栢江 위성록/장흥위씨 씨족문화연구위원

春軒 위계반 선생과 重窩 위홍량 선생은 父子간으로 관산읍 옥산마을 태생이다. 당대 학문이 뛰어나 후학을 강학하고 위선사에 앞장서 여러 발자취를 남겼다.

1984년(甲子) 후손과 문인들은 두분 선생의 학덕을 기리고자 관산읍 옥당리 736-1번지 옥산마을 입구에 유적비(遺蹟碑)와 학행비(學行碑)를 삼가 세웠다. 선비 정신은 후대에 전해지고 있어 비문 등 흔적을 통해 고찰(考察)의 기회를 갖고자 한다.

■ 춘헌선생위공유적비(春軒先生魏公遺蹟碑)
 <비문> 호남을 평소 문림의 고장이라 하며 충효와 문학으로 저명한 가문이 많은데 춘헌 선생 역시 그 하나이다. 公의 휘(諱)는계반(啓泮)이요 춘헌(春軒)은 그의 호(號)이며 장흥인 이다. 公은 서기 1848년 8월에 옥산에서 태어나시니 천자청수(天姿淸粹)하고 성품이 단정하여 유년기부터 효우에 노실하고 가정에서는 글을 우선하여 이 고을에 널리 알려졌다. 송사 기우만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그 조행과 포부는 오직 글이라 하였으며, 면암 최익현, 연재 송병선 두 선생에게 집지(執贄)의 禮를 다하여 문인이 되었고, 최익현 선생이 기대하기는 임번(林樊)을 고수하고 조경강의(助經講義) 하여 강상(綱常)의 뿌리를 깊이 심어 주었다. 송병선 선생은 독서에 힘쓰고 뜻을 지키며 조문석사(朝聞夕死)의 뜻이 희박하여 세도(世道)의 판탕(板蕩)함을 슬퍼하며 동지들과 동강정사(東岡精舍)를 결성하여 매일 주역(周易)의 건곤괘(乾坤掛)를 익히고 호탕세만(浩蕩歲晩)을 장차 어찌하리오! <중략>

서기 1939년 5월 2일 향년 92세에 돌아가시니 유집을 세상에 남길 일만 남았다. 공의 강명하고 준걸한 자질도 다 취하지 못하고 가히 피치 못할 행실이 있으며, 문사(文詞)에 능하고 의리에 발아 포부와 경윤으로도 얻지 못하고 그 거처와 접대함이 고향 상서지지(庠序之地)에도 지나침을 고심하여 유풍과 예속에 울연하여 세교에 보탬이 적지 않았다. 예로부터 선인과 군자의 세상은 궁하게 살며 겸손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처럼 속임이 없는 사람이다. 이른바 관산 토족으로 가법이 있는 자의 하나이며 자손이 빈빈함과 문학의 선비가 많음은 어찌 스스로 된 바이랴? 그 배움도 부족했고 경중이 됨이라. 어느 날 이 고장 선사(善士)이신 계도(啓道)께서 비문을 청(請)하니 어찌 사양하랴. 이상과 같이 약술하다.

大韓光復後四十年 甲子(1984년) 流火節(가을) 가락(駕洛) 金亨在 찬(撰), 靈光 金太璟 서(書), 玄孫 瑢復 감역(監役), 同講契中 근수(謹竪)

비문을 찬(撰)한 김형재(김해人 1901~ ?) 선생의 호(號)는 일청(一靑)으로 화순군 능주면 태생이다. 효당(曉堂) 김문옥(1901~1961), 의재(毅齋) 위석한(1900 ~1981) 선생 외 많은 거유석학(巨儒碩學)과 종유했다. 말년에 익산으로 이사하여 생을 마쳤다. 서(書)는 부산면 내안리 출신 송천(松泉) 김태경(영광人 1918~ 2001)이 하였다. 감역(監役)은 현손(玄孫) 용복(1945년생 초대 양천구의회 의장 역임)이 하였다. 1984년 용강(龍崗) 위용량(1930~1989, 용전리 태생)의 주도로 동강계(同講契)에서 근수(謹竪)하였다.

- 위계반(魏啓泮 31세 1848~1939) 선생 : 초휘는 계황(啓璜)이요 자는 치주(致周), 호는 춘헌(春軒)이다. 1888년(戊子) 장흥향교 재장(齋長 지금의 전교)을 역임한 옥은(玉隱) 위석열(1823~1902)과 영광정씨 사이에서 4남2녀 중, 장자로 태어났다. 勉庵 최익현(1833~1907), 淵齋 송병선(1836~1905)선생의 문인이며, 日新齋 정의림(1845~1910), 松沙 기우만(1846~1916) 선생과 교유하였다. 장천재 부계당근차연재선생판상운(俯溪堂謹次淵齋先生板上韻)을 1912년(壬子) 근고(謹稿)하다. 1916년(丙辰) 장흥위씨 4차 족보인 병진보 편찬시 도유사를 맡아 주관하였다. 1917년(丁巳) 죽천사(竹川祠)의 강당 양춘재(陽春齋) 중건하고, 1924년(甲子) 선전관백공성흠기선비를 찬(撰)하였다. 1929년(己巳) 죽천사 사당 중건을 주도하였다. 1936년(丙子) 회주사(懷州祠) 강당 백산재(栢山齋) 중수상량문을 기술하는 등 위선사(爲先事)에 앞장서 주도하였다. 1939년 92세로 타계하고 묘소는 옥산마을 뒤 조영좌록곤좌(祖塋左麓坤座)다.

졸 후 1949년 손(孫) 쌍백(雙栢) 위 현(1902~1958)의 목활자본 6권(卷) 2책(冊)의 <春軒集>을 간행하였다. 권두(卷頭)에 동곡(東谷) 김준식(1888~1969)의 서문이 있고, 권말(卷末)에 송포(松浦) 정노수(1877 ~1964), 계은(桂隱) 위대량(1884~1951), 위 현의 발문이 있다. 권1·2에 시(詩) 211수, 서(書) 64편, 권3·4에 논(論) 1편, 설(說) 8편, 해(解) 2편, 서(序) 33편, 기(記) 17편, 제발 9편, 상량문 6편, 축문 2편, 제문 4편, 권5·6에 묘갈명 7편, 묘표 16편, 비명 3편, 행장 13편, 행록 12편, 전(傳) 5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현재 성균관대학교 도서관과 방촌유물전시관에 소장 전시되어 있다.

시(詩)는 소박하면서도 따뜻한 정감이 넘친다. 유감(有感), 우음(偶吟), 한음(閒吟),  술회(述懷 등에는 저자의 이상과 포부, 고민 등이 잘 나타나 있다. 범증(范增), 한신(韓信), 주발(周勃) 등은 역사적인 인물의 업적과 공과를 논평한 것이다.

서(書)의 상면암최선생(上勉菴崔先生)과 상연재송선생(上淵齋宋先生)은 당시의 대학자 최익현(崔益鉉)과 송병선(宋秉璿)에게 보낸 글로 학문의 진수, 공부하는 방법 등 학문에 대한 의견을 개진한 것이다.

설(說)중 지봉설(芝峰說)은 이수광(李睟光)의 학문은 바로 주희(朱熹)가 주장한 성리의 학문이며, 송시열(宋時烈)이 제창한 존주대의(尊周大義)라고 찬미한 글이다.

전(傳)의 열녀보성선씨전(烈女寶城宣氏傳), 열부제주양씨전(烈婦濟州梁氏傳) 은 부녀자의 열행을 높이 평가하고 그것을 향리에 천명하여 퇴폐해가는 풍속을 바로잡고자 한 글이다.

기(記)의 송와기(松窩記)는 소나무도 나무인데 사람들이 다른 나무와 구분함에 비유, 군자와 소인의 한계를 규정지은 것이다. 그밖에 서계서(書契序)와 학성재기(學聖齋記)가 있다.

자(子)는 겸와(謙窩) 봉량(1868~1890)과 중와(重窩) 홍량(1881~1961)을 두었다.

손(孫)은 쌍백(雙栢) 현(1902~1958), 형(1906~1973), 금강(錦岡) 훈(1916~2000)으로 현은 봉량(양자로 생부는 홍량) 출(出)이고, 형과 훈은 홍량 출(出)이다. 이하의 손(孫)은 생략한다.

■ 중와선생위공학행비(重窩先生魏公學行碑)

 <비문> 나이 젊은 시절을 생각하면 우리 고장에 학행이 훌륭한 분이 많았다. 간국(幹局)의 재혜(才慧)를 겸하고 투철한 금회(襟懷)를 품고 있는 이는 오직 중와생 魏公이라. 公은 장흥인으로 휘(諱)는 홍량이요 서기 1881년 7월 6일 생으로 중와는 호이다. 公은 일찍 모상을 당하여 상제(喪制)에 밝았다. 성동(成童)하여 차자로 집상하여 애훼함이 과례하였고 상식(上食)에 한 번도 때를 놓진 일이 없고 부친의 상우로 거숙(居宿)이 고적(孤寂)할 것을 애통히 여겨 반드시 차방에 주무시게 하여 안부를 위한 숫자를 물어 보는 일이 시종 여일하니 公의 세상을 배움이 이미 시측하는데 마음 깊이 베어 있음이 빼어났다. 나이 20세에 松沙 선생을 배알하여 인생 30년을 물을 때 봄에 씨앗을 뿌리지 않으면 가을에 수확을 할 것이 없음과 같이 가르침에도 실학을 전심하여 모든 독서와 궁리에 반드시 몸소 실천 위주로 하였다.<중략>

 

公의 재덕(才德)이 모유(謀猷)하여 가히 임금의 은혜는 백성이 입고 때때로 제적(蹄跡)이 충만한 날에 선조의 어진 덕을 입는 것이다. 각질(脚疾)이란 밖에 나가지 않음을 뜻한바 스스로 농상(農桑)을 청함은 자손에게 편안함을 주기 위함이요 혹시 밀조하여 부정하게 사는 자를 배척하여 진실로 가난하고 궁핍한 생활이 편안함을 여겨 수십 학도들이 동강서당을 지켜 조금도 비탈길로 흐름이 없었다. 公께서 세상을 떠나니 어찌 하늘을 우러러 장탄식 하지 않으리오! 公의 욕적이 매몰될까 두려워 석물에 새겨 모든 사람들이 보고 살펴서 公을 추모케 하고자 삼가 이같이 약술한바 막히는 곳이 많도다.
 
甲子 流火 月上澣 世生 竹山 安秉柝 撰 族末生 魏啓珩 書 同講契中 謹竪

1984년 가을 상순 겸산(兼山) 안병탁(1903~1994) 근찬(謹撰)하다. 선생의 본관은 죽산으로 장흥읍 건산 태생이다.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의 학맥을 계승하는 인물로 율계(栗溪) 정 기(1878~1950) 선생에게 배우기 위해 구례군 문척면 토금리로 이주하여 초동서사에서 평생 후학을 교육하였다. 강와(剛窩) 위계형(1913~2000) 근서(謹書)하다. 동강계(同講契)에서 근수(謹竪)하다.

구역 내에 세워진 혜감록(惠感錄)비에는 춘헌선생 유적비와 중와선생 학행비 근수시 헌성에 참여한 죽천사, 옥암계, 소종계, 보가계, 연종계, 삼종계, 옥호계 등 청계공파 종중 내 7소계와 훈도공파종중(훈도계), 동강계원 54명의 인명이 기록되었다. 역필후(役畢后) 1986년(丙寅) 1월 불초손 금강(錦岡) 위 훈(1916~2000)이 새겨 세웠다.
- 위홍량(魏洪良 32세 1881~1961) 선생 : 일제강점기 유학자로 어렸을 때 이름은 학량(鶴良), 자는 낙범(洛範), 호는 중와(重窩)이다.

父 춘헌(春軒) 위계반과 母 남평문씨 사이에서 2남3여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10살 때 小石 김노현(1841 ~1915)에게 수학하고, 다시 홍의재(弘毅齋) 위 봉(1863 ~ ?)의 문하에 들어가 성리학을 공부하였다. 어려서부터 총명 강직하여 1894년(고종 31) 이용태(李容泰)가 장흥부사에 부임하여 향약(鄕約)을 설치하고 부(父) 위계반이 향약도정(鄕約都正)이 되었을 때 곁에서 예(禮)를 다해 시종하였다. 선생은 心石齋 송병순(1839 ~1912), 日新齋 정의림(1845~1910), 雲齋 최영조(1859~1927), 後石 오준선(1851~1931) 등 여러 문인들과 교유하였다. 「위씨종약(魏氏宗約)」을 지어 자손들에게 6가지를 크게 경계하게 하였다.
- 不孝父母 : 부모에게 불효하는 것
- 不和兄弟 : 형제간에 화목하지 못한 것
- 長幼失序 : 장유간에 질서가 어그러진 것
- 男女無別 : 남녀 간 분별이 없는 것
- 賭博후酒 : 도박과 술에 취해 주정하는 것
- 不擇交遊 : 친구를 제대로 가리지 않는 것이다.

1949(己丑)년 장천재 계은당 위대량 모선사실기(桂隱堂魏大良慕先事實記)를 근서(謹書)하였다. 1957년(丁酉) 장흥위씨 5차 족보 정유보 편찬시 도유사를 맡아 주관하고, 만년(晩年)에도 옥산마을 뒤 금산(錦山) 동강재(東岡齋)에서 후학을 양성하였다. 선생의 문하생들은 선생의 고귀한 정신과 학행을 기리기 위해 동강계(同講契)를 조직하여 1968년(戊申) 3권(卷) 2책(冊)의 <重窩遺稿> 을 간행하였다.

서문(序文)은 중헌(重軒) 윤정복(尹丁복 1917~2002) 선생이 썼다. 서(序) 4편, 발(跋) 1편, 시(詩) 445수, 기(記) 11편, 서(書) 102편, 제문(祭文) 14편, 상량문(上梁文) 4편, 묘지명(墓誌銘) 3편, 행장(行狀) 7편 등 다수가 있다. 또한 송포(松浦) 정노수(1877~1964) 선생이 쓴 선생의 행장이 포함되어 있다. 발문(跋文)은 윤정복(尹丁복)과 아들 형(炯)이 썼다. 문인록에는 위문환(1921~1980) 등 48명의 인명이 확인된다. 문집은 방촌유물전시관에 소장 전시되고 있다. 선생께서 왕성하게 활동한 1945년 광복 전후, 선생과 더불어 관산읍 학교마을 태생 송포(松浦) 정노수 선생, 용산면 상금리 태생 잠계(潛溪) 백형기(1881~1948) 선생 등 3분을 속칭 "장흥의 삼문장(三文章)"이라 불리었다. 1984년 용강(龍崗) 위용량(1930~1989, 용전리 태생)의 주도로 선생의 학행비를 옥산마을 입구에 삼가 세웠다. 원래의 묘소는 옥산마을 조산(朝山) 선영 아래였으나, 2007년 曾孫들은 장동면 하산리 44-1번지 거개마을 밭 자락으로 이장하였다.

자(子)는 형(1906~1973)과 금강(錦岡) 훈(1916~2000)이다.
손(孫)은 성문(1934~2017), 성선(1943년생), 성봉(1950년생), 성윤(1958년생), 성방(1963년생)으로 성문은 형의 출(出)이고, 성선, 성봉, 성윤, 성방은 훈의 출(出)이다. 이하의 손(孫)은 생략한다.

자문 : 雅山 위성태(1940년생. 제38대 장흥향교 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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