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혁/호남문헌연구회장

이 글은 장흥가사의 대표적 작품 중의 하나인〈천풍가〉의 작자 청사 노명선의 생몰연대와 작품의 창작시기에 대하여 연구자들 사이에 의견이 일치되지 않고 논란이 있는데 착안하여, 노명선의 생몰연대에 대한 관련 자료를 수집 조사하여 필자의 의견을 피력한 것이다. 장흥가사문학의 연구 발전에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1, 1707~1775년 설

<천풍가(天風歌)>는 청사 노명선(淸沙盧明善)의 작품으로 장흥의 명산인 천풍산〔天冠山〕의 자연 풍경을 서경적으로 읊은 가사 작품이다. 천풍가는 지역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기행가사인 기봉 백광홍(岐峯白光弘, 1522~1556)의〈관서별곡(關西別曲)〉의 뒤를 이었으며 가사 내용의 표현과 기법이 또한 송강 정철(松江鄭澈, 1536~1593)의〈관동별곡(關東別曲)〉과 흡사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어 문림의향(文林義鄕) 장흥의 가사문학을 대표하는 뛰어난 작품 중의 하나로 꼽힌다. 그러나 천풍가는 당대에는 잘 알려지지 못하고, 근세에 이르러서야 전 조선대학교에 재직했던 이종출(李鐘出) 교수에 의해 발굴되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종출 교수는 장흥 위씨 가문의 삼족당 위세보(三足堂魏世寶, 1669~1707)의 가첩인 <삼족당가첩(三足堂歌帖)〉에서 천풍가를 발견하였는데, 거기에는 한글로 “천풍가라, 노청사라”라고만 기록되어 있어서 작자의 본명조차 알 수 없었다.
그 후 이종출 교수는 1966년《한국어문학》에 발표한〈천풍가해제〉에서《장흥지속록(長興誌續錄)》 권3〈부산면(夫山面) 학행(學行)〉에 “盧明善, 光山人, 光原君毅后, 號淸沙. 從遊閔老峰鼎重, 文學名世, 作天風歌, 行于世.”라는 기록을 통해서 천풍가를 지은 노청사의 본명을 확인할 수 있었고,《광산노씨족보(光山盧氏族譜)》를 통해 그의 생몰연대를 알 수 있었다고 하였다.
광산노씨 족보 《광주ㆍ광산노씨대동보(光州ㆍ光山盧氏大同譜)》 권지5에 따르면 노명선의 생몰연대는 숙종 정해년(1707)에 태어나서 을미년(1775)에 죽어 수명이 69세로 나와 있다. 이에 기초한 노명선의 생몰연대는 이후 장흥 지방에서 발간되는 모든 책자와 관련 연구자들의 정설(定說)이 되었으며, 한국사전연구사에서 발간한《국어국문학자료사전》등에 등재되고 장흥군에서 설치한 조형물 등의 기념물을 통해서도 내외에 전파되었다.

2. 1647~1715년 설

위와 같은 선행연구의 결과는 근래에 광산노씨족보를 숙독한 일부 연구자들이 노명선의 생몰연대인 1707~1775년이 그의 부친인 노상충(盧相忠)의 생몰연대인 1624~1688년과 어머니 광산 김씨(光山金氏)의 생몰연대인 1625~1682년의 생애와 이치상 맞지 않고, 또한《광주ㆍ광산노씨대동보(光州ㆍ光山盧氏大同譜)》이전의 광산노씨참의공파선세유적(光山盧氏參議公派先世遺蹟)》의〈청사공가장(淸沙公家狀)〉에 적혀있는 출생 인조 정해년(1647), 사망 효종 을미년(1655)과 일치하지 않는 점, 그리고 노명선이 노봉 민정중(老峯閔鼎重, 1628 ~1692)을 종유(從遊)하였다는 기록 등을 들어 기존의 생몰연대에 대한 의문을 표시하고, 관련 연구자들의 동조를 얻어 노명선의 생몰연대를 인조 정해년(1647)년에 출생하였으며 죽은 해는 효종 을미년(1655)의 기록을 왕력(王曆)의 오류로 보고, 효종의 후대 왕인 숙종 을미년(1715)에 죽은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하는 1647~1715년 설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 같은 주장은 한국학 중앙연구원에서 발간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韓國民族文化大百科事典)》에서도 수용되고 있다.

3. 1587~1655년 설

그러나 이 같은 주장에는 큰 문제점이 있다.〈청사공가장〉에는 노명선의 생몰연대 이외에도 그의 태생지와 동시대 지역 인사인 송담 전유추(松潭田有秋, 1594 ~1674), 감호 김정화(甘湖金鼎華, 1599 ~1660)등과도 교유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위의 주장에서는 노명선의 생몰연대와 교유인물들의 생몰연대에 대한 비교고찰 없이 간지(干支)에만 의존하여 교유인물의 생몰연대와 노명선 생몰연대 사이에 공통점이 없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사실에 주목하여 장흥문화원에서 발간한《장흥문집해제(長興文集解題)》에 등재된 문집 중에서 노명선과 동시대로 추정되는 몇 인물의 문집을 골라 관련 기록을 확인해 보았다. 결과는 아래와 같다.

▼노명선 교유인물 관련 기록
1. 문집명<聽禽遺稿>/저자<魏廷勳>/생몰연도<1578~1662>/관련기록<수답한 시문 12편 등재>/비고<1628,1643년 간지표시 있음>
2. 문집명<霽巖集>/저자<丁鳴說>/생몰연도<1566~1627>/관련기록<師友錄에 등재>
3. 문집명<松潭遺稿>/저자<田有秋>/생몰연도<1594~1674>/관련기록<수답 시문 9수 등재>/비고<만시(輓詩) 1수>
4. 문집명<甘湖遺稿>/저자<金鼎華>/생몰연도<1599~1660>/관련기록<寄題玉川子盧明善草堂 1수>
5. 문집명<南坡遺稿>/저자<安由愼></생몰연도<1580~1657>/관련기록<過盧明善隱亭 1수 등재>
위와 따르면 위의 5인은 모두 16세기 후반에 태어난 인물들로서 1566년부터 태어나기 시작하여 1627년부터 1674년 사이에는 모두 세상을 떠난 인물들이다. 만약 노명선의 출생년도가 위의 주장과 같이 1647년이라면 그때 이들은 이미 죽었거나 50세 이상의 노경에 있던 사람들이다. 따라서 노명선과 교유가 가능한 시기가 아니다.
특히 연번 1의 위정훈(魏廷勳)은 그의 시문집인 《청금유고(聽禽遺稿)》에 노명선과 주고받은 시 11수와 서( 敘) 1편을 남겼는데 그 가운데 <서회청사(書懷淸沙)〉시는 1628년,〈수청사시운(酬淸沙詩韻)〉시는 1643년의 간지(干支)를 알 수 있는 부기를 남겼으며, 위의 5인중 가장 나이가 어린 연번 3의 전유추(田有秋)는 노명선이 태어났다고 주장되는 1647년 이후 겨우 27년이 지난 1674년에 죽었는데도, 생전에 노명선에 대한 만시 <조제노옥천명선(弔題盧玉川明善)〉을 남겼다. 이러한 정황(情況)들은 노명선의 출생년도 1647년 설로서는 설명이 되지 않는 부분으로, 노명선의 출생년도가 위의 교유인물들의 출생년도처럼 17세기가 아닌 16세기 후반으로 소급되어야 하는 유력한 방증(傍證)이라 하겠다.
이처럼 여러 자료들을 종합해 볼 때 노명선의 생몰연대는《광주ㆍ광산노씨대동보(光州ㆍ光山盧氏大同譜)》와 《광산노씨참의공파선세유적(光山盧氏參議公派先世遺蹟)》의 <청사공가장(淸沙公家狀)〉에 기록된 노명선의 생몰연대에 대한 간지(干支)가 맞다는 전제아래, 출생 시기는 1707년 설보다 두 갑자(甲子)가 앞서고 1647년 설보다 한 갑자 앞선 선조 정해년(1587)이 되어야 하고, 죽은 해는 그의 나이 69세가 되는 효종 을미년(1655)이 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생몰연대에 대한 혼란이 초래된 것은 광산노씨족보 편찬자들의 생몰연대에 대한 왕력(王曆) 계산의 착오와 오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을 것이다.
필자가 이처럼 청사 노명선의 생몰연대에 천착(穿鑿)하여 밝히는 이유는 작자에 대한 생몰연대의 오류가 없어야만 가사의 창작연대를 분명하게 알 수 있고, 이를 토대로 장흥 가사문학의 발전과정을 타 지역 가사문학의 계승과정과 비교고찰 함으로서 장흥가사의 단절 없는 전승과정이 설명될 수 있으며, 또한 장흥 가사문학의 문학사적 위치를 공고히 할 수 있는 자산이 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끝으로 이 글을 보충하기 위하여 <청사공가장〉의 번역본을 축약하여 말미에 두니 독자께서는 참고하시기 바란다.

〈청사공 가장(淸沙公家狀)〉
공의 이름은 명선(明善)이고 처음 이름은 명선(鳴善)이다. 자는 복초(復初) 호는 청사(淸沙) 또는 옥천(玉川)으로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조상은 고려시대에 대호군(大護軍)을 지낸 서(恕)가 그의 중시조이고, 현감(縣監)을 지낸 호(琥)가 고조, 판관(判官)을 지낸 이성(以成)이 증조이고, 조부 집(緝)은 참봉(參奉), 아버지 상충(相忠)은 장사랑(將仕郞)을 지냈다. 어머니는 광산 김씨(光山金氏)이다.
공은 인조 정해년(丁亥年)에 전남 장흥군 천관산(天冠山) 아래 마을인 관산읍 방촌리(傍村里)에서 태어났다. 타고난 자태가 비범하고 총명하여 4,5세에 글자를 깨우치고, 성장하면서 문리(文理)를 성취하여 고을 사람들과 사림(士林)의 칭송을 받았다. 일찍이 과거보기를 포기하고 몸을 닦는 공부에 힘쓰면서 후진을 가르치는 것을 업으로 삼았다.
같은 고을 사람인 송담 전유추(松潭田有秋), 감호 김정화(甘湖金鼎華)와 삼로(三老)의 교류가 있어 자주 시문을 수창(酬唱)하였다.
또한 노봉 민정중(老峯閔鼎重)이 장흥으로 귀양오자, 종손(從孫) 취지(就之)와 함께 종유(從遊)하여 민정중의 종유록(從遊錄)에 등재되었다.
평소에 효심이 지극하여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슬퍼하며 삼년동안을 여막(廬幕)에 거처하였다. 만년에 장흥군 부산면 금장(金莊) 산중에 은거하니 세상 사람들이 학문과 출처(出處)를 기려 처사(處士)라 칭송하였다.
저술한 시문이 재난(災難)과 병화(兵禍)로 전해지지 못하고 그 중 천관산을 노래한 <천풍가(天風歌〉한 편만이 사람들의 입으로 전파되었으나, 세상 사람들은 그 가곡(歌曲) 한 편만으로도 그 문장과 학문의 박식함을 알기에 충분하다고 하였다.
효종 을미년(乙未年) 8월 10일 69세로 세상을 떠나니, 향당의 사림들이 회장(會葬)하여 지금의 장흥군 부산면인 용계면(龍溪面) 사곡(蛇谷) 유좌(酉坐)에 장사하였다. 후손으로 부인 전주 최씨(全州崔氏)와의 사이에 1녀가 있고, 그 외 2명의 측자(側子)가 있다. 병자년(丙子年) 2월에 종 구대손 만식(萬植)이 근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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