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회진(會鎭)' 유래에 대한 혼선이 잦다. '나루津, 회진(津)'으로 오해하는 견해도 여전하다. 일부 보성사람들은 1597년 장흥의 의병향선 10척이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을 따르며 모인 '장흥 회진 회령포'를 놓고 마치 '회령폐현(廢縣)에 속하는, 현 보성 회천면 군학리'인듯 호도(糊塗)한다. 1894년 장흥동학혁명 때 이른바 수만 농민군이 집결했다는 '거(據) 회령포鎭'을 두고 '장흥 회령鎭(城)'이 아닌, '보성 회령방'으로 오해하는 일부 동학연구가도 있다. 또 <회진면지,2007>를 보면, 그 유래를 '나루津'에서 찾는 사례가 잦다.

살펴본다. 현 '회진(會鎭)面'은 1985년에 재등장했는데, 그 '회진(會鎭)'의 정체성(正體性)은 어디서 연원하는가? 장흥부(府) '會鎭'의 ‘진(鎭)’은 조선시대 진관(鎭管)체제의 '관방(關防) 鎭'에서 유래하였다. 종4품 수군만호가 주둔한 ‘鎭’, 작은 성(城)이 설치된 ‘진보(鎭堡)’로서 국방요새인 것. 다만 조선 초에 장흥府 동쪽32리에 위치하던 수군병선 정박지(회령)에서 1425년에 장흥府 남쪽72리 현재 위치로 이진(移鎭)을 하고, 1490년에 축성(築城)함에 있어 옛 지명 '회령'을 사용한데서 '회령' 명칭에 관한 혼선이 야기된 것뿐 1425년경 장흥府 남쪽으로 옮겨온 '회령포鎭(營)'이 곧 현재의 ‘장흥 會鎭'의 역사적 근원이다. 거듭 말하면, ‘會鎭’ 지명은 국방요새 관방으로 수군만호가 주둔한 '鎭'에서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회령포鎭 <회령鎭 < 회鎭" 순서로 축약된 것이고, ‘관방 鎭’이 없는 ‘회진’은 상정(想定)할 수 없을 일. 이런 제도적 사정은 영산강변 '나루津'에서 유래한 ‘나주 회진(會津)’과 대비된다. 장흥의 홍보용 별칭 '정남진' 역시 ‘정남鎭'에 해당할 것이고, 여타 '나루津'을 전제한 설명들은 모두 견강부회일 뿐. 그럼에도 "원래는 '나루津'가 있었다, 또한 나루터(津)의 '청신근(淸愼勤) 샘' 주변에 모여 살았다"고 전제하고서 "나루터 ‘회津’임에도, 1490년 축성 때 ‘회鎭’으로 바꾸었다, 또는 城을 폐지한 1895년에 ‘회鎭’으로 바꾸었다, 또는 일제당국이 ‘회鎭’이라 바꾸었다"고 추단함은 역사적 실상을 뒤집는 것. 즉 1914년경에 사용된 '대덕면 회진리(會鎭里)' 행정명칭은 "회령포鎭 <회령鎭 <회鎭"으로 변천된 줄임말에 해당하는 것이지, 달리 일제당국이 '나루 회津'을 '진관 회鎭'으로 고쳐버린 창지(創地) 지명으로 볼 수 없다.

돌이켜 조선초 장흥의 나루터(津)로는 <신증동국여지승람,1530>에도 ‘우도津’과 ‘해창津’만 나오며, ‘회津 나루‘는 없었다. 1658년에 ‘회령鎭’ 현지 민원을 해결한 암행어사 이단상(1628~1669)의 <정관재집>에도, <1747,정묘지/1757,여지도서/1789,호구총수/1910,경술지>에도 '나루 회津'이 아닌, '회령鎭'으로 나온다.  <정묘지>는 '도로, 성씨, 마을' 항목에서 '회령鎭'과 '회령鎭村'을 기록하고, "노력도- 在회령鎭"을 말하였다. 그럼에도 ‘나루 회津’이 먼저 있고 ‘진관(鎭管) 회鎭’은 나중인 듯 오해하는데, 그런 ‘나루 회津’ 성격이 시기적으로 ‘진보 회鎭’보다 앞선다는 역사적 사정도 없을뿐더러, 옛 ‘회진반도’ 일대는 온통 바다였다가 ‘관방 회령鎭’이 들어서며 비로소 성(城) 주변에 ‘회령鎭村’을 형성했던 것. 그 회령鎭이 커지고 일부 간척이 되면서 한참 후대인 조선 말엽에 ‘덕도’로 건너가는 일부 나루(津) 기능이 생길 수도 있으나, ‘덕도’에는 두 곳 노두길이 이미 있었으니, 유일한 나루(津)도 아니었고, 설령 ‘나루(津)’가 있다한들 전체지역과 전체주민을 대표할 지명으로 삼기에는 합당치 않다. (한편, <조선지지,1910>는 ‘나루 회津’을 표기하면서도, ‘회령鎭, 회령鎭城’을 아예 말하지 않았다) 또 다른 질문으로, "현 지명이 '會鎭'이면 삼도통제사 李충무공의 재기를 기리는 축제를 "회진포(會鎭浦) 축제"로 불러야 합당하지 않느냐"는 것. 임진정유난 당대 명칭이 '회령포鎭'이었고, 특히 <난중일기>와 당대 문헌에 '회령浦'로 기록되었기에 당대 역사성에 충실하여 "장흥 회진 회령浦 축제"로 명명한 것이리라.

■몇 사정을 덧붙인다.
1) 1986년 '회진면'이 분면(分面)됨과 동시에 그 모체 '대덕읍'은 '대흥(大興)읍'으로 환원해야 했을 일. 왜냐하면 '대德읍'은 '大興'에 '來德'을 합성한 것으로 그 ‘덕(德)’은 '덕도, 래덕면'의 ‘德’으로 ‘회진면’에 소속하기 때문이다. <1789, 호구총수/1910, 경술지>는 '대흥면(방) 회령鎭'을 말했었다.
2) 세종 때 '김종서'가 개척한, 함길도 육진(六鎭)에 '회령, 회령鎭'이 있는데, 전라도 장흥에 있는 '회령포鎭'과는 남북 위치와 육군鎭/수군鎭 차이 때문에 상호혼동 여지는 없었을 것.
3) 1583년 9월경  전라관찰사 '백담 구봉령(1526~1586)'은 남변 순시길에 '장흥 회령포鎭(城)'에서 1박하며 <詩, 宿회령浦>로 ‘초새고성(楚塞孤城)에서의 국경의 밤’을 노래하였다.
4) 장흥 ‘회령포鎭’의 이진(移鎭) 축성에 관하여 <대덕면지,1996>는 "1490년에 ‘회령폐현(현 보성 회천쪽)’에 축성되고, 1554년에야 ‘현 장흥 회진’ 쪽으로 이진했다."고 기술한 반면에, <회진면지,2007>는 "1490년에 현 위치에 ‘회령鎭城’이 축성되고, ‘1554년 이진說’은 잘못 추론되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 검색으로 바로 확인되는데, <회진면지> 견해가 백번 합당하다.
5) 백의종군을 마친 李충무공도 ‘장흥 회령포’로 들어와 재기(再起)했고, 중1년 소년으로 대처로 떠났던 소설가 이청준(1938~2008)도 돌아와 묻혔고, 1923년경 식민지 시대의 하늘을 날던 비행사 이상태(1904~1985)도 돌아와 묻혔다. '會진-會’에는 혹 ‘돌아올 회(回,회귀, 회생)’의 의미가 배어있을지 모르겠다.
6)장흥 ‘會寧鎭城’ 현지 성터에 원형복원 추진이 계속 여의치 않다면, 그 가까운 해변에 현대적 건축양식으로 상징적 복원을 시도해보면 어떠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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