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5대 명산이자 남도의 영산(靈山)인 천관산(723m), 장천재 풍호대(風乎臺)는 묘각에서 동쪽 방향으로 300여미터 가다보면 청룡등(嶝) 국유림과 경계한 장흥위씨 장천문중 임야(林野) 내 위치한다.

이 정자(亭子)는 원래 1780년(庚子) 원취당(願醉堂) 위도순(魏道純) 선생이 지었던 정자다. 풍평대(風平臺)라고도 불렀으며, 유치면 단산리 태생 복재(復齋) 위계민(1855~1923) 선생의 복재집(復齋集)에 시문이 있다. 정자는 사라지고 없던 것을 2006년(丙戌) 전라남도(장흥군)에서 2층 시멘트 건물로 복원하였다.

■ 위도순(27세 1748~1816) : 자(字)는 일극(一克), 호(號)는 원취당(願醉堂)이다. 안항(顔巷) 위덕후의 6대손이며, 위백양의 아들이다. 방촌리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 장천재에서 존재(存齋) 위백규 선생의 강학(講學)을 받았다. 벼슬에 뜻을 접고 33세 때 정자를 지어 자족(自足)하면서 흐르는 물과 부는 바람을 벗 삼아 자신을 심회(心懷)하면서 지냈다. 1791년(辛亥 정조15년) 방촌의 위씨 친족 30명이 원취당 선생을 중심으로 종친간의 화목을 목적으로 계(契)를 결성하자 존재  위백규 선생은 시기(猜技)하지 말고, 서로 화목하라는 뜻으로 “무기계(無忮契)”라 명명하고 의미를 부여하면서 서문(序文)을 썼다.

시문에 탁월한 재주가 있어 정자에서 원취당원운(願醉堂原韻), 장천재운(長川齊韻), 차풍산정사운(次風山精舍韻), 차최지사(몽암)초당운(次崔知事(夢嵒)草堂韻), 풍호대기(風乎臺記) 등 시문(詩文)은 원취당유고(願醉堂遺稿)에 남겨져 있다. 선생의 유고집은 1933년(癸酉) 현손 오헌(梧軒) 위계룡(1870~1948) 선생이 1권 1책으로 간행하였다. 권두(卷頭)에 송사(松沙) 기우만 선생의 서문(序文)과 권말(卷末)에 심석(心石) 정의림 선생의 발문(跋文)이 있다. 부(賦) 3편, 시 25수, 서(序) 3편, 기(記) 2편, 잡저 20편, 축문 1편, 부록으로 서(序) 1편, 차운(次韻) 15수, 만(挽) 23편, 행록 1편, 가장ㆍ행장ㆍ묘표ㆍ문(文) 각 1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詩 중, 「백발탄(白髮歎)」은 41세 때 백발이 생겨나는 것을 보고 자신의 심회를 읊은 칠언율시이다. 마음은 아직 젊어 웅비할 만한데 어느덧 이렇게 백발이 되었다고 탄식하며, 이제부터는 흐르는 물과 부는 바람을 벗삼아 성품을 도야하겠노라고 만년의 인생을 설계하는 내용이다. 현재 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원래의 풍호대 정자는 원취당 선생 현손(玄孫) 위계룡 선생이 중수(重修)하여 풍호대중수기(風乎臺重修記)를 남겼다.

그 후 풍호대는 언제, 어떻게 철거되었는지 알 수 없다. 이후 1974년(甲寅) 그 자리에 옥천(玉泉) 위욱량(1921~1994)이 관산면장 재임(1970년 5월 7일~1975년 9월 27일)시 백미(白米) 25가마를 자부담 하여 철재 기둥과 함석 지붕의 육각정(六角亭)을 건립하였다.
 

이곳에는 송곡(松谷) 안규동(죽산人 1907~1987) 선생이 쓴 풍호대(風乎臺)와 벽강(碧岡) 김 호(광산人 1922~1988) 선생이 쓴 별호(別號) 육각정(六角亭) 액호 편액을 걸었다. 육각정 정자는 장천재와 함께 천관산을 찾는 등산객들의 쉼터 기능을 하면서 농사일이 시작하기 前 3~4월에 관산면 지역 각 마을 부녀자들의 중요한 행락(行樂) 문화공간으로 이용되었다. 이후 세월은 흘러 육각정은 철재 기둥과 함석 지붕이 녹슬고 낡아 방치되어 제 기능을 못하고 있던 것을 2006년 전라남도의회 김 성의원 주선으로 지원사업이 추진되었다. 일금 150,000,000원 예산이 책정되어 시멘트 기와 지붕 2층 정각의 풍호대를 건립하여 관산읍 일대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 기능을 복원하였다. 이때 영월정(迎月亭) 앞 쉼터광장도 같이 조성되었다.

풍호대 내에는 송곡 안규동 선생이 쓴 풍호대(風乎臺) 액호 편액 1점과 주인(主人) 원취당 위도순 선생의 풍호대기(風乎臺記), 현손 오헌 위계룡 선생의 풍호대중수기(風乎臺重修記), 7대손 상산(觴山) 위성탁(1926년생)의 풍호대운(風乎臺韻) 등 시운 편액3점이 걸려 있다.

최근 풍오대를 찾아을 때 목전(目前)에 나무들이 많이 자라 일부 관산읍 소재지 조망을 가리고 있어 유수(流水) 같은 세월의 흔적을 볼 수 있었다. 여기서는 관산읍 소재지, 죽교리 들판, 방촌리 들판, 소산봉(해발 243m), 멀리 득량만 완도군 금당도까지 한눈에 조망되어 상큼한 봄바람을 마음껏 불러보았다.

- 장천재운(長川齋韻)
問客遍遊履欲穿 : 묻노라 손님께선 편유하느라 신발이 뚫어진 듯한데
應睹名勝獨超然 : 응당 명승을 보았으므로 홀로 초연(超然)하구나
連峯奇絶層岩出 : 연봉이 기절함은 층암(層岩)이 솟아있기 때문이요
滿壑喧虺瀑布懸 : 골짜기가 시끄럽고 요란함은 폭포가 달려있기 때문이네
石逕過時非俗子 : 돌길 지날 때는 세속의 사는 분이 아니었고
雲巒躋處半神仙 : 구름속의 뫼뿌리를 오름에 반틈은 신선이네
溪堂自此生顔色 : 계당(溪堂)이 이로부터 안색(顔色)이 나게 되니
漏世風光世上傳 : 풍광이 누설(漏泄)되어 세상에 전하리라.
원취옹(願醉翁) 도순(道純)

右我高王考願醉堂府君遺稿惟府君十數年嘗讀書于斯堂築風乎坮日與學者風詠而歸觀於家狀班班可考也詩意想與客酬唱者不事雕飾專用淳雅但詩中應睹之睹以近格之偶似失廉無或傳寫之誤耶雖未可知然一言一字莫非吾府君精神中出來誰敢擅改玆用依本稿刊揭後之覽者庶有以之焉.
辛亥春 玄孫 啓龍 感泣書
右는 나의 고조부 원취당(願醉堂) 부군의 유고다. 생각하건데 부군께선 10수년을 이 당에서 독서하였으며 풍호대(風乎臺)를 지어놓고 날마다 학자들과 바람 쐬고 시(詩) 읊으며 돌아왔다고 하는데 가장(家狀)을 보면 선명하고 뚜렷하게 고증이 된다.
가만히 시의(詩意)를 엿 보건데 객과 같이 수창(酬唱)함에 조식(雕飾)을 일삼지 아니하고 오로지 순아(淳雅)함을 사용하였음을 상상하며 다만 시 가운데 ‘응도(應睹)’의 도(睹)는 근체시격(近體詩格)으로는 우연하게도 염(廉)을 잃은 것 같으니 혹시라도 전사(傳寫)할 때 그릇됨이 없었는가 싶으나 가히 알 수가 없으며 일언일자가 부군 정신 속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으니 누가 감히 마음대로 고치겠는가. 이에 본고에 의하여 간행하여 게시하니 뒤에 보는 이는 거의 아는 분이 있으리라.
1911년(辛亥) 봄 현손(玄孫) 계룡(啓龍) 감읍서(感泣書)하다.

 

저작권자 © 장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