栢江 위성록/장흥위씨 씨족문화연구위원

■노홍(함평人 16세 1561~1619) : 자는 여신(汝信), 시호는 충렬(忠烈), 호는 관암(冠巖)이다. 시조는 노목(魯穆)으로 고려 인종 때 삼가현감(三嘉縣監)이 되어 이자겸(李資謙)의 난을 평정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라 함풍군(咸豊君)에 봉작되고 시호(諡號)는 문충(文忠)이다. 父母는 군자감정 노평국(魯平國) 전주이씨, 祖父母는 노우명(魯友明) 광산김씨, 曾祖父母는 노형(魯衡) 옥천조씨이다.
公은 순천 주암 갈마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용모는 엄정하고 기골이 장대하며 지략과 병법에 뛰어나 무용절인(武勇絶人)하고 천성이 강직하여 무관(武官)에 선출되어 남천부장(南薦部將)이 되었다. 1587년(丁亥) 27세 때, 장흥위씨 관산파 오덕(五德)의 첫째로 군자감정에 제수된 위덕홍(魏德弘 1537~1606)의 차녀와 혼인하고 지금의 관산읍 옥산(외당곡)마을에 거주하여 함평노씨의 입향조가 된다. 후손들은 430여년이 지난 현재까지 거주하고 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도원수 권율 진영의 병사 황진(黃進), 수사 위대기(魏大器) 휘하에서 이치·의령·행주대첩 등 전투에 참전하여 功을 세웠다. 이후 해로(海路)에 익숙하여 권율의 계청(啓請)으로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 장군 휘하로 들어가 노량해전에서 크게 활약하였다.

이후 1600년(庚子) 무과에 급제하고 남도포만호(南桃浦萬戶)에 제수되어 석성 축성 등 선정을 베풀었다. 진도군 임회면 남동리 남도진성에 "萬戶魯公鴻善政碑"가 세워져 있다. 1605년 임진왜란 참전 功으로 선무원종이등공신에 훈록 되고 어모장군(禦모將軍 정3품하) 품계로 종3품 관직 임치진첨사(臨淄鎭僉使)에 이어 훈련부정(訓鍊副正) 등을 지냈다.

특히 정략장군(定略將軍 종4품상) 남도포만호(南桃浦萬戶)로 재임 때, 1604년(선조 37년) 6월 4일 일본의 쇼군(將軍)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명령에 따라 캄보디아와 교역 관계를 체결하기 위해 각종 무기로 중무장한 왜적 무장 상선과 벌어진 당포 앞 바다 전투에 참전하여 功을 세웠다.

선조(宣祖)는 그해 승전을 기리기 위해 "당포승첩지도"(가로 80cm, 세로 150cm)를 제작하여 삼도수군통제사 겸 경상우도수군절도사 이경준(李慶濬), 정략장군 남도포만호 노홍(魯鴻) 등 참전 공신 28인에게 하사하였다. 이 지도는 1972년 1월 29일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5호로 지정되었다. 관산읍 신촌마을 거주 후손 노병천(27세, 1947년생)이 소장해오다가 현재 국립진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1618년(광해10) 公이 장흥 관산 옥산 집에 기거할 때 후금이 대병력으로 명나라를 침략하였다. 명나라는 조선에 원군(援軍)을 요청하자 조정(朝政)은 도원수 강홍립(姜弘立), 부원수 김경서(金景瑞), 좌영장 김응하(金應河), 우영장 이일원(李一元) 등 1만 3,000명을 파병하였다. 이때 公은 김응하의 부장이 되어 장흥출신 첨정(僉正) 변덕일(卞德馹)과 압록강 건너 심하(深河) 전투에서 활약하였으나 철기군으로 무장한 후금에게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대패하여 1619년 3월 4일 순직(殉職)하였다.
公의 시신은 수습하지 못해 군기(軍旗)와 활만을 가지고 초혼례장(招魂禮葬)으로 정경부인(貞敬夫人) 장흥위씨(1564~1653)와 합장하였다. 조정에서는 公의 순국정충(殉國貞忠)을 태성쌍충(太星雙忠)이라 하고 資憲大夫戶曹判書兼知義禁府事魯鴻 贈純忠績德補祚功臣崇政大夫議政府右贊成兼判義禁府事綾羅君으로 공신에 훈록하였다.
※ 순충적덕보조공신(純忠積德補祚功臣) : 조선 시대에 증직(贈職)된 이등 공신에게 내리던 훈호(勳號)를 말한다.

묘소는 용산면 월송리 산 114번지 재송마을 동쪽 야산 수리재에 위치한다. 묘역 내 아래에는 아들 통덕랑 노일변(1609~1666)과 配 칠원(함안)윤씨 묘소가 자리하고 있다. 매년 11월 첫째 일요일 묘전에서 2位 시제를 모신다. 公은 나주시 문평면 거평사(居平祠), 무안군 해제면 학산사(鶴山祠), 영암군 서호면 관봉사(冠峯祠)에 배향되었다. 명나라 신종 황제 제문(祭文), 병계(屛溪) 윤봉구 선생 묘표(墓表), 영이재(詠而齋) 위문덕 선생 행장(行狀), 존재(存齋) 위백규 선생 행장후서(行狀後書), 황간(黃榦 1713~?)의 글이 전한다.

묘소 앞 구(舊) 비석 전서(前書)는 訓鍊副正魯公之墓 淑人長興魏氏合兆라 새겼다.

1911년(辛亥) 10월 8대손 노선탁(24세 1846~1918), 노성탁(24세 1875~1939)이 삼가 세웠다.
2000년(庚辰) 3월 함평노씨 한림공파 옥산종중에서는 11대손 노병철(27세 1934년생, 관산읍 신촌마을 태생)의 주도로 묘소 둘레석, 석축시설 등 묘역을 정비하고 오석비를 삼가 세웠다. 전서(前書)는 禦侮將軍訓鍊副正冠巖咸平魯公鴻之墓 配淑人長興魏氏合兆라 새겼다.

13대 방손 노종후(29세 1931년생, 중등학교장 역임, 무안군 해제면 태생) 근찬(謹撰), 김용보(김해人 1930~2005, 장흥읍 건산리 태생) 근서(謹書)하다.

묘역 입구의 咸平魯氏世阡碑는 2014년(甲午) 10월 노병철(27세 1934년생, 관산읍 신촌마을 태생)이 근수(謹竪)하다.

13세 노형, 14세 노우명, 15세 노평국 등 3위 선조의 묘소는 순천시 주암면 갈마리에 위치했었다. 옥산종중에서는 2002년(壬午) 장흥군 관산읍 용전리 산 252번지로 이장(移葬)하여 설단하고 13세부터 23세간 선조 33位(配 포함) 제향을 매년 4월 첫째 일요일 시제를 모시고 있다. 후손들의 주요 거소는 장흥군 관산읍 옥당리 신촌마을, 곡성군 석곡면 염곡리 노치마을이다.
자문 : 관포(冠圃) 노병철(27세 1934년생, 관산읍 신촌마을 태생, 화순읍 거주)

-明 神宗 皇帝 祭文(명 신종 황제 제문) 역문(譯文)
황제나 위사(衛史)를 보호하는 병사들에게 조선장수 노홍 장군은 목숨을 걸고 정의와 의리를 지키니 내가 마음속 깊이 가상하게 여긴다. 원 하건데 순절한 장수에게 상공(上公) 벼슬을 주어 황제의 명(命)에 따라 봉행하다가 장군은 죽음을 각오하고 사졸(士卒)은 생존의 기백이 없으니 오랑캐가 당당하게 기세가 올라 전군(全軍)이 크게 敗하니 모든 장수들은 살려고 하는데 장군만이 사력을 다하였으나 목숨을 바치니 내가 매우 부끄럽도다. 일편단심은 누가 본받으며 백골은 누가 거두어 갈 것인가? 백발의 부모는 문에 기대어 살아오기를 망단하고 홀로 있는 아내는 산두석(山頭石)이 되었도다. 그러나 비록 나의 부끄러움은 갚을 수 없으니 장군은 죽었으나 그 죽음은 광명(光名)뿐이다. 추상(秋霜)같은 대절(大節)과 백일(白日)같은 정충(精忠)은 만고(萬古)에 강상(綱常)을 충분히 돕고 만고(萬古)에 장수의 표본이 되었으며 만고(萬古)에 대의를 밝혀 만고(萬古)의 간유(奸諛)를 징계(懲戒)하였다. 장군은 비록 한번의 패전으로 순절하였지만 죽지 않고 만고의 사자(使者)로 일편단성(一片丹誠)이다. 모든 장수들이 패전하여 순절함을 어찌 휼문(恤問)하오리까? 내가 더러운 적(敵)에게 어떠한 수치(羞恥)를 당하겠는가? 오호(嗚呼)라 오악(五嶽)의 산은 움직일지언정 한 절개(節槪)는 움직이기가 어렵도다. 장군 같은 충성(忠誠)과 장군 같은 용맹(勇猛)과 장군 같은 지혜(智慧)인데 누구하나 도와주는 사람이 없음은 나의 죄(罪)로다. 덕(德)을 공경하고 보공함은 옛날부터 법도에 있고 충절은 귀감으로 나타났으니 나는 선왕을 계승하여 적은 정성을 표하고 구원(황천)의 충혼(忠魂)을 애석(哀惜)한다.(본 원문은 호남절의록 충절편과 함평노씨 대동보에 기록 보존되고 있음.)

- 副正魯公 鴻 墓表(부정 노공 홍 묘표)
春秋之義 莫大於尊周 亦天理中一事 今於君臣之 能盡性分之所當爲 則自可合於天理 雖不讀一部春 尊周之義 固自在矣 嗚呼 故副正魯公鴻 非所謂其人者耶 昔我神宗皇帝萬曆四十六年戊午 建虜大寇 帝下詔徵兵 本國金將軍應河以宣川郡守 領左營兵將赴 時公棄官居天冠山下 曾爲金將軍所知 至是檄召之 公與同鄕壯士卞德馹 卽日辦行裝將發 有一子尙幼 攀衣啼號 公抱而置之曰 汝其好長也 慷慨語家人曰 大丈夫今有此塞外之行 幸得死所 萬里遼계 과革是分 兒女輩無作別離狀 妻노莫敢仰視 立飮酒三大椀 遂上馬不顧而行 比至從金將軍 隷副元帥 己未二月二十一   渡江入遼 及深河之戰 公與德馹 左右金將軍 力戰不離次 所射殺甚衆 俄而矢盡劒亦折 將軍曰 公等皆去 公曰 豈有獨生之理乎 遂與之同死 實三月四日也 一卒伏於亂屍中 潛見其始終 生還本國 爲語湖南人曰 深河大樹下積屍中 長身大面 염半白者 卽魯將軍屍也 嗚呼偉哉 公之死也 華陽宋先生書金將軍廟碑曰 將軍之一死 可以明天下之大義 立天下之大經 爲春秋尊周攘夷之義也 深河大樹 眞公之死所 終能與金將軍爲春秋尊周之人 則正所謂盡君臣性分之理 讀春秋書而自合於尊周之義者也 公豈不偉且奇哉 字汝信 咸풍人 始祖諱穆 麗朝封咸풍君 其後有賜紫金魚袋仁厚, 修文殿學士貫道 累世冠冕 我朝有得平 文章名 歷踐翰林,舍人 公考諱平國 官軍資正 公以嘉靖庚申生 身長八尺餘 體大過圍 廣상方이 面如斗 자염若神 怒則책책如戟 勇力絶倫 韜略암熟 見者皆以魯將軍稱 當壬辰倭寇 以武蔭末班選壯士 與兵使黃進,水使魏大器等皆力戰 斬獲輒居最 都元帥以公習知海路形便 啓請鎭南桃浦 公卽整理船具 急赴李忠武期會 適潮退船膠 衆不得예下 公遂負船推之 船疾如矢 賊船已漲海 公且戰且行 克赴期 李公見而壯之 稱奬焉 後錄原從二等勳 敍功增秩 至訓鍊副正 始登庚子武科 公性亢直 老而益硬 與世寡合 公亦無進取意 晩爲會寧鎭萬戶 則歎曰 折腰向鄕里小兒 吾亦恥之 遂謝病歸冠山舊居 時或射獵山澤間 每以覇陵亭李將軍自황 後以遺衣依矢復禮 葬于長興拂聳山東坐坎之原 淑人魏氏부焉 淑人父軍資正德弘 祖參奉鯤 淑人享年九十餘 說當時事歷歷 子孫嘗錄以爲家乘云 子一變 一變三子時聖,禧聖,師聖 二女爲金克成,徐一中妻 弼周,弼宗時聖出 弼昌,弼宣,弼武禧聖出 弼건師聖出 皆好義氣善騎射 不墜公偉丈夫風 公之忠義貫金石 儀度出倫類 天固有意生者 公終守志死事 義光尊周 公可謂不負天所生之意也 然生而君上不知其何狀 歿而忠節不見其褒錄 何天之生之者厚而報施者薄也 抑天下勢而已 豈天定 亦不能勝人而然耶 傳所謂天地之大 而猶有所憾者非耶 弼건子準一從於溪上 一日以公狀示余 謁余公墓文 余感慨而書之如此 비刻于石陰 時崇禎甲申後再庚辰淸明日 坡平 尹鳳九 書 1760년(庚辰)
<출처 : 병계집 제55권>

노홍(魯鴻)장군은 당시 좌영장이었던 김응하(金應河)의 부름에 응한 인물이다. 1619년(광해군11) 2월 심하의 전투에 참여했고 전투 중 사망하였는데, 생환하여 온 사람이 “심하의 큰 나무 아래에 쌓여 있던 시신 가운데 장신에 얼굴이 크며 수염이 반백인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노 장군의 시신이었다.”라고 하였다.

- 書副正魯公鴻行狀後(부정 노공 홍 행장 후서)
故老之能言魯公者 余猶及聞焉 公居家不妄交人 在官不貳其職 不妄交 性之潔也 不貳職 心之實也 惟其能潔而實也 故苟不得志 寧阨竆而不以爲累 苟見義之所在 遂能死而無悔 此其所以爲眞丈夫也 爲魯公  苟能識此而用力焉 則魯公爲有後 而魯氏之世祿將未艾也 魯氏其勉
고로(故老) 가운데 노공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사람으로는 내가 그나마 들은 것이 있다. 공은 집안에 거처할 때 함부로 사람을 사귀지 않았으며 관직에 있을 때는 자기 직무를 어기지 않았다. 함부로 사귀지 않았다는 것은 성품이 고결하다는 뜻이고, 직무를 어기지 않았다는 것은 마음이 신실하다는 뜻이다. 성품이 고결하고 마음이 신실하였기 때문에 만약 뜻을 얻지 못하면 차라리 곤궁하게 살망정 곤궁에 연연하지 않았다. 만약 의리와 관계된 일을 보면 끝내 죽어도 후회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진정한 대장부가 되는 이유이다. 노공의 후손이 진실로 이런 점을 잘 알아서 힘을 쓴다면, 노공은 훌륭한 후손을 두게 될 것이고 노씨의 세록(世祿)도 사라지지 않을 터이니, 노씨 가문은 힘써야 할 것이다.
<출처 : 존재집 제21권>

저작권자 © 장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