이루었다고 하니, 장흥국악의 형편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장흥출신의 국악인으로 국악계에서는 인구에 회자되는 명인으로 안양면 신촌 출신인 김상용이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김상용의 행적은 그 기록이 없어 구전에 의지하여 전래 되고 있다. 1998년에 간행된 안양면지에도 신촌 출신의 인물란에 “김상용. 국악의 명인,목포국악원장 역임‘ 으로 한 행도 되지 않은 서술로 끝나고 있다. 김상용의 생몰연대는 기록을 찾아 볼 수 없지만 소녀 시절부터 김상용의 문하에서 소리 공부를 하였던 유영애(판소리,현, 광주시립창극단예술감독)의 기억에 의하면 1956년경 56세쯤에 작고 하였다는 것으로 유추가 될 뿐이다. 김상용에 대한 행적은 위의 유영애감독의 구전에 의지하여 정리 하였다.
유영애가 김상용의 문하에 입문한 것은 11세되던 해였고 장흥읍동동리 장흥경찰서 앞 도로변에 위치한 소리 교습소였다고 한다. 장흥읍내에서 판소리 강습을 하던 김상용의 문하에는 소녀였던 유영애를 비롯하여 박방금(금희) 신영희, 안행연,오비연, 강행복,김정숙(꾀꼬리 정숙) 등 한국 국악계의 기라성 같은 판소리 명인들이 수학 하였다고 한다. 목포국악원장 재임시였다. 인물 좋고 소리 잘하는 김상용 명인은 당대의 미인들이 흠모 하는 한량이고 예인이었다.
동동리에서 교습소를 운영 하던 김상용은 유영애가 13세가 되던 해에 신촌리 자택으로 옯겨 교습을 계속 하였으며 유영애 역시 신촌으로 따라 들아가 소리 공부를 계속 하였다.
당시 김상용은 정응민,임방울등과 보성 회천에서 교류 하며 합동 연회를 하고 발표회를 하였으며 이어서 목포시 죽동에 소재한 목포국악원장으로 초빙 되어 후학을 가르쳤다, 당시 목포시 유달국악원장은 조상현이었다. 유영애는 김상용의 지도를 받아 16세대에 창극의 춘향전으로 데뷔하는 영예를 누리기도 했다. 이렇듯 김상용은 거의 전국적인 유명 국악이었지만 장흥에서의 행적이 소상하게 전해 지지 않고 한창 소리가 원숙할만한 나이였던 56세에 작고 하였으니 참으로 아쉬운 일이다.

장흥의 국악이 신청에서 유래되어 번성기를 구가 하였고 많은 명인들이 배출 되었지만 그에 관한 체계적인 연구와 기록이 없어 아쉽고 미진하다.
 그 중에서도 마지막 후예처럼 장흥의 국악을 대표하는 명인이 유영애(1948-. 현 광주시립창극단 예술감독)이다. 유영애는 소녀 시절부터 판소리에 입문하여 평생을 외길 소리를 지향 하는 열정과 보였고 그만한 성취를 하여 장흥 국악의 예맥藝脈을 이어오고 있다
유영애는 전기한 바와 같이 김상용의 문하에서 소리의 길을 택하였고 이어서 한농선 선생에게서 홍보가 사사, 성우향 선생에게서 심청가 춘향가 사사, , 조상현 선생의 문하에서  춘향가 심청가를 사사하여 정통 판소리의 후인으로 명성을 얻게 되었다. 아래의 유영애 감독의 간단한 약력을 보더라도 그이의 국악 활동은 최정상급의 예우를 받고 있다.
유영애는 특히 장흥의 후인들을 문하에 거두어 현재 젊은 판소리 유망주로 할동 하고 있는 김효정,김안순,이밀리,조현정,김진을 길러 내었다. 더불어 장남인 이태완과 차남인 지명인도 판소리의 후인으로 촉망받는 활동을 하고 있어 국악의 일가를 이루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이영애(사,낙안읍성가야금병창보존회이사장)는 가야금 병창 분야에서 가장 활발한 활동을 하면서 영역을 구축하고 있는 장흥 출신의  국악인이다.  제25회 전주대사습놀이 가야금병창부문 장원, 제10회 우륵전국가야금대회 대통령상수상 등의 경력이 대변 하듯이 최상급의 기량으로 회자되는 가야금의 명인이다. 광주광역시무형문화재 제18호 가야금병창 보유자이면서 (사) 낙안읍성 가야금병창보존회 이사장으로 가야금의 진흥에 기여 하는 이영애 이사장의 활동은 가히 타의 추종을 불허 하게 하고 있다. 이러한 활동이 인정 받아 2019년에 “자랑스러운 한국인 국악부문 대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매년 쉬자 않고 정기 공연 제자 발표회 국내의 주목 받는 무대의 공연은 물론 해외 10여개국을 순회 하는 공연으로 지칠줄 모르는 국악의 열정을 보여 주고 있다.

박근영은 대전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장흥출신의 고법 명인이다. 일찍이 전국 규모의 유명 국악제전에서 고법으로 대통령상을 수상한 경력이 대변 하듯이 전국의 국악대회에서 심사위원과 대회장을 역임 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강행복은 장흥전통가무악전국제전에서 대금 연주로 대통령상을 수상 하였다.
전북에서 활동중인 강행복은 대금의 명인으로  주목 받고 있다.

서울과 경기 성남 지역에서 활동 하는 문효심은 전국규모의 국악제전에서 판소리로 대통령상을 수상 하였다. 국악협회 성남지부장을 역임 하면서 각종 국악대회를 주관 하고 문하생들을 길러 대내외적으로 인정 받는 영역을 구축 하는 것은 물론 평생을 국악(판소리)의 외길에 매진 하고 있다.

※註 : 위에 언급된 국악인들의 경력과 활동 사항은 극히 기초적인 사례이고 자료일 뿐이다. 장흥의 국악을 논하기 위해서는 위에 기술된 장흥국악계에서 활동한 것으로 회자되는 국악인들의 상관관계도 더욱 심도있는 연구와 조사가 필요할 것이다. 특히 이 글에서 맨 처음 구체적으로 언급된 안양 출신의 김상용에 대해서는 심층적인 조명이 있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 글은 차후의 연구를 위한 문제의 제기일수도 있다.

장흥 출신의 판소리의 명인으로는 위에 적은 정씨 일가와 문석준(文錫準)이 있으며 그 후인들이 상당한 활동을 하고 있다.

1963년 발기대회를 거쳐 활동하기 시작한 ‘장흥시조연구회’는 170여명이 회원이 참여 하여 활발한 국악 활동을 전개 하였다. 이 시기가 장흥 국악의 저변확대에 기여한 공로가 크다 하겠다.
동호인 모임이었지만 시조연구 및 경창대회를 개최 하면서 장흥 국악의 향맥을 이어 나갔다. 당시 관내외의 각종경연대회에서 입상한 많은 국악인들이 그 면면을 이어 오게 되었다.
장흥군지(11993년 간행)에 기록된 입상 국악인들은 아래와 같다.
장회창(유치면, 부산직할시 전국남여시조경창대회 1등 입상) 김두배(장흥읍,전국남여시조경연대회1등 입상) 위계천(관산읍,전국남여시조경연대회1등 입상)  고재열(장흥읍.목포 시조경연대회 특부 입상) 김행식(부산면.양산전국남여시조경연대회 갑부 1등 입상)에 이어서  김병관,안만순, 김동권 조복환 전봉미 손옥진, 김정규, 김일환, 이천봉 차주봉 최양수 방기남 백형동 박형섭 이계선 이명규(장흥읍)  이상표 박귀춘 안규석 안상국 이동주  안규섭(관산읍)최봉우 위계민(안양면)박남용 백차흠(용산면) 남정철(대덕읍) 임테환 조육환(부산면)  등이 전국 규모의 경연 대회에서 수상 하는 활약을 보였다.

이 시조연구회는 부침을 거듭 하였지만 그 명맥이 이어져서 (사)장흥보림국악진흥회로 발전적인 변화가 있었다. 장흥보림국악진흥회는 매년 ‘보림국악경창대회’를 개최 하면서 국악 동호인들과 군민과의 교류에 기여 하고 저변 확대에 지대한 성과를 남기었다.
2014년 정정진(전,장흥군의회 의장 역임) 진흥회 회장의 취임과  정명석 사묵국장이 실무를 맡은 이후로는 대내외적으로 질량면의 주목 받는 성과를 거두었다. 더불어 보림국악경연대회는 2019년부터는 동호인들의 발표회와 국악인 초청 행사로 그 면모를 일신 하여 군민들과 소통 하는 행사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

장흥 국악의 면면을 이어오고 있는 프로그램 중에는 장흥문화원이 13년여째 진행 하고 있는 “민요교실(단장: 신은철)”이 있다. 관내 국악 동호인들이 모여 민요교실을 시작으로 매주 모여 연습을 하면서 국악의 취미를 문화적 수준으로 끌어 올리는 노력을 경주 하고 있다. 이들의 쉬지 않은 열정과 부단한 노력은 군민들에게게도 널리 알려지고  있어서 관내의 대소 행사에 찬조 출연을 하는 등  기 실력을 인정 받고 있다. 더불어 매년 정기 발표회를  개최 하여 국악을 통한 군민 문화원 회원들과의 소통을 이어가고 있다.

장흥문화예술회관의 상주공연단체인 “결( 단장 신미경)은 국악을 바탕으로 하는 수준 높은 창작 프로그램을 선보여 장흥 국악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상주단원과 연출 등 전문 인력이 투입된 노력의 결과로 매년 새로운 프로그램을 선보여 장흥국악의 진흥에 일정한 기여를 하고 있어 주목을 받고 있다. 과제는 장흥의 고유한 국악 향맥을 발굴 정리하여  창작과 공연으로 이어지는 성과가 있엇으면 하는 것이다.

장흥문화예술회관에서 운영하는 ‘우리 춤“ 교실 활동도 눈여겨 볼만한 국악 활동이다.
2011년도에 시작된 우리 춤 교실은 우리 고유의 전통 무용을 생활화 하지는 듯에서 출발 하였다. 지금은 ‘한국창작무용교실’로 발전적인 형식으로 퓨전 스타일의 창작무용을 배우고 발표하는 꾸준한 활동을 하고 있다. 한국무용을 전공한 김지은님이 강사로 활동 하고 있으며 안정자 총무와 20여명의 수강생들이 기초반과 중급반으로 나뉘어 매주일 연습에 매짐하고 있다.

가야금연구소 에움( 소장 서혜린)도 장흥국악진흥의 일익을 채워 가듯이 매년 그윽하고 내실 있는 프로그램으로 국악 향수의 기회를 제공 하고 있다.

장흥에서 본격적인 국악 활동을 하는 어랑어랑예술단의 김효정 단장(판소리)의 활동도 눈여겨 볼만한 국악의 모임이다. 전남대학교 국악학과를 졸업하고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2호 판소리 심청가 이수자로 선정된 김효정은 유영애감독의 문하에서 판소리를 수업 하여 고향인 장흥을 지키며 후학들을 지도하고 각종 공연에 출연 하는 것은 물론 지역의 크고 작은 문화 행사에 출연 하여 국악의 저변 확대에 기여 하고 있다

장흥 국악의 발흥의 계기가 되고 장흥출신 국악인들이 자긍심을 가질 수 있었던 획기적인 사건은 1999년에 장흥전통가무악전국제전이 탄생한 후 부터였다.
횟수를 거듭 하면서 전국 5대 국악제전으로 평가 받던  장흥전통가무악전국제전은 대통령상, 국무총리상, 국회의장상, 문화관광부장관상이 수여 되는 권위의 대회로 전국의 실력있는 국악인들이 수상 하고 싶어 하던 제전이었다.
특히 최옥삼 특별상을 제정 하여  장흥의 국악 향맥을 조명 하는 시도는 국악계의 안팎으로 후한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16회째를 마지막으로 중단 되어 장흥 국악의 진흥에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이 대회에서 수상한 가,부,악의 국악인들이 전국의 조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으면서 장흥전통가무악전국제전의 명성을 잇고 있어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특히 최옥삼 특별상을 수상한 기악의 명인들은 ‘최옥삼류가야금산조’의 명맥을 진흥하는 몫을 감당 하고 있으니 이는 장흥의 가야금 명인 최옥삼의 선양에도 기여하고 있다 하겠다.

 ◈장흥출신 국악인
필자가  조사한 장흥출신 국악인의 활동상은 어느 고을에도 뒤지지 않은 인적 자원을 자랑 할 수 있을 것이다.   참으로 자랑스러운 국악의 예맥을 이어 오고 있는 장흥의 후인들은 경향 각지에서 눈부신 활동을 하고 있다. 필자는 어랑어랑예술단의  김효정단장의 도움을 받아 장흥출신 국악인들의 면면을 조사해 보았다. 그러나 개별적인 연락이  닿지 않은 분들이 있어 상세한 경력을 정리하기 어려웠다. 이들 쟁쟁한 명성을 보유한 장흥의 국악인들이 고향에서 공연 하는 기회가 있다면 국악의 향맥을 확인 하는 차원에서 그리고 군민과 우리 고유의 전통예술을 향유하는 측면에서 얼마나 매력적일까. 실제로 2011년부터 2014년까지 장흥문화원이 주최 하여 “서편제의 본향 장흥의 국악 공연” 프로그램을 선보인적이 있었다.당시 4회까지 계속된 공연 프로그램에는 장흥출신의 중견 국악인과 신인들이 한 무대에 서는 아름다움을 연출 했다. 그러나 예산 지원 등 외부적인 사정으로 지속되지 않았다. 이제 이 자료를 토대로 하여 보다 상세하고 구체적인 조사를 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생각에 의존하여 장흥출신 국악인의  활동 자료를  기록해 본다.

*유영애(판소리)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2호 판소리 심청가 예능보유자
광주시립창극단 예술감독
(사)금당유영애소리보존회 이사장
(사)한국판소리보존회 장수군지회 지부장
유영애판소리전수관 대표
1988년 춘향 전국 국악대전 명창부 대통령상 수상
2004년 KBS국악대상 수상
국악대전집흥보가CD취입(서울음반)
각 극장 및 단체 초청 완창발표회 100여회
전주대사습 보존회 이사
미주,유럽,아시지역 20여개국 초청 및 순회 공연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위촉
남원국립민속국악원 예술감독 추임
현) 광주광역시시립창극단 예술감독

*문효심(판소리)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이수자
(사)판소리보존회 성남시 지부장
 전국대회 대통령상 수상

*김동현(고법)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고법 이수자
광주교육대학교 음악교육과 교수

*이영애(가야금병창)

광주광역시 무형문화재 제18호 가야금병창 예능보유자
(사)낙안읍성가야금병창보존회 이사장
제12회 우륵 전국 국악경연대회 가야금병창 대통령상 수상
임방울국악진흥회 이사
광주민속박물관회 이사
(사)이영애국악예술단 단장
2019 자랑스러운 한국인 국악부문 대상 수상



 

*강행복(대금)
정읍국악원 수석
장흥전통가무악 전국제전 대통령상 수상

*박근형(고법)

전국대회 대통령상 수상
 대전무형문화재 제17호 판소리고법 보유자
 대전국악협회 지부장 역임









 
 

*조연희(풍물)
 지역에서 풍물 교습 등 활동

*장태영(풍물)
지역에서 풍물 교습 등 활동

*이태완(판소리)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2호 판소리 심청가 이수자
전라북도 남원 시립국악단 단원

*위은영(거문고)
전북도립국악원 거문고 수석

*정명석(고법)
무형문화재 제29-3호 이수자
퓨전타악그룹‘하늘다래예술단’단원
(사)장흥보림국악진흥회 사무국장

*나승희(가야금병창)
국가무형문화재 제 23호 가야금산조 및 병창 이수자
국립남도국악원 지도단원
전남대학교 국악과 및 동대학원 음악학과 졸업
제31회 전주대사습 가야금병창부문 장원

*김효정(판소리)
전남대학교 국악학과 졸업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2호 판소리 심청가 이수자
어랑어랑예술단 단장
김효정판소리연구소 대표
전남대학교 소리문화연구소 수석
장흥문화원 예능분과 이사
(사)금당유영애소리보존회 장흥군지부 지부장
(사)보림국악진흥회 판소리 강사
전주대사습 보존회 회원

*김안순(판소리)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2호 판소리 심청가 이수자
전남대학교 국악학과 졸업
창작예술단 ‘다 : 온’대표

*이현미(판소리)
전남과학대학 생활음악과 졸업
장흥전통가무악전국제전 일반부 최우수상
일본 고치현,후쿠오카현 공연
순창전국대회 문화관광부장관상 수상
김명신,정철호,성우향선생 사사
전남도립국악단 정단원

*이승민(판소리)
전라북도 남원시립 국악단 단원
전남대학교 국악학과 졸업

*조현정(판소리)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2호 판소리 심청가 이수자
국립남도국악원 정단원
전남대학교 국악과 졸업
장흥 전통가무악 일반부 종합대상

*이밀리(판소리)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2호 판소리 심청가 이수자
전남대학교 국악학과 졸업

*김 진(판소리)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2호 판소리 심청가 이수자
전남대학교 국악학과 졸업
전라남도 도립국악단 단원

*임용남(타악)
중앙대학교 국악대학 타악과 졸업
한양대학교 대학원 석사 졸업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25호 판소리고법 이수자
서울국립국악원 민속악단 수석


*위진영(가야금)
전남대학교 국악과 졸업
조선대학교 교육대학원 졸업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예술강사
광주가야금 연주단 단원
(사)최옥삼류가야금산조 보존회 회원

*김율희(판소리)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춘향가 이수자
중앙대학교 일반대학원 한국음악학과 졸업
제16회 서편제보성소리축제 일반부 최우수상
제16회 남도민요경창대회 일반부 대상
2015 KBS 국악대상 단체상 바라지 수상
국악방송<예술가의 백 스테이지>MC
2018 평창동계올림픽 폐막식 판소리 작창 및 공연
2018 한국문화재재단 창작공연 지원프로젝트 모노음악극<괴물> 작창 및 배우
2019 문재인대통령 북유럽 3개국 국빈방문 공연자

*윤문영(해금)
중앙대학교 전통예술학부 졸업
중앙대학교대학원 졸업
제 38회 신라문화재 전국국악대전 학생관악부분 최우수상(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
제 8회 황산벌전국국악경연대회 일반부 대상
2013 제 1회 독주회 ‘二絃의 길’
2014 제 2회 독주회 ‘二絃의 회상’
2014 초여름밤의 금향’서울국악관현악단 협연
2016 러시아 필하모니아 협연

*김소리(무용)
광주여자대학 무용학과 졸업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예술강사
지.예.모 댄스 컴퍼니 단원
돋움무용단 공연단원
한진옥류호남검무보존회


*김문이(가야금)
전남대학교 국악학과 졸업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예술강사
빛고을 무등가야금연주단 단원
가연하비 가야금 연주단 단원

*조용운(타악)
전북대학교 예술대학 한국음악학과 졸업
창작민속악단 ‘악바리’ 단원

*지명인(판소리)
국립국악고등학교 졸업
한국종합예술학교 전통예술대학원 재학
제31회 동아콩쿠르 일반부 은상

위의 글에서 장흥의 국악 그 예맥을 정리하여 보았다.
그러나 이 글은 극히 기본적인 자료와 기초적인 사례일 분이다. 보다 상세하고 체계적인 장흥의 국악사를 연구 발굴 정리 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기간과 전문 인력과 예산투입이 병행 되어야 소기의 성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간 여러 단체나 기관에서 장흥의 신청, 혹은 국악에 대한 주제로 세미나 심포지움 등의 행사가 있었지만 그 자료들이 정리 되지 않고 있다. 언젠가는 필요한 작업이다.
1993년에 개봉된  영화 서편제의 신드룸은 한국 전통예술 특히  국악과 판소리의  진흥에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서편제의 성공을 계기로 하여 한과 절제의 미학으로 표현 되는 우리 판소리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폭발적으로 고조 되었다.  하여 국악의 대중화와 그 예술적 가치에 대한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는 평을 받았다.그 이면에는 우리 장흥 출신의 큰 소설가 이청준의 소설 “서편제”가 도화선이었다는 사실은 부인 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장흥의 소설가 이청준은 기히 고향을 소재로 하는 수많은 작품을 집필한 작가이거니와 그이의 소설에는  고향의 정서와 전통과 그 내면에 깃들어 있는 예술적 향맥이 줄기줄기 반영되어 있다. 서편제 또한 그런 내면의 정서가 소설작품으로 표현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임권택 감독과의 조우로 영화화 되어 한국 국악의 부흥의 시대를 연출 하였다는 진단이 과장은 아닐 것이다. 장흥의 문학이 한국의 국악을 이끌어낸 쾌거가 아닐까.
그런 측면에서 이청준의 장편 소설 “흰 옷”에서 화합과 상생의 가락으로 장흥의  전통 농악인 ‘버꾸놀이’를 묘사한 대목을 유념 하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소설은 이렇게 화두를 제시 하기 때문이다. 이 논고가 장흥의 문화예술의 향맥을 조명 하는데 일조가 된다면 더없이 좋은 일이 아닐까 싶다.
※ 이 글의 일부 혹은 전부를 인용하기 위해서는 필자,장흥신문의 동의를 얻어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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