栢江 위성록/장흥위씨 씨족문화연구위원

장흥군 관산읍 방촌리는 문화의 보고(寶庫)라 불리는 마을이다. 선사시대부터 중심적인 주거지가 형성되어 오랜 역사를 지닌 곳으로 마을 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380여기의 지석묘가 이를 입증하고 있다. 방촌마을의 장흥위씨는 안항(顔巷) 위덕후(1556~1612)가 1576년경 인근 당동에서 분가하면서 입촌한 후 현재까지 대표적 집성촌을 이루며 살아오고 있다. 특히 선대에서는 천관산(天冠山)과 장천재(長川齋)에서 강학(講學)하면서 호연지기(浩然之氣)를 키워왔다. 곳곳에는 선조들의 유택(幽宅)이 위치하고 있어 장흥위문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깊은 인연(因緣)이 있다. 고려조 장흥부와 회주목의 230년간 치소 터, 회주고성과 상잠산성 터, 국가지정 존재고택, 오헌고택, 신와고택 등 3곳, 전라남도 지정 판서공파종택, 죽헌고택, 근암고택 등 3곳 총 6곳의 고택이 보존되고 있다. 또한 국가지정 석장승, 전라남도 지정 지석묘군, 삼괴정 내 느티나무 보호수, 400여년 존속되고 있는 대동계(大洞契), 300여년 존속되고 있는 무기계(無忮契), 정월 대보름 별신제 및 매귀(埋鬼), 천관산 산신제 등 각종 문화재와 전통문화가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다. 2005년 방촌유물전시관이 개관되어 선대 교지(敎旨), 문집(文集) 등 각종 유물 1,048점을 소장 전시하고 있는 등 방촌문화마을만의 큰 자랑이다. 이러한 소중한 전통문화는 1994년 정부의 전통문화마을로 지정되었다. 혈연으로 뭉쳐 살아가는 마을 현장 구석구석을 소개하고자 한다.

1. 형국(形局)

천관산(天冠山 723m) 동쪽 산자락 사방오리쯤 되는 옴팍지, 빗돌과 기와집이 여느 동네보다 많이 눈에 띄는 곳, 440년 前부터 씨내림 하여 생긴 장흥위씨 대표적 집성촌, 竹川(고읍천)따라 뱃길 열려 외항 선창(죽교리 남창)을 둔 옛 장흥의 중심 텃골, 여기가 바로 방촌마을이다.

배산(背山) 천관산은 백두대간에서 갈라진 호남정맥의 남쪽 끝 봉우리이다. 제암산(807m)에서 남서쪽으로 뻗은 줄기는 억불산(518m)과 부용산(609m)을 거쳐 양암봉(469m)으로 내려 깊은재(深峙)를 건너 그 이름 따라 천관(天冠)이란 용머리를 내밀고 남해바다를 지키고 있다. 봉우리는 사방에서 보아도 우뚝 솟아 있고 최고봉에 봉화대가 설치돼 있어 연대봉(烟臺峰)이라 한다. 이 최고봉에서 동남쪽으로 치달리다 계양봉(325m)에서 복호(伏虎)를 만들고, 앞 다리 부분에 해당하는 줄기는 서북쪽으로 뻗어 급함을 멈추고 호동(壺洞 쇵골) 뒷등(嶝) 허리인 망치봉(83m)에 이른다. 동쪽으로 이어진 야트막한 줄기를 따라 오면 장흥대로(23번 국도) 고갯길인 마상등(馬上嶝)재를 건너 상잠산성토의 능선인 찻등으로 내리면서 내동(內洞), 계춘동(桂春洞), 새터 마을을 좌청룡(左靑龍)이 감싸고 있다. 다시 연대봉에서 갈라서 동남쪽으로 뻗어내린 줄기는 성조골을 만들고 탑동(塔洞), 호산(虎山 범산), 산저(山底)를 감싸 안은 우백호(右白虎)이다. 여러 갈래로 뻗어 내린 줄기 사이에는 계곡을 만들어 영은동천(靈隱洞天) 내 큰골에서 흐른 물은 호동과 탑동 마을 앞 자락을 적셔 주고 호산(범산) 마을 뒤로 흐르는 성조골 계곡 물은 다미들을 일구게 한다. 좌청룡 줄기의 여러 계곡에서 흐르는 물은 수등들을 적셔 사람 마음을 풍요롭게 하고 수등들 남쪽으로 낮은 야산(野山)은 남쪽의 허전함을 덜어주는 남산(南山)이다. 이 산이 득량만(得糧灣) 남해바다에서 불어오는 태풍이나 마파람을 막아 주는 수구(水口)목을 형성하고 있다. 이곳에 청금(聽禽) 위정훈(魏廷勳 1578~1662) 선생의 얼이 서려 있는 장춘대(長春臺)가 있었음은 청금유고(聽禽遺稿)에 전한다. 방촌마을을 감싸고 있는 산과 바다, 들의 북쪽 竹川(고읍천) 하구는 원래 바다이고 남쪽 복와등(伏蛙嶝) 밑이 바다여서 방촌마을은 "배가 바다를 향해 출선하는 형국으로, 풍수설에서 행주형국(行舟形局)"이라 하는데 선수(船首 뱃머리)는 보밭등(寶田嶝) 지역이고, 선미(船尾 배꼬리)지역은 사장등(嶝) 지역이며, 가운데 돛은 등밭(嶝田)이 해당된다. 이러한 지세(地勢)는 사람과 재화(財貨)가 풍성히 모이기 때문에 크게 번창한다는 속설이 있다. 조선후기 이중환(李重煥)의 "택리지(擇里地)"에 평양(平壤)의 지리는 행주형국이기 때문에 우물을 파지 않는다고 했다. 이곳도 예전에는 유물을 파지 않고 내동 옥샘, 신기 신와고택 앞, 호산 길가, 탑동 위성천 집앞, 호동 천관산 주차장 위쪽 신대장 등 이곳에만 물이 있어 마을 사람 모두가 사용했다고 한다. 이러한 풍수설이 퇴색했는지 근래 가가호호(家家戶戶)와 필지별로 관정(管井)을 파서 우물이나 농업용수로 사용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평양(平壤), 청주(淸州), 공주(公州) 등이 행주 행국으로 잘 알려진 곳이다. 형국(形局)도 분지(옴팍지)형으로 아늑함과 함께 중앙에 농경지가 형성되어 있다. 또한 근거리에 득량만 바다가 위치하여 지난날 농한기 때 김 생산은 생활에 기반이 되었다.

2. 상잠산성(觴岑山城)과 회주고성(懷州古城)

1) 상잠산성(觴岑山城)
방촌마을 내동과 계춘동의 뒷산은 상잠산(158m)이다. 이 산의 정상부분에 남북으로 긴 장방형(長方形)의 산성(山城)이 있다. 현재 성벽은 거의 허물어져 있으나 성(城)의 북쪽에 출입문이었던 것으로 보이는 곳에 잘 다듬어진 큰 돌이 남아있다. 군데군데 흙과 돌을 적적하게 섞어서 쌓은 흔적이 있다. 성(城)의 둘레는 약 500m이고 성의 폭은 1~3m이며 높이는 2m 내외이다. 성을 쌓았던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747년에 간행한 장흥읍지(丁卯誌)에 의하면 상잠산이 장흥의 주산(主山)이었고 고장흥성(古長興城)이라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고려 말까지 활용됨을 뒷받침하고 있다. 정상 칼바위 아래 잔뫼(觴山)는 지형이 평평하여 군사를 조련하는 훈련장이며 마상훈련(馬上訓練)을 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현재 벅수골(진서대장군)~상잠산 하골지역 능선으로 죽교리 학교마을과 경계되고, 정상 칼바위 능선을 경계로 하여 내동 뒤쪽은 지정리 지북마을, 계춘동 뒤쪽은 송촌리 송현마을과 구분 경계되고 있다.

2)회주고성(懷州古城)
이 성(城)은 상잠산성과 방촌리를 에워싸고 있는 석성(石城)이다. 원래의 성은 천관산에서 남(南)으로 수동저수지까지 북(北)으로는 죽교리와 동(東)으로는 지정리 지북마을 까지 이어져 상잠산성과 연결된 것으로 확인된다.

천관산자락 계양봉(325m) 능선에서 시작하여 호동(壺洞)마을 뒤의 망치봉(83m)을 거쳐 망치등(望峙嶝)과 벅수골로 이어져 상잠산성까지 약 2km에 걸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가장 양호하게 남아 있는 성벽의 높이는 2m 내외이고, 폭은 4m 정도이다. 진서대장군(鎭西大將軍) 석장승이 있는 곳이 회주고성의 북쪽 성문(城門)터로, 남쪽 성문(城門)초소는 삼산마을 초입 고개 도득막등(嶝)에 위치함이 전해진다. 또한 망치등(嶝)에서는 남해와 득량만 일대가 한눈에 들어와 초소형태의 돌담이 많이 남아 있다. 성(城)의 축성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265년(원종 6) 장흥부(長興府)에서 회주목(懷州牧)으로 승격되었을 당시를 전후(前後)하여 쌓은 것으로 추정한 현재 회주고성 밖에 위치한 천관산 장천재 입구 주차장~ 옥당저수지~ 망치등 성터 밖~진서대장군 석장승 밖은 행정상 번지는 관산읍 방촌리가 아닌 관산읍 옥당리에 해당된다.

▲회주고성 표석

이어진 상잠산의 성터를 기준하여 밖으로는 관산읍 죽교리 산 번지에 해당되면서 경계가 된다. 벅수골 주변을 북문동(北門洞)으로, 상잠산 자락 한쪽에는 당대 군부대가 진(陳)을 쳐 머무름을 알 수 있는 "둔군동(屯軍洞)" 지명이 현재까지 각각 불리고 있다. 상잠산성과, 회주고성은 서쪽 천관산~북쪽 벅수골~동쪽 상잠산~남쪽 삼산 도득막등(嶝)으로 이어져 회주목(懷州牧) 치소를 둘러싸 방어하는 중요한 산성 기능을 한 것으로 사료된다. 요즘은 산림이 우거져 방촌마을에서 조망되지 않으나 지난날에는 산에서 나무를 채취해서 땔감으로 사용하여 산성을 어렵푸시 볼 수 있었다. 지난 유년시절 여름철에 소 풀 먹이러 다녔던 망치등(공동묘지), 상잠산의 둔군동, 하골재(방촌마을과 지북마을 간을 왕래했던 산길의 정상 일대) 주변에서 회주고성과 상잠산성 터에 일렬의 담 형태로 축성된 성터와 무너진 산성 돌 사이에서 깨어진 도자기, 옹기 등을 많이 보았다. 지금은 잡목이 우거져 두 곳의 산성 터에 접근이 어렵고 마을에서도 조망되지 않는다.

3. 대동계(大同契)

마을의 대동계(大同契)와 관련된 자료는 1803년(癸亥) 위도제(魏道悌)가 쓴 「방촌동약서문」이 있다. 자료에 의하면 "1608년(戊申) 어간(語幹)에 회진만호 김차옥이 동계를 창립하였으나 오래되지 않아 파해졌다. 그 후 1630년(庚午) 어간에 김공이 이를 개탄하고 다시 소동계를 만들었으나 이 역시 오래되지 않아 유명무실해졌고 그 후 김차옥은 이미 죽은지라 任, 白, 朴공 등이 주측이 되어 다시 계안(契案)이 성립되었다." 고 적고 있어 임진왜란이 지난 뒤 마을이 안정되자 대동계와 소동계가 도강 김공(김차옥)을 주축으로 설립되었다가 유명무실해지자 약원(弱員)이었던 任, 白, 朴氏 등과 여기에 魏氏들이 참여하여 방촌동계가 조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대동계의 조직은 청금(聽禽) 위정훈(1578~1662) 선생이 주도하였다. 「聽禽翁煎花約」 에 의하면  봄과 가을에 경치 좋은 곳을 찾아 친목을 도모하면서 협력과 결속을 꾀하였다고 한다.

방촌마을 대동계는 공동체 모임으로 주민 친목도모, 단합,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정월 대보름날 별신제(別神祭), 천관산 산신제(山神祭), 기우제(祈雨祭), 복달임, 매귀(埋鬼) 보존 등 마을의 대소사를 처리해오면서 400여년을 지탱해왔다. 보유 자산(資産)은 관산읍 지정리에 위치한 논 5두락과 일정액의 현금을 보유하고 있다. 또한 방촌마을 내에는 내동 동계, 계춘동 동계, 새터 동계, 산저 동계, 탑동 동계 등 소단위 5개의 동계가 150~200년 전에 자연마을로 조직되어 대동계를 뒷받침 하면서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

 ● 방촌마을 이규(里規) ●
우리 방촌(傍村)은 회주(懷州)의 고을 터로 敬老孝親과 美風良俗의 風土와 정서가 전래된 문화마을이요, 문화체육부에서 지정된 특수전통문화 마을로써 祖上代代로 계승(繼承)된 고매(高邁)한 유지(遺志)을 이어받아 子孫萬代에 물려주고자 義務感과 責任感을 느끼면서 이민 일동은 다음 항목과 같이 이규(里規)를 제정하여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를 엄수하여 타의 모범이 되도록 날인(捺印) 서약(誓約)한다.

ㆍ이민은 어른을 공경하고 아랫사람을 사랑하고 환란(患亂)에 상호 협조한다.
ㆍ이민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불륜(不倫)을 범하지 않는다.
ㆍ이민은 안녕질서를 위하여 환경과 정서를 저해할 수 있는 시설(施設)을 할 수 없다.
ㆍ우리의 생활터전을 보존하기 위하여 里의 행정구역내에 이민 가족 이외의 분묘(墳墓)를 조성할 수 없다. 여기 이민이라 함은 5년 이상 거주자를 말한다. 단 이민의 가족이라도 향사에 등한한 者는 이민의 중의(衆議)에 따라 제외할 수 있다.
ㆍ이민의 중의로 결정된 사항은 자기의사에 反한다고 하여 임의로 방언(放言) 또는 순응(順應)치 않고 위배자(違背者)가 生할 시는 이민의 중의(衆議)에 따라 措處한다.

本 이규는 12월 22일부터 시행한다.
서기 1997년 12월 21일

방촌마을은 등밭, 동산밑, 윗골, 내동, 계춘동, 새터, 산저 응달, 산저 양달, 호산, 탑동, 호동, 번덕지 등 12개 뜸으로 구성된다. 110호 주민들이 거주하면서 440여년 마을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이중 내동 동계, 계춘동 동계, 새터 동계, 산저 동계, 탑동 동계는 소단위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2000년 以前까지는 사람이 집에서 임종(臨終)하면 매장(埋葬)하는 풍습에 따라 주민간 상부상조와 공동체 조직 동계(洞契)를 중심으로 장례(葬禮)를 치러 "상포계(喪布契)" 성격이 짙었다. 이러한 동계는 거주민들의 고령화와 젊은 청·장년층 부재 등 농촌 생활문화의 변화에 따라 임종(臨終)시 화장(火葬)과 장례식장(葬禮式場) 이용으로 전통적 풍습은 쇠락(衰落)하고 있다. 그러나 주민들의 전통문화 마을에 대한 자긍심으로 존속 의지가 강해 상부상조(相扶相助) 근본 미덕(美德)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현재 방촌마을 대동계 산하에는 리장(반장), 무기계, 매귀계, 어촌계, 부녀회, 개발위원회, 새마을지도자회, 민속마을추진위원회, 유물전시관관리위원회 등 각각의 단체가 마을 일을 담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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