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조계종이 법통시원(始源)의 종조(宗祖)로 '도의(道儀)' 스님을 내세운 데서, '선종(禪宗)대가람, 가지산문 보림寺'를 두고 일각에서는 그 '道儀'가 창건한 '道儀 보림寺'인 듯 여기는 바람에, 또한 '道儀'를 '보조선사'로 착각한 글이 등장할 정도라서, 정작 개창주 '체징(體澄)선사'는 밀려나는 모양새가 되고 만다. 그러나 그 종조 '道儀'는 장흥 땅 보림사와 직접 인연이 없었고, 다만 그 법손(法孫) '체징(體澄, 804~880)' 덕분에 가지산문의 ‘제1조, 도의 대사'로 선양(宣揚)된 것뿐이다.

보림寺가 보림寺 지위를 얻은 까닭은 당대에 활동한 '체징' 선사로 인한 것이며, 그 '보조선사 창성塔'이 역사적 물증이다. 신라 헌강王(재위 875~886)은 '체징 禪師'의 공덕을 기려 '보조(普照)'시호와 더불어 '보림(寶林)' 사호(寺號)를 하사하였다. 現 보림寺에는 <보조선사 비문>의 언급 말고는 道儀에 관한 어떤 흔적은 없으며, 후대의 보림寺 관련 詩文에도 道儀는 없다. 그럼에도 장흥에서도 명분론을 앞세워 조계종조 '道儀'를 강조하기에 늘 바쁜 것 같다. 가지산문 法脈을 본다. ’제1조, 도의(道儀)大師'는 속성 왕씨(王氏)로 784년에 당에 유학 가서 821년에 귀국했으나, 배워온 선지(禪旨)를 제대로 펼치지 못했다. 道儀가 40여년을 머물렀던 강원도 양양, 現 진전寺에서도 조계종조 道儀의 추숭 작업에 열심이다. 그 진전寺址에 '진전사址 3층석탑(국보122호)'과 구별되는 '도의선사塔(보물439호)'도 남아있다. ‘제2조, 염거(廉居, ~844)선사'는 속성 염씨(廉氏)로 설악산 억성寺, 선림원址 등에 머물렀다. 원주 흥법寺址에 있었던 '염거和尙탑(국보104호)'은 여러 곳에 수차 옮겨졌는데, 그 승탑에 연꽃 받침대가 처음 등장하였다. 그 역시 장흥 땅에 왕래했다는 어떤 흔적도 없다. <비문>에 기록된 대로, ’제1조 儀대사'와 ‘제2조 居선사'의 조심(祖心)를 계승한 ’제3조 體澄 선사'가 바로 보림寺 개창(改創)주이다. 종성(宗姓,王姓) 金氏로 웅진 출신이며, 837년~840년의 짧은 유학을 거쳐 귀국하였으며, 드디어 859년에 헌안大王(재위 857~861)의 간곡한 초빙으로  '장흥 가지寺'에 머물게 되었다. 870년에 경문王은 선대 헌안王을 기리는 3층 쌍탑(국보44호)을 세웠다. 880년에 體澄은 800여명 제자를 두고 입적하였고, 883년에 헌강王은 남종선(禪) 조계적통의 인가 의미로 그 가지寺에 '寶林' 사액(寺額)을 하사했다. 884년에  '보조선사창성탑(彰聖塔,보물157호), 보조선사 비명탑비(塔碑, 보물158호)'가 세워졌고, 그 승탑에 극락세계를 상징하는 운문(雲紋)이 처음 등장하였다.

그 <비문>에 등장한 '체징 선사' 모습이다. "禪師의 체모는 웅악립(雄岳立), 기윤하령(氣潤河靈), 윤치자연(輪齒自然) 금발특이(金髮特異)하여, 마을에서 찬탄하고 친척들은 놀라워했다, 신통묘용(神通妙用) 초연출중(超然出衆)하였다,(중략), 오른쪽으로 누운 채로 임종했다(右挾臥終), 향년 77세요, 왕산(王山) 송대(松臺)에서 장사 지내고 탑을 쌓아 안치했다." 더 돌이켜 보면, '보조선사 體澄'이 보림사 寺刹을 바로 세운 것은 아니고, 그 100년전 759년에 회엄승 '원표 대덕'(大德)이 창건했던 '가지寺'를 인수 개창(改創)하였던 것. 그 과정에 별 충돌은 없었으니, 화엄본존 '비로자나佛(국보117호)'을 계승하였고, '원표 스님‘의 가지寺 창건사연을 <비문>에 남겨두었다. 결국 '체징 선사'가 머문 보림寺는 '元表'의 화엄 전통까지 포용하여 ’선종(禪宗) 가지산문 종찰(宗刹)‘로 세간에 우뚝 알려졌다. 그 전후사정이 기록된 '보조선사 창성탑碑’는 훗날 방문객들에겐 랜드마크처럼 언급되었으니, 요컨대 '장흥 보림寺'는 '보조 체징의 보림寺'였다, 늦게나마 제안 드린다. '보조선사 창성탑'과 그 <비문>에 관한 역사적 기억을 먼저 되살려봄이 어떠할까? 그 천년 <비문> 앞에서 선인(先人)들은 숙연 찬탄했다. 거기에 새겨진 "도경(道經)/예기(禮記)"와 "무위임운(無爲任運)"은 한국 최초의 각자(刻字) 용례로 여겨진다. 아마 그 '무위임운'은 물 흐르는 듯한 道로서, "성상무이(性相無異),무념무수(無念無修)"의 경지를 말한 것이리라. 또한 함께 새겨진 "다약(茶藥)" 역시 최초 용례로, 장흥茶事와 茶史의 시원이 될 것.
그 <비문>이야말로 장흥땅 역사가 오롯이 들어있는 장흥기록이기에 '장흥판(版) 역문' 작업도 필요하다. 덧붙여, 다시 올 千年에 대비하여, <비문>을 지키는 '보호 비각(碑閣)'도 필요하지 않을까? 또한 보림寺의 적통성을 강조하는 입장이라면, '1조 儀대사, 2조 居선사'와 '3조 보조 체징'의 심인(心印)을 한 덩어리로 뭉친, '동국 조계선종 시원塔'을 세워봄직 하겠다. 그 세 분 화상(畵像)이 현 '보림사 조사殿'에 모셔져있긴 하다. 지나간 1135년 세월의 무게를 온몸으로 이겨낸 '보조선사 창성塔碑', 그 불멸의 역사적 기록에서 배어나는 영기(靈氣)를 마주 할 때면, 장흥 후인(後人)의 가슴은 요동하고 만다. 언젠가 '보림사, 진전사,억성사,흥법사지,석남사,인각사'를 한 묶음으로 돌아보는 '가지산문 순례길'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

  주1)동국 조계선종 법맥의 실질적 계승자로 '태고 보우(普愚,1301~1382)'를 추종하는 '임제태고 종통론'이 있는데, '태고 보우' 스님도 장흥 보림寺에 천리남행(南行)하여 '만법귀일(萬法歸一)' 화두로 수행했고, 다시 보림사 주지로 주석하였었다. 현 보림사 조사殿에는 '태고 보우'의 화상(畵像)도 모셔져 있다.

주2) '보림寺, 보조선사 체징'은 '송광寺, 보조국사 지눌(1158~1210)'과 다른 시대의 다른 인물임에도, 어떤 이들은 일부 전설을 혼동한다.

주3) 현 보림寺의 '외호문(外護門)'에 걸린 현판 "선종대가람(禪宗大伽藍)"은 1657년(효종8년)에 예조와 수어청 양사에서 인가되고, 1726년(영조2년)에 시행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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