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茶에 관한 몇 단상이다.
1)장흥茶도 중국에서 왔을 것. 구산선문의 첫째 가지산문 보림사에 있는, ‘다약(茶藥)’이 새겨진 보조선사비(884)를 보면, ‘육조 혜능(638~713)’ ‘다성 육우(733~804)’ 시대에 멀지 않다. ‘천표 연간(742~756)’에 중국과 인도를 다녀온 ‘원표 대덕’이 가지산사(759)를 창건했고, 인근에 장보고의 청해진(828~ 851)이 존재했다. 가지寺를 858년에 인수한 ‘보조선사 체징(804~880)’이 입적하고서 ‘보림사’ 인증사액(884)을 받은 것이니, 돌이켜, 보림사 茶에는 ‘원표 대덕’의 몫도 있었을 것.
2)고려 해저유물을 남긴 조운선 ‘태안선’은 1131년경에 ‘탐진현’에서, 특히 ‘마도1호선’은 1207~1208경에 ‘장흥 수녕현’에서 출발하였다. 그때 곡물 등을 적재한 30개 도기호(대형은 80㎝크기)가 있는데, 혹 ‘녹차, 떡차’ 등을 밀봉하지 않았을까? 대나무 소반과 청자 표형주자도 함께 있었다.
3)장흥부의 ‘장흥(長興)’, 수녕현의 ‘수녕(遂寧)’ 지명 역시 중국의 茶, 도자와 함께 건너왔을 수 있다. 중국에서 도래한 장흥임(任)씨의 원주지 ‘소흥’ 지역에 마침 ‘장흥’이 있다. 고려시대 ‘벽사도(碧沙道)’ 길은 장흥 탐진청자와 녹차와 청태전도 오가는 통로였을 것.
4)1274년경(1차), 1281년경(2차) 여몽연합군이 장흥에서 일본정벌을 준비할 때 군수용 병차(餠茶/錢茶)도 필시 준비했을 것. 그 때문에 장흥지역 13다소(茶所)가 집중된 것은 아닐까? ‘운고(雲膏)소’는 고약(膏藥) 형태를 지칭했을 것 같다.
5)장흥사람 원감국사 충지(1226~1293)가 남긴 詩에는 그 시절 장흥의 ‘보림寺, 금장寺’가 있다. ‘보림寺’ 주변은 물론이지만, ‘금장寺’가 있는 용두산 주변에도 아직 茶田이 풍부하다.
6) <세종실록지리지, 장흥>에 토공(土貢)으로 ‘茶’가 있다. 장흥뿐만 아니라, 남도 일대에는 ‘다산(茶山), 찻등’이 여기저기 산재한다.
7) 아쉬운 사정은 ‘옥봉 백광훈(1537~1582)’이 노래한 ‘태전(苔錢), 長태전’이다. 마시는 ‘청태전(錢茶)’은 아니고, 당시(唐詩)에 빈출하는 ‘둥근 이끼, 태전(苔錢)’에 해당한다. 백광홍이 ‘사임 위덕홍’에게 보낸 詩에 나온 “柴門無客 長苔錢/ 花滿山時 月滿天” 문구가 아쉽다.
8)전라병영이 장흥에 있던 시절에 장흥판관을 했던 ‘취흘 유숙(1564~1636)’이 장흥부사로 나가는 ‘서촌 김정목(1560~1612)’에게 준 전송詩의 제9수, <詠 菜茶之法>에 ‘곡우(穀雨)前. 菜茶풍속’이 언급됐다. 장흥 풍광을 “만산다(滿山茶)”로 표현했다. <취흘집>에 나온다.

海天腥瘴中人多 /바닷가엔 장기로 찌든 中人 많아
狼藉珍羞不足誇 /진수성찬을 따로 떠벌릴 것 없네
欲到醉鄕醒渴夢 /취향(醉鄕)에서 갈증을 깨려거든
雨前須菜滿山茶 /‘곡우(穀雨)’전 ‘만산다’를 따야하리

9)장흥읍지 <정묘지,1747>에 있는 “고읍방, 잡세(雜稅) 작설차 / 회령방, 민역(民役) 작설” 부분은 그 무렵에 아직 ‘작설차(雀舌茶)’가 성행했음을 말해준다.
10) 1801년경에 강진에 유배온 ‘정약용(1762~1836)’에 관한 이야기이다. 1810년경 정약용이 장흥에 보낸 <떡차(병차) 편지> 수신인은 누구인가? 단언컨대, ‘1801년~1819년 장흥유배객, 치교 이관기’이며, 장흥제자 정수칠(1768~1835)이 아니다. 그 스승에게 오가는 장흥제자에게 굳이 편지를 쓰며 따로 물품배송을 하겠는가? 편지에 기재된 ‘관성(冠城) 예려(汭旅)’는 ‘장흥주민 정수칠’이 아닌, ‘유배객 이관기’를 가리킨다. 정약용은 1810년경 <‘치교’에게 주는 시>도 남겼다. 다신계 18제자 정수칠이 남긴 기록은 모두 없어졌으며, 또한 떡차 기록도 없으나, 영광정씨집 어느 대밭에 고차수(古茶樹)가 있다한다.
11) 이제 ‘장흥 보림사 구증구포(九蒸九曝)’ 여부이다. 혹자들은 “정약용이 보림사에 와서 스님들에게 떡차 제조법과 구증구포법을 가르쳤다.”고 단정해버리나, 아니다. 정약용은 보림사에 온 일이 없고, 그 부분 기록도 없다. ‘귤원 이유원(1814~1888)’이 얼핏 전해 듣고 <임하필기, 호남사종(四種)> 등에 오기(誤記)한 전문담(傳聞談)을 오해하는 것. ‘이유원’은 ‘장흥 보림(寶林)사’를 ‘강진 보림(普林)사’로 혼동하며 “보림사 在강진현”이라 착각한 수준이고. 1841년에 문과급제한 그가 정약용을 만난 일도 없다.
이른바 ‘구증구포’는 “그만큼 수차 포제하라”는 법제 원칙을 강조한 것.
12) 1830년에 일지암을 중성하고 ‘보림 백모차’ 떡차(餠茶)를 들고 상경한 ‘초의 선사(1786~1866)’는 ‘해거 홍현주(1793~1865)’등과 교류하며 전통茶의 선풍을 일으켰다. 이때의 ‘보림사(寶林寺)’ 명칭과 명성은 객관적 사실일 것. ‘보림 작설차’도 유명해졌다.
13) 정약용 유배기에 정(丁)씨로 각별했던 ‘시오 호의(1776~1868)’의 제자에 ‘범해 각안(1820~
1896)’이 있는데, 그는 茶歌에서 남도사정을 “보림금설(禽舌)/ 화개(花開)진품/ 함무(咸務)토산/강해(康海)제작”으로 언급하였다. ‘장흥보림/하동화개/함평무안/강진해남’은 거명되나, 거기에 ‘보성’은 없다. 요즘 어떤 역사적 근거도 없이 단지 “노원이 ‘뇌원’으로 변했다.”면서 이른바 뇌원차 산지를 자처하는 보성이지만, 보성의 ‘노동,노산,노계’를 아무도 ‘뇌동,뇌산,뇌계’로 부르지 않는다. 그들이 내세운 ‘추(적)촌향, 포곡소’가 뇌원차 茶所임을 증명할 역사적 사정도 전혀 없다.
14) 일제시대에 장흥을 답사하여 청태전(餠茶/串茶) 유습을 확인한 ‘日人 일행’에게 나름 감사해야 할 일. 현지인 구술채록 및 재현기록은 객관적 증빙으로 남았다.
15) 茶나무 생장의 좋은 조건은 어떠한가? 허흥식 교수는 장흥의 지리적 환경을 높이 평가한다. 안개와 비자나무와 대나무 그늘과 온도와 습도의 조화를 강조했다.
16) 마지막으로 장흥출신 최계원 선생의 저서(1983)와 친구 송용석 교장의 석사논문(‘보림사 토산다전과 전통다업연구’,1989)에 다시 감사드린다. 그때 받은 논문을 지금도 보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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