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흥부(府) '다소(茶所) 정화소'를 뜬금 없이 부정하며 '봉수촌(烽燧村) 정화所'로 간주하는 일부 보성사람들이 있다. 나아가 '장흥府 13茶所'를 전부 부정하면서 보성 땅이야말로 '茶의 수도'라 자칭 운운한다. 도대체 어떤 기준과 어떤 근거로 그런 주장을 함부로 하는 것일까? 
13茶所 중에 '정화소(丁火所), 거개소(居開所)' 말고는 아직 위치와 개별적 所와의 관계 등이 규명되지 않았음에도 일각에서는 이른바 보성茶 우위론 입장에서 장흥 13茶所를 부정하는 것 같다. 오늘은 장흥府 13茶所 중에 <茶所 정화소>를 살펴본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장흥府 茶所 정화소는 동쪽 5리에 있다."고 기록되었고, 현금에도 '丁火所'로 추정되는 茶田을 平化마을 주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장흥府 기록과 ‘부동방 平化’ 사정에 비추어 과연 '茶所 정화소'인지, '茶所와 무관한, 봉수촌 정화소'인지 검토해본다.
1) <세종실록지리지> 등에서 확인되는 '장흥府 봉화대 5곳' 현장에 있어 '丁火所'로 칭명한 사례는 없다. 장흥의 봉수역무를 특정마을이 전담했다는 기록도 없다. 또 전국적으로 봉화대와 가까운 산하촌이 있었어도 '丁火所'라는 ‘所’로 병칭된 사례는 없다. ‘丁火所’를 ‘봉수(烽燧)所’로 등치할 어떤 근거도 없다.
2) <신증동국여지승람,장흥府> <정묘지,총론>은 ‘지역 성씨(姓氏)'를 소개하며 "丁火/申씨"라 기록했는데, 이때 '丁火‘는  '회주,수녕,안양,유치,장택,회령'처럼 장흥府 영역을 구성하는 단위지역과 동격으로 나열된 차원이고, 달리 '丁火‘를 억불산 봉수대 산하촌으로 좁게 지칭한 것이 아니다. 더구나 <정묘지, 마을성씨>에서 정작 申氏는 '平化 마을성씨'로 기록되지 않았으며, 그 동쪽 인근 '대치마을, 申氏'로 나올 뿐이니, ’丁火‘는 ’平化‘ 마을보다 큰 광역 개념이었다.
3) <정묘지,부동방>에 기록된 "여리(閭里,마을)/平化, 본(本) 丁火所" 부분을 ’봉수촌‘으로 단정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平化', 그 저지대 기슭에 어떤 봉수대가 있을 수 없는데다가, "평화, 本 丁火所"라 기록한 취지는 "평화 마을에 본래 丁火所가 있었지만, 또 본부(本府)에 관련된 丁火所였지만, 이제 그 사정이 달라졌다."는 의미 아닌가? (그 다음 항목에서는 ‘古跡’이라 지칭했다)
4) <정묘지,부동방>에 기록된 "古跡/丁火所, 즉금 平化" 역시 ‘봉수촌’으로 오단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 같은 억불산 연대에서 조선시대 내내 운용되어온, 당대 현존시설 봉화대를 두고 <정묘지,1747> 시점에 굳이 "古跡"이라는 회고적 명칭으로 부를 수 있겠는가? 만약 봉화촌으로 보았다면 "봉화촌, 즉금(卽今) 平化" 또는 "봉화대, 卽今 억불산 연대"라 표기하면 족했을 일. 이 부분 "古跡/ 정화소, 卽今 평화"는 "옛 시절에 뭔가 다른 역무를 수행했던 丁火所가 지금은 平化 마을에 ‘古跡’으로 남아 있음"을 말해주는 취지의 표현일 것.5) <정묘지,부동방>에 기록된 "총묘/ 위유형墓 在평화 茶田嶝" 부분도 아주 중요하다. “魏유형 묘소가 '平化, 茶田등'에 있다”는 것인데, 현금에도 ‘위유형묘’가 ‘茶田등(찻등)'에 있고, 야생차밭(茶田)이 실제 있고, '府 동쪽5리'로 표기된 거리와 방향이 부합하기에, ‘平化’를 '茶所 정화소'로 지목하게 된 것.

이제 필자의 추론이다.
그렇다면 장흥府 '丁火所' 유래는 어떠한가? 여말선초 戶長시대 유풍으로 '정화소(政化所, 풍헌소)' 기구를 운영했던 타지사례도 있다. 정식 행정체제로 편입되기 전에 '鄕,所'의 자치조직으로 '호장(戶長), 향임'이 그 지역을 관장했고, 지역 대표성씨가 되었다. 그런데 고려말에 장기간 외지 피난살이릍 갔다가 돌아온 장흥府는 1392년경 새 治所로 '중녕산성'을 축성하였다. 그때 기록 <중녕산 황보성記>에 등장한 주도자 '4명 戶長' 중에 '申봉한 戶長'이 공급 주관자로 나오고 있다. 이에 필자 의견은 그렇다. 앞서 소개한 기록들,  "관내성씨/丁火, 申" “마을/平化, 본(本)丁火所” "古跡/丁火所, 즉금 平化" "총묘/위유형묘(墓), 재(在)平化, 茶田嶝" 부분에 ‘平化 찻등의 茶田 현존’과 ‘구전(口傳)’ 등을 종합하면, 다음 사정으로 귀결될 수 있다. 즉 "여말선초 申氏 戶長세력이 ‘부동방 平化’에 있던, 옛 丁火所에서 자치적 직무를 관장하였으며, 동시에 ‘茶田이 있는 平化’ 일대는 본래 茶 생산을 했던 곳일 것./ 平化에 있었다고 전해지는 淨化寺는 丁火所와 결합 또는 혼동되었을 것". 한편 '平化' 유래를 이른바 大地主 평산申氏의 화속지(化屬地)에서 찾는 견해도 있는데, '火屬지'를 '化屬지'로 오해한 잘못은 있지만, 어쨌거나 '丁火, 申씨/ 丁火所'와 일부 맥락이 닿을 수는 있겠다. 앞서 나온 ‘魏유형’은 ‘平化’로 이거(移居)를 했던 입장인데, 마침 그 배위(配位)가 평산申氏였다.

마지막 쟁점으로, ‘장흥府 茶所13’에 관하여 ‘鄕,所’와 ‘茶所’의 병존 병립여부이다. 장흥의 ‘茶所13’ 숫자는 ‘鄕,所’와 ‘茶所’가 중첩된 결과일 수 있다. ‘鄕,所’는 땅에 사람이 배타적으로 예속된 권력시스템에 속한 반면에, 茶所는 ‘鄕,所’'에 병행 가능한 부차적 운영시스템(생산설비)에 해당할 것. 또한 장흥府의 사기생산(사기소)과 장흥부 茶생산(다소) 단지는 서로 결합될 때 크게 효율적일 것. 또한 장흥 야생茶田 현황은 대부분 ‘사찰’ 주변에 위치한 바, ‘보림사, 금장사, 천관사, 금강사, 해원사’ 등에 부속된 ‘茶貢所’가 있었을 것. 이런 ‘茶貢所’라면 ‘鄕,所’의 정치적 배타성에 본질적으로 배치되는 것이 아니니, ‘鄕,所’와 茶所는 능히 중첩될 수 있다. 한편 장흥 茶史(茶事)의 역사적 배경은 예컨대 보림사 보조선사비(884) ‘茶藥’ 문구, 고려시대 지역토호(장흥임씨, 탐진최씨)의 재정수입기반, 1271년경 여몽연합군의 동정병참에 따른 특별수요발생 등 사정으로 짐작할 수 있다. 장흥府 13茶所는 그 시절 ‘茶所 특구’성격이 다분하다. <정묘지,1747, 고읍방>도 “잡세/ 작설茶”를 기록하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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